그래야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겨울 공주 여행

by 밤 비행이 좋아
KakaoTalk_20251229_193531351_01.jpg


고속도로 휴게소에 내리는 것도 오랜만이다. 평지에서 우뚝 솟아난 것처럼 보이는 눈 쌓인 속리산은 관광객을 압도했다. 여행 중에 마주한 겨울을 실감한다. 공주에도 눈이 쌓여 있을까 기대감이 생겼다. 기나긴 운전 끝에 휴게소에 잠시 들른 사람들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연신 사진을 찍어대기 바쁘다. 나 또한 겨울 풍경에 취해 생각지도 않았던 우동을 한 그릇 주문하고 말았다. 바쁠 게 없다. 느긋하게 겨울을 감상하고 싶었다. 어차피 느린 시간을 보내기 위해 떠난 여행이었다.


며칠 전부터 ‘비움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노트에 꼼꼼하게 적은 뒤, 검토하고 인정한 후, 보내주는 작업이다. 예를 들어 ‘사실은 나 00을 싫어했다’라든가 아니면 ‘사실은 OOO을 좋아했다’라든가. 비움 작업이라니, 거창해 보이지만 아주 사소한 일들이다. 열 개 남짓 되는 리스트 중 한 가지를 공유하자면 ‘사실은 여행이 귀찮다’가 있다. 정체성을 부인하는 기분이 들어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사실은 여행이 귀찮았다.


‘짐 싸고 풀고, 알아보는 거 너무 귀찮아. 그래서 딱히 여행은 안 가고 싶어’

몇 해 전 왜 여행을 떠나지 않느냐는 나의 질문에 여행을 시작하기가 너무 귀찮고 힘들어서 차라리 떠나지 않기를 택했다는 지인에게 그래도 떠나고 나면 즐겁고 행복하지 않은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사실상 경악에 가까웠을 것이다) 물었다. 그는 그냥 웃고 말았을 뿐이다. 오랜만에 긴 휴식 기간이 시작되자마자 만료된 여권을 갱신하고 항공권을 알아보면서 깨달았다.

‘아, 피곤한데.’


여권 갱신을 신청하기까지도 꽤 긴 시간이 걸렸다. 귀찮아서. 나이가 들면서 바뀌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싫었지만 여행지의 낯섦에서 얻는 경험과 행복이 더 컸기에 무시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귀찮아서 티켓 예매를 미루는 나를 발견하고 배신감이 들었다.


‘내가 시간만 생기면 파리도 가고, 리스본도 가고, 전국을 여행 다닐 거야. 시간이 없으니 어디 갈 수가 있나.’

시간이 없어 미뤄왔던 여행 계획들은 나의 게으름과 귀찮음으로 뒷전이 되고 말았다. 하루 이틀 여유가 생겨 떠나보려 마음을 먹어도 다음 주 일정에 차질이 생기지 않을까(변명), 좀 피곤할 것 같은데(회피), 어떻게든 핑계를 만들어 나중에 더 크고 긴 여행을 떠나리 다짐했다. 도대체 큰 여행이 뭐길래.


드디어 인정하기로 했다. 그래야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좋아하는 척, 관심 있는 척하면서 자꾸만 책상에 쌓아두는 그런 녀석들을 치우지 않으면 앞으로도 나는 내 마음을 모르고 나를 속일 게 분명했다. 어쩌면 영영 여행을 떠나지 않을지도 몰랐다. 여행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떠들고 다녔는데 귀찮아서 떠나는 것조차 못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사람이 될까. 덜컥 겁이 났다.


먼저 가까운 곳으로 시험 삼아 가볍게 ‘작은’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공주는 학창 시절 수학여행이나 소풍을 떠날 때면 지역을 선택할 수 있는 가정통신문에 늘 등장하던 지역이었다. 역사적인 장소이기 때문에 나열된 부여, 공주, 경주 등 고루하게만 느껴지는 도시 중 어디든 관심 없었다. 어쩌다가 공주가 떠올랐는지 모를 일이다.


KakaoTalk_20251229_193531351.jpg


한겨울이지만, 밤 파이를 파는 카페거리 근처는 관광객으로 북적거린다. ‘여행자들은 계절을 가리지 않는 법이지.’ 밤 파이 원조라는 카페에 들어서니 공산성이 한눈에 담겼다. 커다란 통창 밖으로 보이는 공주의 옛 요새는 매우 이질적으로 보였다. 마치 과거의 거울을 들여다보는 기분이랄까. 기계로 내린 커피와 서양식으로 구운 밤 파이를 먹으며 공산성을 보고 있으니 잃어버린 여행의 감각이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요새에 오르고, 시내를 굽어보고, 감탄한다. 파이 속 밤이 더 고소해진다.

‘이거였다. 시간의 흐름이 불분명한 진공관 속에 있는 기분, 여행할 때만 느낄 수 있는 감각’


일단 스위치가 켜진 공주 여행은 순탄하게 흘러가는 듯했다. 빛바랜 작은 소도시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은 한정되어 있다. 게다가 겨울이다. 푸르름이 사라진 계절에 낯선 곳을 여행하는 나는 뭐를 기대해야 할까? 황량한 겨울 풍경은 공주의 매력을 반감시킨다는 지인의 얘기에 은근히 불안했던 마음은 제민천을 따라 걸으며 눈 녹듯 사라졌다. 공주는 아늑했고, 따뜻했다. 원도심 한가운데를 유유히 흐르는 제민천을 따라 아늑하고 따뜻한 공주를 발견했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이렇게 작은 소도시에 독립 책방만 4군데가 있다는 사실이다. 유달리 홀로 여행하는 혼행족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아까 거리에서 눈이 마주쳤던 이를 서점을 들를 때마다 보게 된다. 코를 훌쩍이며 따뜻한 책방으로 들어서 누군가가 남겨 놓은 방명록을 읽고 책방지기가 추천한 책을 조금 읽다가 마음에 드는 책 한 권을 사서 나온다. 유독 낮고 오래돼 보이는 건물들이 더 정겹게 느껴진다.


KakaoTalk_20251229_193531351_03.jpg


적산가옥을 비롯해 역사적인 건축물이 여전히 굳건히 서 있는 풍경에 공산성에서 느낀 이질감이 되살아났다. 적막이 흐르는 거리에 부드러운 오후의 햇살이 제민천에 내리고, 나는 옛 건물 사이를 물 흐르듯 걷는다.

‘이 느낌 때문에 내가 여행을 좋아했지.’

다시 깨닫는다.


해 질 녘 무령왕릉을 찾았다. 우리나라 소도시를 여행할 때 빼먹을 수 없는 게 바로 무덤이다. 무덤이라 하니 삭막해 보이지만 선조들이 묻힌 유적지를 찾는 일이 하나의 나들이처럼 느껴진다. 경주의 대릉원, 서울의 태릉, 공주의 무령왕릉... 무덤이지만 웅장하고 푸르른 공간에서 시간의 흐름을 느끼고 위안을 얻는다.


여행도 감각이 필요하다. 오랜만에 낯선 동네에 와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려니 뭘 해야 하는지, 어디를 가야 하는지 잠시 머릿속이 멍해지는 나를 보고 어처구니없는 실소가 나왔지만, 이미 ‘여행은 귀찮다’는 인정을 한 뒤였기 때문에 움츠러들거나 당황한 모습을 감추려 어색해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잠깐 멈춰서 찾아볼까’가 된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침 여권이 나왔다는 알림 문자가 도착했다. 이제 미루지 말고 숙소에 들어가면, 바로 항공권을 예매해야겠다.

작가의 이전글나의 ‘리스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