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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비행이좋아 Aug 09. 2019

#4 라벤더 향을 따라

인생 첫 단체 투어


그루누이는 사형대에 올라 공중으로 손수건을 던졌다. 그 손수건에는 12명의 여인에게서 채취한 향수 한 방울이 배어있다. 단 한 방울. 그 작은 손수건을 따라 군중이 물결친다. 흥분으로 가득 찬 광장에서는 광기 어린 파티가 벌어지고 그는 그렇게 사형대를 벗어난다.

     ㅡ 파트리크 쥐스킨트 소설 <향수> 중



고등학교 때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를 읽고 경악을 금하지 못했었다. 세상에 이런 미친놈이 있나. 적나라한 묘사는 둘째치고 단순히 ‘향’이라는 눈에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잠시 머무르다 사라져 버리는 것에 자신의 영혼을 팔아버리다니. 영화 속 벤 휘쇼의 실제 같은 연기를 본 후에는 한동안 무서워서 잠도 못 잤었다. 시간이 흘러 한 개인의 첫 이미지를 결정하는 짧은 찰나에 ‘향’이라는 요소가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나의 이상형은 자세가 바른 남자와 좋은 향기가 나는 사람이 되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향기 나는 사람이 되기를, ‘어, 이 향 00 씨 향인데’ 연상되길 바라는 향수를 찾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루누이가 그러했듯이 무색무취인 것만큼 아프고 힘든 것도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계획했던 파리가 아니라 남프랑스에서 이번 여름을 시작하게 된 이유도 다 향 때문이다. 라벤더 향. 

마릴린 먼로는 잠자리에 들기 전 유일하게 필요한 건 비싼 실크 잠옷도 샴페인도 아닌 샤넬 넘버 5라고 했다. 나에게 잠자리에 들기 전 필요한 건 라벤더 에센셜 오일을 한 방울 뿌린 가습기다. 스트레스 완화에 좋다는 말에 홀려 처음 구매한 이후로 그 향과 효능에 반해 라벤더 오일, 바디 로션, 핸드크림 등 라벤더 향으로 무장하고 있다. 

아마 6월 말 즈음이었던 것 같다. 언제나처럼 여행 관련 사이트들을 뒤적거리다가 한 사진을 보게 되었다. 보랏빛이 물결치는 라벤더 밭 한가운데 서 있는 새하얀 원피스 차림의 여인을 본 순간 결심했다. 


여기 꼭 간다. 근데 이게 어디지? 


그곳은 프로방스의 발랑솔이라는 곳으로 매년 6월 말 ~ 8월 초만 되면 온 세상이 보랏빛으로 일렁이는 아름다운 지역이었다. 발랑솔. 처음 들어 보는 아름다운 이름의 프로방스 지역에는 5km에 달하는 라벤더 밭이 펼쳐져 있단다. 그 길로 남프랑스를 여름의 시작으로 점찍었다. 파리한달 살기만큼이나 매혹적인 주제였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아비뇽으로 날아가고 싶었지만 가장 가까운 취항지가 니스였던 관계로 이번 여름을 니스에서 시작하게 되었고 라벤더 밭에서 가장 가깝다는 아비뇽까지 TGV를 타고 이동했다.

아비뇽은 이름만 들어도 익숙한 곳이다. 왕과 교황의 대립. 교황청의 굴욕적인 역사. 세계사 시간에 배웠던 아비뇽의 유수로 기억되는 이곳은 니스와 비교하면 굉장히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소도시다. 성문을 들어서는 순간 옛날 중세 시대에 들어선 느낌이 든다. 성문 안과 밖의 경계가 명확했던 옛날, 모든 건 성문 안에서 이뤄졌다. 집도, 시장도 다 안에 있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다. 성문을 들어서면 아비뇽 시내가 시작된다. 고즈넉하고 작은 건물들이 화려하고, 사람 많고, 모든 게 큼직했던 니스와는 180도 다른 모습이다. (아비뇽 축제 시즌이 되면 말도 못 하게 화려하고 인파가 몰린다고 한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막 아비뇽 축제가 끝난 시기였다.)



다리 건너에서 바라본 아비뇽 성



프로방스를 가장 쉽고 여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방법은 렌터카를 이용하는 것이다. 이 마을에서 저 마을이 워낙 멀리 떨어져 있고 대중교통이 잘 발달해 있지 않아서 렌터카 혹은 투어 프로그램을 신청해야 한다. 하지만 지형이 워낙 험난해서 초보 운전자에게는 추천하지 않는 방법이다. 그래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투어라는 걸 예약하게 되었다. 단체 여행이라면 치를 떨 정도로 싫어하던 내가 라벤더 필드 한번 보자고 프로방스 라벤더 투어라는 상품을 신청하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장롱면허라서. 면허 따고 1년도 안된 애송이가 마지막으로 운전한 건 바로 운전면허장에서였다. 국제 면허 따위가 있을 리 만무하다. 프로방스 지역에서 좋은 평판을 받고 있는 전문 투어 사이트에서 이것저것 살펴보다가 반나절 투어로 할까 종일 투어로 할까 고민을 하다가 각종 포토스폿에 멈춰 섰다가 2~3군데의 라벤더 밭에 들른다는 종일 투어로 마음을 굳혔고 담당 가이드 그리고 다른 일행들과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내 머릿속 단체 투어는 20인 정도 되는 인원이 깃발을 따라 우르르 몰려다니며 사진 찍기 바쁘고, 정해진 식당에서 미리 준비된 식사를 하고, 기념품 가게에 가서 쇼핑하는 거였는데 아비뇽에서 경험한 내 인생 첫 단체 투어는 생각보다 아니, 투어에 참여해서 다행이었다고 생각될 정도로 좋았다.





투어 당일 유독 바람이 불었다. 집합장소인 아비뇽 관광정보센터 앞에 15분 일찍 도착하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픽업 차량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역시나… 우르르 투어인가’ 알고 보니  라벤더 투어 이외에도 와인투어, 무슨무슨 체험 투어 등 다양한 관광상품들이 있었고 그날의 모든 투어가 같은 장소에서 출발하는 방식이었다.





파리의 기온이 40도를 치솟고 온 유럽이 더위에 말라가고 있다는데 아비뇽에서는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남프랑스의 바람은 강하고 건조하다. 시원하게 흔들리는 가로수 아래서 기다리니 픽업차량과 가이드들이 속속 등장해 팀별로 사람들을 모아 출발하기 시작했다. 우리 팀은 라벤더 투어답게 라벤더 박물관에서 첫 일정을 시작했다. 라벤더 종의 차이, 어떻게 증류시키고 얼마의 양이 나오는지 등 기본적인 설명이 이어졌고 라벤더 제품을 판매하는 기념품 샵에 들렀다. 


올리브는 생명을 뜻하죠. 무려 400년이나 살아간답니다


우리의 가이드 옴은 달리는 차창 너머로 오른쪽은 체리나무, 저건 올리브, 또 저건… 세세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흠, 단체 투어 생각보다 괜찮잖아?’



Gordes 마을로 가기 전 



일정표에 명시된 곳 이외에도 중간중간 다양한 곳에 멈춰 사진을 찍고 설명을 듣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다가 다시 모여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는 식의 투어가 이어졌다. 나에게 프랑스는 파리와 동일어였다. 프랑스 하면 파리가 생각났고 파리하면 에펠탑이 전부였다. 달리는 차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나를 압도했다. 프로방스 지역의 험준한 산악 지형과 광활한 대자연은 매일 크라상을 먹고 골목길이나 탐방할 생각을 했던 내가 기대한 여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 자체로 아름답고 경이로워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갑자기 옴이 일행에게 와일드한 자연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본인이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발견하는 걸 좋아하는데 꽤 야생적인 곳을 발견했다며 그곳으로 우리를 안내하겠다고 했다. 구불구불한 도로를 달리다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어느 수풀가에 차를 세우더니 suivez-moi (따라와요) 라며 앞장서기 시작했다. 그가 ‘wild’ 야생적이라고 표현한 바로 그곳은 아주 먼 옛날 바다였다는 곳이었다. 거칠게 드러난 땅의 옆면은 붉고, 노란 흙면이었다. 옴이 설명하기를 흙처럼 보이는 이것이 굉장히 귀한 도료이며 물에도 지워지지 않는 것이란다. 돌멩이인 줄 알았던 샛노란 덩어리를 땅에서 집어 들더니 살짝 힘을 줘 가루로 만들어 공중에 흩뿌렸다. 황금색 가루가 공중에 흩날렸다.


당신이 입고 있는 샛노란 원피스 같은 색깔이 나온답니다


그는 조금 더 이동해 이미 죽어있는 듯한 덤불을 가리키며 문질러보라고 했다. 라벤더였다. 라벤더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옴이 가리킨 라벤더를 문질러 코끝에 가져댄 순간. 그루누이가 생각났다. 처음 맡아보는 종류의 라벤더 향이었다. 강렬한 라벤더 향기가 후각을 자극하면서 저절로 피곤함이 사라지고 온화해지는 기분이었다. (설마 이걸 노리고 옴이 우리에게 수시로 라벤더를 문질러 보라고 한 걸까?)





아비뇽 시내에서 멀어질수록 소규모의 라벤더 밭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더니 끝없는 보랏빛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곳에 차를 세웠다. 라벤더 수확 후 거의 끝물이라 시기를 잘못 택한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라벤더는 여전히 남아 향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강렬한 남프랑스 태양 아래 보라색 빛이 덜 했지만 바람에 실려오는 향기는 여전했다. 진한 보랏빛 라벤더 꽃 사이에 서있는 여인의 사진을 보고 반했던 나는 라벤더 밭 한가운데서 인생 사진을 찍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사진이 잘 나오도록 샛노란 원피스를 입고 투어에 참여했는데 결과는 참담했다. 그네들이 찍어준 사진 속에는 나만 담겨 있었다. 아니며 초점이 어긋나거나. 사진 찍어달라고 부탁하면 무릎 꿇는 것도 개의치 않고 이리저리 자세를 바꿔가며 열성적으로 사진을 찍어주는 한국인이 최고다. 






가이드 옴을 제외한 우리의 일행은 나를 포함하여 총 8명이었다. 시종일관 유쾌한 프랑스인 커플, 반대로 일행과 떨어져 말도 섞지 않던 또 다른 프랑스인 커플, 사진을 찍을 때마다 '치이---즈' 하며 이상한 소리를 내 웃음을 주던 중국에서 온 커플 그리고 네덜란드에서 온 여학생과 마지막으로 한국에서 온 나까지 나름 다국적 그룹이었다. 특히 몇 달째 여행 중이라는 네덜란드에서 온 학생은 아시아 3개 국가를 찍고 유럽 일주중이었고 곧 아프리카로 건너간다고 했다. 다음 일정으로 이집트를 잡았다는데 우리는 피라미드 앞에 있는 피자헛 얘기를 하며 한동안 수다꽃을 피웠다.


거기 피자헛 있는데 거기가 완전 사진 명소래
나도 들었어. 근데 굳이 거기까지 가서 피자를 먹고 싶지는 않은데 말이야.
사막에서 낙타 사기 안 당하게 조심해..






라벤더 밭을 3군데 정도 들러 눈으로, 코로 그리고 피부로 느꼈다. 첫 번째 라벤더 밭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두 번째 라벤더 밭은 산으로 둘러싸인 뒷 배경이 참 인상적이었고 마지막으로 들른 라벤더 밭은 규모는 제일 작았지만 그림 같았다. 산속에 파묻힌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라벤더 밭이 펼쳐졌고 일행 모두가 사진 찍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그 풍경을 그저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라벤더 밭 사이를 걸어가면 내가 향을 따라가는 건지 아니면 향이 날 따라오는 건지 헷갈릴 정도다. 꽃을 자세히 보고 싶어 가까이 다가가면 꽃 사이사이 벌들이 일을 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매혹적인 라벤더 향.

보랏빛 라벤더 위로 파란 하늘이 있고 그 사이에 마을이 폭 파묻혀 있다. 폴 세잔느의 생 빅투아르(Saint-Victoire) 그림 속에 실제로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일정표에 소개된 곳들 이외에도 프로방스의 다양한 매력을 보여주기 위해 이리저리 우리를 안내했던 가이드 옴은 나에게 단체 투어의 편견을 바꿔주었다. 오후 5시에 끝나야 하는 일정이 7시가 넘어 마무리가 되었고 우리는 진심으로 그에게 고마워했다. 아침부터 해 질 무렵까지 라벤더 향을 따라 프로방스 지역을 누비면서 자연과 함께한 인생 첫 단체 투어는 꽤나 성공적이었다.






프로방스 투어 사이트

https://provencereservation.com/ 

다양한 투어 프로그램이 있으니 확인해 보자! 차량으로 이동하는 시간이 꽤 길어 반나절 투어(아침/오후)보다는 종일 투어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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