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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인 May 10. 2018

양비론자의 변론

자유의 지평 넓히기

기존의 질서로부터 모든 변화의 움직임이 생겨난다. 정(正)과 반(反)의 대립으로부터 새로운 질서(合)가 창출된다. 이것이 역사의 발전을 설명한 헤겔의 정반합 변증법이다. 우리는 매 순간 역사의 발전 위에 서 있다.     


신이 아닌 이상에야 진리를 분별하고 진리에 도달하는 방식을 확신하는 것은 누가 하더라도 인간의 오만이다. 인간의 오만은 독선을 낳고 독선은 반드시 폭력을 낳는다. 그렇기에 지난 시대에는 폭력이 만연했다. 인간이 신의 말씀을 가지고, 신의 대리인을 자처해서 모든 소통과 토론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신이 죽은 시대(종교의 자유)에 도래했음에도 폭력은 멈추지 않고 있다. 저마다 자신의 입장을 ‘당연한 것’이나 ‘상식’으로 쉽게 치부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실은 아주 어려운 문제를 단순히 누군가의 무지나 어리석음이나 사악함으로 환원시켜 그들의 도덕성에 비난을 가한다. 그러나 상대에 대한 비난은 단지 비난받는 쪽에서의 반발을 유발할 뿐이다. 누구나 자기보존의 욕구를 가지고 있고, 자기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싶고, 사랑받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갈등은 평행선을 달린다. 상황이 이래서는 어디가 이기든 폭력에 대한 상처만을 남길 뿐이다.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자신과 입장이 다른 상대를 만났을 때, 그 상대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설득의 대상이며, 무지의 대상이 아니라 구조에 적응한 한 개인일 뿐이라는 것이다. 옳음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에게는 꽤나 답답한 얘기겠지만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불변이 아니라 가변이다. 삶을 둘러 싼 환경이 어느 때보다 빠르게 변하고 있고 그에 발맞춰 인간 삶의 모습과 인간에 대한 이해의 방향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어제는 당연했던 일들이 내일은 전복된다. 세대갈등이 일어나지 않는 게 더 말이 안 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등장했던 것처럼 우리를 무참히 짓밟을 신인류는 반드시 등장할 것이다, 부정하고 싶겠지만 우리는 진리에 도달한 첫 세대가 아니다.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신도 사라진 지금, 우리에게 남아있는 신성이라고는 우주와 생명, 인간의 존엄과 권리, 자유와 평등 같은 것인데 지금이야말로 이것을 넓은 함의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부여되는 신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우리 존재에 대한 혐오를 떨쳐낼 수 없어 스스로 목숨을 거두지 않는 이상, 인간 자체에 주목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포기할 수 없는 최후의 방어선이다.     


물론 밝은 곳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질문에 맞서기 보다는 질문 자체를 못하게 입을 막아버리고 싶을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거짓말인데, 거짓말은 그 켕기는 뒤가 좀처럼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할 것 같기 때문에 일어난다. 이것은 위선이지만 개인의 위선은 아니다. 단지 사회가 내린 도덕이란 처방의 부작용일 뿐이다. 저마다 사회와는 화해 불가능한 비도덕적, 부도덕적 욕구를 내면에 숨기고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밝은 면뿐만 아니라 어두운 면도 있다.(그런 것이 없다면 애초에 도덕이라는 기준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 더 정확히 하자면 인간은 그저 그렇게 존재할 뿐이고 우리가 멋대로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규정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회를 끊임없는 투쟁의 영역으로 만든다.     


나는 비도덕적, 부도덕적 욕구를 사회에 모두 풀어 이 사회가 짐승의 세계가 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근래의 지향점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도록’ 이라면, 이 또한 이해할 수 있는 데까지는 최대한 이해해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 이해와 처벌은 별개라는 것이다. 죄를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만약 여기에도 적용될 수 있다면, 사람은 미워하지 않되 미운 죄에 대한 벌은 반드시 필요하다 말하겠다. 그리고 누군가가 죄 한 번 짓지 않고 밝은 곳에 있다면 축복받았다 말하겠다. 털어서 먼지가 나오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난 그렇게 믿는다.     


사안을 분명히 파악하기 위해 극단적 예시를 들어보고자 한다. (너무 극단적이라 적절하지 않다면 무시해도 좋다. 애초에 이 글 전체는 무시해도 좋을 글이다.) 누군가가 분노로 인해 살인을 저질렀을 때, ‘어떻게 인간이 살인을 저질러?’ 라는 우리의 도덕적 반응은 모두들 알겠지만 위선이다. 우리는 인간이 얼마나 악할 수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부정의에 분노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이런 반응은 바람직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것은 의도와는 다르게 사회에 더 나쁜 해악을 가져올 수도 있다. 이것은 비흡연자가 흡연자 앞에서 어떻게 금연을 못할 수가 있냐며 어리석게 우쭐되는 꼴과 다를 바 없다. 이와 반대로 ‘인간이라면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수도 있어.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거고, 그걸 참는 게 우리와 짐승을 구분시켜줘.’ 라는 이해가 궁극적으로는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 우리가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미래는 악인이 엄중히 처벌받는 미래를 넘어서서 악인을 줄여나가는 미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목적은 얼마나 엄격하게 처벌하고, 그 공포로 회피적 동기를 만들어 사람들을 묶어놓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사회에서 짐승 수준으로 타락하지 않고 제대로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드느냐 일 것이다. 노파심에 다시 한 번 언급하자면 이해와 별개로 살인자는 살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할 것이고 또한 받을 것이다.     


이러한 구조적 토대가 마련된다면 인간의 이해력은 크게 늘어날 것이며 개인의 거짓말은 줄어들 것이고 우리가 합의해서 함께 영유할 수 있는 자유의 지평은 전보다 더 확장될 것이다.     


말이 길어졌는데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였다. ‘당연한 것은 없다.’ 

내가 철학과에서 배웠던 가장 소중한 지혜이기도 하다.      


당신의 상식에 대해 끊임없이 점검하라. 앞서 말했듯이 근거 없는 확신, 또는 확신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근거는 폭력을 낳는다. 확신은 늘 나를 약점투성이로 만들고, 의심은 늘 나를 융통무애 상태로 만들어준다고 생각한다.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모두를 적으로 만들 필요도, 그런 의미에 순교자가 될 필요도 없다. 옳은 것은 ‘인간 그 자체’ 하나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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