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렌터카 도전기
“살짝 좌회전입니다.”
좌회전이면 좌회전이지, 살짝은 뭐란 말이야! 끝까지 말썽이다.
“어떻게 해. 저기서 좌회전이야?”
“아니야! 더 가서, 더. 저기 저 샛길인 것 같은데, 아니 여기.. 그... 방금 지나갔어...”
“...”
“한 바퀴 더 돌지 뭐. 하하하.”
숙소를 코앞에 두고 같은 길을 두 번째 뱅뱅 도는 중이다. 부유한 맨션촌이라고 좋아했던 숙소는 이제 골칫거리가 되었다. 차고지에 진입할 수 있는 길이 하나뿐이라 ‘살짝 좌회전’을 못하면 도르마무처럼 계속 돌아야 했다. 여기는 비보호 좌회전도, 골목길도 없는 낯선 나라다. 순간 불안이 엄습했다.
‘우리 이러다가 집에 못 들어가는 거 아니야? 이렇게 계속 도는 거야. 계속. 계속. 기름이 떨어질 때까지. 그러다가 견인되는 거지. 그게 낫겠다.’
두 번 돌고 나니 길눈이 트였다.
“이번엔 절대 실수하지 말자.”
“나도 이제 침대에 눕고 싶어.”
로터리를 돌자마자 바로 왼쪽으로 붙어 안전하게 살짝 좌회전에 성공했고, 집주인에게 받은 리모컨으로 차고지 문을 열고 무사히 주차했다. 3분 거리를 30분이나 걸려 도착했다. 시간이 뭐가 중헌가, 도착한 게 중허지.
시드니에서 차를 빌려 멀리까지 가보자는 아이디어는 우리 둘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관광객이 자주 가는 그런 곳 말고, 대중교통으로 가기 힘든 곳을 찾아가 보고 싶었다.
호주는 좌측통행이다. 운전대도, 깜빡이도 우리와 반대에 붙어 있다. 좌측통행이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게다가 나는 초등학교 때 좌측통행을 하지 않으면 교무실에 불려 가던 시절을 살았다) 그저 방향만 다를 뿐 달라질 건 없다.
...라고 생각했다.
이미 굳어진 습관에 반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0.1cm의 미묘한 차이로 뇌는 오작동했다. 깜빡이를 켠다는 게 자꾸 와이퍼를 작동시키는 바람에 신기하기도 하고 어색한 마음에 웃음을 터뜨리는 것도 잠시, 렌터카 주차장에서 차를 빼는 순간 웃음기가 사라졌다. 이곳에는 한국과 달리 친절한 도로표지판도, 고속도로 색깔 표기도 없고 중앙선, 실선과 점선이 혼재되어 있었다. 보조석이라고 나을 건 없었다. 허전한 왼쪽 어깨를 감싸고, 가상의 브레이크 페달을 밟아댔다. 블루마운틴스로 향하는 2시간 동안 우리는 잔뜩 얼어붙어 90km 속도로 정주행 했다.
쉬운 길도 뱅뱅 돌고, 헤매고, 실수를 거듭한 끝에 도착한 블루마운틴스의 에코포인트는 새하얀 장막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산 중턱을 달릴 때만 해도 맑았던 하늘이 거짓말 같았다. 허탈함에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뭐 어쩌겠는가. 날씨가 꽁꽁 감춰버린 걸.
이런 일이 흔하다는 듯 안개 너머의 풍경을 상세하게 그려놓은 지도를 보며 세 자매 봉 위치를 추측해 봤다.
'저쯤에 세 자매 봉이 있는 거야.'
지레짐작 그곳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돌아왔다. 이렇게 사진으로 남겨야 나중에 우당탕탕 렌터카 일화를 기억할 수 있다. 호주를 여행한 내 지인들 중 누구도 세 자매봉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어차피 아무도 보지 못하는 전설 같은 풍경일 뿐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사실 멋진 풍경을 보지 못해 속상한 마음보다 차를 멈추고 땅에 발을 붙였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긴장이 풀리자 허기가 몰려왔다. 아침부터 뱃속에 집어넣은 건 전날 마트에서 산 과자와 젤리가 전부였다. 배고픔도 잊을 정도로 최선을 다해 운전한 모양이다. 당이 떨어질까 봐 끊임없이 과자 껍데기를 벗겨 입에 넣고, 젤리를 씹었다. 이제 진짜 음식을 넣어 줄 차례였다.
시곗바늘은 오후 2시 30분을 향하고 있었다. 식당이나 카페가 문 닫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인근 마을로 가서 아직 문이 열려 있는 곳 중 사람들이 가장 많은 곳으로 향했다. 운 좋게 2층에 남아있는 자리를 차지했고, 손 그림으로 그려놓은 귀여운 메뉴판을 정독 후, 가장 비싼 연어 샌드위치와 오늘의 수프, 망고 스무디를 주문했다. 그럴 자격이 충분했다.
오늘의 수프는 치즈를 잔뜩 올린 따뜻한 감자수프다. 사발 채로 가득 담겨 나온 수프 양에 입이 떡 벌어지는 것도 잠시 숟가락에 가득 퍼서 뜨거움을 참고 한 입. 뱃속이 찌르르하다. 따스한 기운이 채워졌다.
그제야 식당의 정겨운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낮은 조도와 오래된 목조 인테리어가 포근하게 느껴진다. 어느 시골 마을의 한 장면에 들어온 기분이 든다. 주문을 받는 사람들도 할아버지, 할머니다. 신기한 식당이다. 천천히 배를 채우고 문 닫기 직전, 따뜻한 필터 커피 한 잔 테이크아웃해서 천천히 마을 주변을 걸었다. 보지 못한 세 자매봉은 잊히고 도시와 다른 호젓한 분위기에 취해 좌측통행 농담을 주고받는다.
우회전입니다.
긴 터널을 나서자 선탠이 안된 창문을 뚫고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고 긴장이 탁 풀렸지만, 곧 빠져나가야 한다는 내비게이션의 안내 문구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저긴가 보다. 우회전.”
오른쪽 길로 빠지는 순간 내 눈에 슬로모션처럼 포착된 손바닥만 한 표지판에는 ‘bus lane’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뿔싸, 버스 전용 차선에 진입해 버렸다. 10일간의 시드니 여행 중 가장 아름다운 날이었지만, 풍경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은 하얘지고 귀에서 삐 – 이명이 들렸다.
제발 경찰차라도 만나기를 바랐다. 벌금이라도 내고 에스코트를 받고 싶었다. 설상가상으로 우회전을 기다리는 우리 뒤로 버스가 따라붙었다.
‘빵빵’
이 어려운 길을 우리는 왜 선택했을까.
여행을 떠나면 온갖 불편함이 따라붙지만, 낯선 곳을 여행하고자 하는 욕망, 새로움을 경험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과거의 고생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매번 떠날 생각을 한다. 잠자리, 먹거리, 심지어 한국과 다른 기후마저 하나도 편할 게 없는데 우리는 낯선 도시를 여행하면서 해방감을 느끼고 도전 정신에 젖는다. 이번 여행에서는 저번에 몰라서 놓쳤던 것까지 다 해보자고 결심하면서.
여행 중인 나는 친절해진다. 그래서 세상이 더 아름다워 보이고, 불같은 성격도 한결 잦아든다.
‘이 도시는 왜 이렇게 아름답고, 친절한 걸까.’
이곳에서 나는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낯선 이에게 미소와 헬로를 남발하고 한쪽으로 비켜주는 미덕을 베풀기도 한다. 민망하게도 한국에서는 집에 가스 불이라도 켜두고 온 사람처럼 저돌적으로 길을 걷는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나도 몰랐던 내 모습이 낯선 곳에서 발현된다.
한국으로 돌아와 사진을 넘겨 보면서 그때는 몰랐던, 보이지 않았던 우리의 감정과 기분이 보인다.
“오히려 처음부터 렌트를 해서 동부 해안 쪽을 따라 쭉 내려왔으면 더 좋았겠다.”
매번 아쉬움이 남는다.
“근데… 좌측통행하는 나라에서는 렌트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