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빙 사태와 제인도
나는 귀신, 오컬트, 무속, 현실공포와 같은 공포 콘텐츠를 좋아한다. 신점이나 사주를 믿는 편이기도 하고 귀신이 있다고 믿기도 해서 그런지 공포 콘텐츠라고 하면 호기심이 생긴다. 모 유튜브 공포라디오는 출근준비 시간의 파트너가 되었고 심야괴담회 레전드 사연들은 거의 외울정도로 들었다. 그런 나에게 주위 사람들은 '안 무서워? 혼자 사는데?'라고 물어보곤 하는데 별로 무섭진 않다.
그럼 내가 겁이 없는 편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방탈출 공포 컨셉을 하다가 울 뻔하기도 했고 가위 눌리는 것도 굉장히 무서워한다. 그런데 왜 공포라디오나 심야괴담회는 안 무서워할까? 정확히 말하면 안무서워하는게 아니라 안 무서울만한 분위기에서만 본다. 그러니까 나에게 '공포콘텐츠'에서 '공포'를 느끼는 방법은 '무서울만한 분위기'에서 보는 것이다.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상황으로 빠져드는 '가위눌림', 가둬놓고 빠져나오지 못하는 상태와 분위기에서 운영되는 '방탈출' 등은 내가 공포를 느끼는 '무서울만한 분위기'가 형성되기 때문에 무서워하는 것이다. 들어보면 당연한 말이지만, 무한도전 멤버 급으로 무서움을 무서워했기에 나는 한낮에도 공포물을 보지 않았었다. 밝고 활기찬 분위기에서도 무서움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나만의 법칙(?)을 깨닫게 된 계기가 있는데,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하며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에게 꿀팁을 전수하고자 한다. 때는 바야흐로 2017년, 나는 인턴 생활을 하는 중이었고 친구들 역시 휴학 후 개인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그 말인 즉슨 술을 엄청 마셨다. 그날도 동네에서 새벽까지 술을 마시며 배우 조진웅님의 신작 영화가 개봉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조진웅님의 팬인걸 아는 친구들은 영화를 같이 보자고 말했고 삘 받은 친구 한 명이 갑자기 영화를 예매해버렸다. 가물가물한데 그 때 시간이 대략 새벽 1시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택시를 타고 근처 영화관으로 날라가 티켓을 받고 대기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당시 함께 술을 마시던 3명 모두 그 영화가 무슨 내용인지 몰랐다. 내가 알려줘서 제목만 알았다.
'해빙'
한 때 미제연쇄살인사건으로 유명했던 지역에 들어선 경기도의 한 신도시. 병원 도산 후 이혼, 선배 병원에 취직한 내과의사 승훈(조진웅)은 치매아버지 정노인(신구)을 모시고 정육식당을 운영하는 성근(김대명)의 건물 원룸에 세를 든다. 어느 날, 정노인이 수면내시경 중 가수면 상태에서 흘린 살인 고백 같은 말을 들은 승훈은 부자에 대한 의심을 품게 된다. 한동안 조용했던 이 도시에 다시 살인사건이 시작되고 승훈은 공포에 휩싸인다. 그러던 중, 승훈을 만나러 왔던 전처가 실종되었다며 경찰이 찾아오는데…
설명 보고 대략 짐작하시겠지만 장르가 스릴러다. 꽤나 장면들이 고어했고 점프 스퀘어 연출도 많았다. 술 취했지, 영화관에는 우리 뿐이지, 밤 늦었지, 한 명은 무서운거 보지도 못하지, 영화 보는 2시간 내내 미칠듯한 공포와 두려움에 떨었다. 3명이 꼭 붙어서 눈 감고 귀 막고 영화를 봤다. 영화가 끝나니까 새벽 3시가 넘은 시간이었는데 집에 가는 길에 한 명은 검은 비닐봉지를 보고 소리를 질렀더랬다. (웃긴 건 그 와중에 영화가 딱히 재밌진 않았고 무서운 걸 못보는 친구에게 물어보니 解氷이 아니라 Having인줄 알았다고 했다. 너 수능 제2외국어 한자로 봤잖아.)
그렇게 영화를 보고 셋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다음 술자리에서 또 공포영화를 보러가자고 했고 영화관 예매에 실패한 우리는 DVD방을 갔다. 내 인생 첫 DVD방 방문이었는데 여자 셋이 술먹고 공포영화라니. DVD방 주인아저씨에게 무서운 영화를 추천 해달라고 말씀드렸고 본인이 본 영화 중 제일 무섭다는 추천사와 함께 영화 '제인도'를 보기 시작했다. 80분의 짧은 영화였는데 인생 통 틀어 소리 제일 많이 질렀다. 누가보면 귀신이 우리 쫓아오거나 죽이려는 줄 알았을 거다. 그렇게 이 두 영화는 우리에게 '해빙 사태와 제인도'라는 이름으로 추억이 되었다.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나 우연치 않게 유튜브에서 해빙 영화 리뷰를 보게 되었는데 내가 본 영화랑 뭔가 많이 달랐다. 이해가 안되서 다시 영화를 찾아보니 정말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그냥 그 당시 분위기와 술과 그러니까 뭔가에 홀렸던 것 같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제인도도 다시 찾아봤는데 무섭긴 했지만 소리지를 정도는 아니었다. 한 번 본 영화라서 그런가라고도 추측했지만 그냥 정말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그 영화가 아니었다. 새벽에 술마시고 무서운 분위기에서 본 영화라 무서웠을 뿐이었다.
그렇게 무서워서 공포 콘텐츠를 좋아하지만 피해왔던 나는 나름의 노하우와 꿀팁을 깨달았고, 요즘은 온갖 공포썰과 콘텐츠를 섭렵하며 지내고 있다. 혹시 무서운 것을 좋아하지만 보지 못하고 계시는 분이 있는가, 아니면 공포의 느낌을 극대화해서 보고싶으신 분이 있는가? 무서움을 줄이려면 밝고 활기찬 분위기에서, 그리고 극대화하고 싶다면 술먹고 새벽에 공포물을 보시라. 이것도 약하다면 공포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친구와 함께 보시면 된다. 반대로 말하면 세상에서 무서운 걸 제일 못보는 친구랑 보면 공포감이 2배 이벤트가 된다.
올 여름 잊지말자! 공포의 핵심은 분위기라는 것을! (근데 심야괴담회 새시즌 언제하나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