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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타일 큐레이터 May 27. 2017

브랜드 히스토리 (3) 크리스찬 디올 part.1

탁월한 예술가이자 사업가였던 크리스찬 디올이 창조한 환상의 세계

프랑스를 대표하는 패션 브랜드 디올.

디올은 1947년 동명의 프랑스 디자이너가 파리에서 만든 럭셔리 패션 브랜드이다.

그가 실제로 디자이너로 활동한 기간은 겨우 10년 남짓하지만 그 기간 동안

프랑스 패션계의 유행을 주도했으며 매혹적인 작품들로 현대 복식사의 기록을 새로 쓴 인물로 남아있다.  

천부적인 미적 감각의 소유자이자 동시에 뛰어난 사업수완을 가진 협상가였던 그는

독보적으로 우아하고 화려한 스타일을 창조해 전 세계에 그의 이름을 알린다.

오늘날 LVMH 그룹에 속해 있는 크리스찬 디올은 의류, 화장품, 향수, 시계, 액세서리 등 다양한 라인과 환상적인 오트 쿠튀르 작품들로 사랑을 받고 있다.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디자인과 차별화된 비즈니스 전략, 그리고 그의 생애에 대해 알아보자.


디올의 그랑빌 생가는 현재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유년시절>

크리스찬 디올은 1905년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에 위치한 그랑빌(Granville)에서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다. 동시대 많은 디자이너들이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과 달리 그는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행복하게 자랐다. 가족들은 항상 고급스러운 옷과 아름다운 보석으로 치장했고 꽃으로 장식된 집 안에는 은은한 음악과 향수 냄새가 항상 감돌았다. 세련된 가정환경 속에서 어린 크리스찬은 사랑하는 어머니와 함께 정원에서 꽃을 가꾸고 그림을 그리며 예술적 감수성을 키워나갔다.

 10세가 되었을 때 가족들과 함께 파리로 이사를 갔고 디올은 파리의 건축물과 우아한 파리지앵들에게 완전히 매료되었다. 당시 그의 꿈은 건축가.

 어릴 적부터 건축과 예술에 대한 열정이 흘러넘쳤던 그는 갤러리와 미술관을 즐겨 찾고 예술가 친구들을 사귀었다. 아버지의 강압에 못 이겨 외교관이 되기 위해 정치학과에 진학했지만 예술에 빠져 있었던 그는 틈만 나면 강의를 빼먹고 펍과 갤러리에 드나들었다.

 

 간신히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방황하는 그를 보다 못한 아버지의 재정적인 지원으로 드디어 1928년, 디올은 친구와 함께 아트 갤러리 '자크 봉장 (Jacques Bonjean)'을 열면서 꿈에 그리던 예술의 세계에 들어서게 된다. 갤러리를 연 후 평소 존경해왔던 화가와 조각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데 23세의 나이에 피카소, 달리 등 수많은 대가의 작품을 성공적으로 전시하며 남다른 안목을 자랑했다. 디올이 당대의 예술가들과 친했던 이유도 이런 경력 덕분. 디올은 그가 언제나 동경해오던 예술가에게 바치는 오마주로서 후에 자신이 디자인한 많은 드레스에 그들의 이름을 붙인다.


 그러나 3년 뒤 비극이 찾아왔다. 그의 어머니와 형이 사망하고 세계 대공황의 영향으로 아버지의 사업마저 파산했다. 그렇게나 좋아하던 갤러리도 문을 닫아야 했고 가문에서 소유하고 있던 집, 가구, 보석들이 모두 팔려나갔다. 고생을 모르고 자란 디올에게 연이어 닥친 불행은 엄청난 충격이었고 그의 건강도 악화되었다.


 집도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던 시절, 디올은 친구에게 패션 드로잉, 색칠하는 법을 배운 뒤 자신의 일러스트를 팔고 모자를 만들며 생계를 유지했다. 1938년, 그는 디자이너 로베르 피제 (Robert Piguet)의 회사에 입사, 의상 일러스트를 그리는 일을 했다. 부티크에서 많은 것을 배우며 실력을 쌓아 나가는 중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군대에 입대해야 했고 군 복무 뒤 파리로 다시 돌아온 것은 1941년이었다. 곧 디자이너 뤼시앵 를롱 (Lucien Lelong)의 부티크에 취직을 했는데 당시 함께 일했던 동료는 지방시와 피에르 발맹.  


 1946년, 디올은 지인의 소개를 통해 프랑스에서 가장 큰 직물 회사의 사장인 마르셀 부삭 (Marcel Boussac)를 만나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그는 당시 섬유 업계를 쥐락펴락하던 재력가였는데 디올의 재능을 곧장 알아보고 자신의 회사로 들어올 것을 권유한다. 그러나 자신의 브랜드를 런칭하고자 했던 디올은 이를 거절, 부삭에게 재정적인 지원을 받으며 파리 몽테뉴 거리 30번가에 자신의 이름을 딴 부티크를 열었다.

이렇게 브랜드 크리스찬 디올이 탄생한다.


<디자이너 디올>

1. 뉴룩의 탄생

나는 여성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

 1947년, 디올은 야심 차게 생애 첫 오트 쿠튀르 패션쇼를 세상에 선보인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군복처럼 딱딱하고 남성적인 옷을 입던 여성들을 겨냥해 풍성하고 화려한 스타일을 선보인 이 컬렉션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여성적인 실루엣을 강조한 뉴룩. <출처: dior.com>

당시 파리의 패션은 새로운 트렌드 없이 밋밋한 스타일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었다. 전쟁 기간 동안 여성들이 참전한 남성들 대신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공장 유니폼을 흔히 입었다. 또한 코르셋을 없애고 심플하고 편한 디자인을 선보였던 샤넬이 그동안 파리의 유행을 주도해 왔기 때문에 많은 여성들은 일자 실루엣에 장식이 없는 단색의 옷을 입고 다녔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평화를 되찾은 여성들은 새로운 것을 원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샤넬도 은퇴를 한 시기여서 파리 패션계는 이렇다 할 새로운 바람이 없었다. 그때 디올의 첫 컬렉션이 열렸다. 그리고 그가 내놓은 X형태의 의상 실루엣은 여태껏 본 적 없는 새로운 디자인이었다.

 

 어릴 때부터 꽃을 사랑했던 디올의 첫 컬렉션의 이름은 화관을 뜻하는 '코롤 (Corolle).' 꽃봉오리에서 영감을 받아 잘록한 허리에 둥근 어깨, 여러 겹의 속치마를 사용해 꽃잎처럼 풍성하게 퍼지는 스커트로 여성스러움과 로맨틱한 분위기를 강조했다. 수많은 신문과 잡지들이 그의 쇼를 극찬했고 당시 전쟁 기간 동안 옷을 배급받아서 입던 프랑스 여성들은 화려한 디올의 옷에 열광했다. 그의 컬렉션은 당시 잡지 '하퍼스 바자' 편집장이었던 카멜 스노우가 ‘참으로 새로운 룩이다! (It’s such a New Look!)’라고 감탄한 것에서 비롯되어 ‘뉴 룩’이라는 이름이 새로 붙여졌다.


 그는 여성스러운 실루엣을 살리기 위해 샤넬이 없애 버린 코르셋과 페티코트를 부활시켰다. 또한 최고급 원단만을 사용해 가격도 엄청났고 풍성한 실루엣을 살리기 위해 옷 한 벌을 만드는데 옷감도 어마어마하게 쓰였기에 여성의 몸매를 억압하고 사치를 조장한다는 비난도 얻었다.

 코코 샤넬 또한 "여성에 대해 잘 모르는 남성들이나 저런 불편한 옷을 디자인할 수 있다"라며 비꼬기도 했다 (실용적이고 심플한 디자인을 선호하는 모더니스트 샤넬과 화려함을 사랑하는 탐미주의자 디올은 그들의 대조적인 성향으로 종종 비교된다).

 하지만 뉴룩은 당시의 시대 상황과 맞아떨어지며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2차 대전 후 노동에서 해방되고 다시 주부의 삶으로 돌아간 여성들은 예전처럼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행복한 가정을 꾸리게 된 것이 기뻤다. 이때 등장한 아름답고 로맨틱한 뉴룩은 여성들의 욕망을 충족시켜주었고 전쟁 후 칙칙했던 유럽 패션계에 환상과 생기를 불어넣었다.


 ‘뉴룩'은 파리를 세계적인 패션 중심지로 만들었고 그 인기는 해외까지 뻗어나갔다. 당시 사치 조장을 막기 위해 전 국민에게 제한된 의복을 배급했던 영국에서는 뉴룩을 보고 싶어 안달이 난 엘리자베스 여왕과 그녀의 동생 마가렛 공주를 위해 왕실에서 비공개로 디올 패션쇼를 열었다는 일화가 있다.


2. 향수 라인 런칭

사랑의 향을 지닌 향수를 만들어 주세요.

디올은 조향사에게 이렇게 요청한다. '우아한 드레스에 어울리는 향을 만들고 싶다'며 첫 컬렉션과 동시에 발표한 그의 첫 향수 '미스 디올(Miss Dior).' 그는 패션쇼가 열리는 부티크 전체에 미스 디올을 뿌려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가 바란 것처럼 미스 디올은 황홀하고 우아한,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향수였다. 첫 향수의 성공으로 향수 산업을 대중화시키고 그 후에도 꾸준히 새로운 향수를 출시해 나간다. 어릴 때부터 정원의 은은한 향에 둘러싸여 오감으로 예술을 흡수해온 그에게 자신의 향을 디자인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여성의 향수는 그녀의 손글씨보다 그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1953년에는 첫 립스틱인 루즈 디올(Rouge Dior)을 출시, 화장품 시장에도 진출했다.

-1947년 출시된 '미스 디올'과 1955년 '미스 디올'의 모델로 활동한 오드리 헵번. <출처: elle.com>


3. 알파벳 라인

매년 두 번씩 디올의 파리 부티크에서는 패션쇼가 열렸다. 쇼가 열릴 때면 건물 곳곳은 각종 꽃들과 샹들리에로 화려하게 장식돼 관객들을 맞았다. 그의 패션쇼는 매우 높은 인기를 자랑했으며 매번 모여든 파리의 귀부인들과 유명 인사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렇게 디올은 독보적인 상상력으로 오트 쿠튀르의 황금기를 열며 1950년대를 맞이한다. 디올은 뉴룩으로 입지를 다진 뒤에도 다양한 스타일을 공개했다. 이중에 알파벳 라인으로 알려진 일자로 딱 떨어지는 실루엣의 H라인과 밑으로 내려갈수록 넓게 퍼지는 A라인, 상체가 넉넉한 Y라인을 발표했다. 뉴룩과 대조되는 실루엣의 펜슬 스커트도 내놓았다.

 이렇게 자신의 컬렉션에 알파벳을 붙임으로써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갔다. 그가 디자인한 실루엣은 1950년대 수많은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그중 A 라인은 이후 1960년 대에 유행한 '미니'의 시초가 된다.

디올이 발표한 Y라인, H라인, A라인 <출처:pinterest.com>
그는 레오파드 프린트를 대중화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의 호피무늬 코트와 펜슬 스커트.


4. 디올과 스타들

"나의 드레스는 모든 여성을 공주처럼 아름답게 만든다"라고 한 디올의 말처럼 실제로 아름다워지고픈 욕망을 가진 할리우드 유명 여배우와 유럽 왕실의 귀족들은 그의 열렬한 고객이 되었다. 당시 할리우드 또한 황금기를 맞았던 터라 그들과 디올은 명콤비를 이루어 스크린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매혹적인 여배우 마를린 디트리히와 에바 가드너,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이 그의 의상을 입고 영화에 출연했으며 특히 마를린 디트리히는 "디올이 없으면 디트리히도 없다(No Dior, No Dietrich)"며 일상생활에서도 디올만을 고집했다.

-디올의 의상을 착용한 할리우드 여배우들 <출처: pinterest>


<사업가 디올>

1. 뛰어난 협상가

디올은 사업적인 면에서도 큰 두각을 나타냈다. 그가 브랜드를 창립할 수 있도록 도와준 마르셀 부삭은 원래 깐깐하고 권위적인 성격으로 섬유 업계에서 유명했는데 그가 거느린 다른 브랜드에 비해 디올에게는 이례적으로 많은 권한과 자율권을 부여했고 평소 그의 의사를 매우 존중해주었다. 디올은 뛰어난 협상술로 높은 연봉 계약을 체결하고 회사 매출 순이익의 1/3을 가져간 것으로 알려졌다.  


2. 기성복 라인으로 미국에 진출

프랑스에 오트 쿠튀르(고급 맞춤복, Haute Couture) 컬렉션을 선보인 후 2년 뒤인 1949년, 디올은 기성복 라인(프레타 포르테,Prêt-À-Porter)을 만들고 미국 뉴욕에 진출했다. 당시 유럽에서는 오트 쿠튀르가 패션 산업의 중심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이러한 디올의 행보는 패션계를 술렁이게 했다. 그러나 경제 호황기를 누리고 있었던 미국에서는 고급스러운 디올의 옷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당시 디올의 판매 수익의 무려 절반 이상이 미국에서 나왔다. 디올은 미국과 프랑스 두 나라에서 차별화된 비즈니스 전략을 실시했다.

 미국 시장에서는 실용성을 중시하는 미국인들을 겨냥해 심플하고 편한 기성복을,

 파리에서는 VIP 고객들을 위해 1:1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며 고급 맞춤복을 제작한 것.

기존의 고급스러운 맞춤복을 디자인했던 브랜드 아이덴티티도 지키면서 기성복도 따로 제작하면서 미국이라는 거대한 시장도 함께 공략하는 데 성공한다.

 또한 매 컬렉션에는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기존 스타일을 살짝 변형한 스타일/누구에게나 어울리는 클래식한 스타일'의 비율을 각각 1/3로 매번 유지함으로써 보수적인 고객과 새로운 것을 찾는 고객 모두를 만족시킨다.


3. 최초로 라이센스 개념 도입

현대에는 많은 명품 브랜드들이 상표권을 빌려주고 돈을 받는 라이센스 사업을 병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아이템이 향수와 시계. 그들이 실제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만 빌려주고 로열티를 받는 것인데 이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이 바로 크리스찬 디올이다.

그는 처음 브랜드를 런칭할 때부터 라이센스 사업을 시작했다. 향수, 스타킹, 넥타이, 란제리 등의 제조업자들에게 디올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팔았던 것. 당시 사람들은 고급스러운 럭셔리 이미지를 깎아내린다고 반발이 심했지만 디올은 이 사업을 통해 탄탄한 재정을 마련하고 좀 더 넓은 고객층으로 그의 영향력을 넓혀갔다. 그리고 후에는 다른 럭셔리 브랜드들도 이 라이센스 사업을 모두 따라 하기에 이른다.


1951년, 디올은 프랑스 전체 수출의 5%, 프랑스의 미국 수출액의 무려 75%를 차지했다.

이렇게 영국, 미국 및 해외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끈 크리스찬 디올에 대한 프랑스 국민의 자부심은 엄청났고 가장 프랑스적인 브랜드로 지금까지도 전 세계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 디올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프랑스', '여성스러움'과 '화려함'인데 현대 패션이 티셔츠, 청바지처럼 캐주얼해진 지금도 디올은 여전히 18세기의 프랑스 왕족을 연상시키는 화려한 장식이 달린 사치스럽고 여성적인 드레스들을 선보인다.


 디올은 어느 날 파리에서 한 벌에 몇 천만 원을 호가하는 오트 쿠튀르 패션쇼를 마치고 이런 질문을 받는다.

“지금 밖에서 사람들이 하루에 만 원도 채 벌지 못하며 헐벗고 굶주리고 있는데, 당신의 옷은 수 천만 원입니까? 당신은 이런 현실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이렇게 대답한다.

사람이 단순히 숨 쉬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빵만 먹어도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술은 왜 있을까요?
예술은 인간이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는 꿈과 환상, 아름다움을 주죠.


 크리스찬 디올은 자신의 꿈꾸던 아름다움을 구축해 여성들에게 환상을 선사했고 시적인 감수성을 연주하던 마에스트로였다. 패션계에 마법을 불어넣은 그의 명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높아져만 갔다. 1956년, 프랑스 산업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레지옹 도뇌르(Legion D'honneur) 훈장을 받았고 1957년에는‘Time’ 잡지 표지에 등장한 최초의 디자이너가 되었다.


그러나 타임지에 등장한 지 불과 몇 개월 후 디올은 10주년 컬렉션을 앞두고 52세의 나이에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프랑스 전체가 충격에 빠지고 그의 장례식에 수많은 유명 인사가 참석해 애도했다.

 갑작스레 수장을 잃어 혼란에 빠진 크리스찬 디올 하우스는 공석을 메꾸기 위해 당시 불과 21세였던 한 젊은 디자이너를 급하게 수석 디자이너로 임명한다.

그의 이름은 이브 생 로랑이었다.


-이후의 이야기는 다음 편에 연재합니다.


<참고 문헌>

www.dior.com

https://en.wikipedia.org/wiki/Christian_Dior_SE

네이버 캐스트 '에스프리 디올- 디올 정신 전'

[네이버 지식백과] 크리스챤 디올[Christian Dior] (세계 브랜드 백과, 인터브랜드)

'패션의 탄생', 강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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