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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그린 그림 앞에서도 발이 묶일까

기술적 숭고와 아우라(Aura)의 부재에 대하여

by 류임상

지난 글에서 저는 관람객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힘, 즉 “작품의 인력(引力)”에 대해 논했습니다. 캔버스의 마티에르(Matière) 뒤에 숨겨진 화가의 실존적 고뇌가 관람객의 경험과 공명할 때, 비로소 감상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을 현대의 기술적 조건으로 옮겨보겠습니다. 모니터 속 미드저니(Midjourney)가 생성한 이미지 앞에서도 우리는 발이 묶일까요?


엔터 키를 누른 지 수 초 만에 화면을 채우는 4장의 이미지. 황금비율의 구도, 정교한 광원 효과, 인간의 손으로는 단시간에 구현 불가능한 밀도 높은 묘사. 분명 시선을 끄는 압도적인 시각 정보입니다. 그러나 이 디지털 환영(Illusion)이 주는 경험은 명작 앞에서의 경험과 질적으로 다릅니다.


#1 감탄(Admiration)과 공명(Resonance)의 층위


AI가 생성한 이미지 앞에서 우리는 멈춥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것은 "감각적 충격"에 가깝습니다. 칸트가 말한 압도적인 자연 앞에서의 ‘숭고’와 유사하지만, 여기에는 결정적인 것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호퍼나 로스코의 작품 앞에서 멈추는 것은 ‘공명(Resonance)’ 때문입니다. 작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타자(화가)의 세계가 나의 세계로 침투하는 현상입니다. 캔버스의 붓 자국은 단순한 안료의 흔적이 아니라, 한 인간이 세계와 불화하거나 타협했던 시간의 흔적입니다.


반면, AI의 이미지는 “매끄러운 표면”입니다. 수억 장의 데이터를 학습한 알고리즘이 확률적으로 최적화된 픽셀을 배치했을 뿐, 그 뒤에는 의도를 가진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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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타자의 부재인가, 타자의 변형인가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봅시다. 정말로 AI 이미지 뒤에는 타자가 없는 걸까요?


알고리즘은 무에서 이미지를 창조하지 않습니다. 수억 장의 학습 데이터 속에는 렘브란트의 명암법이, 모네의 색채 분할이, 칸딘스키의 추상이, 그리고 이름 없는 수많은 화가들의 붓질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AI 이미지는 어쩌면 “단일한 타자”가 아닌 “집단적 타자”의 메시지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전통적 의미의 타자성과는 다릅니다. 단일한 발신자는 없지만, 인류의 시각문화사 전체가 중첩된 팔림프세스트(palimpsest)로서 존재합니다. 마치 도서관의 모든 책이 한 권으로 압축되되, 각 페이지마다 수천 권의 텍스트가 반투명하게 겹쳐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문제는 이 ‘집단적 타자성’이 개별 작가의 고유한 목소리를 대체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베토벤의 교향곡을 듣는 것과 클래식 음악 전체를 AI로 혼합한 곡을 듣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에는 한 인간의 청각적 세계관이 응축되어 있지만, 후자는 통계적 평균치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I 이미지는 완전히 텅 빈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타자들이 동시에 말을 거는” 혼잡한 공간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AI 이미지 앞에서 실존적 깊이를 느끼기 어려운 것은 타자의 부재가 아니라, 타자들의 목소리가 서로를 상쇄하며 만들어낸 “백색소음” 같은 상태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3 원본성과 서사의 부재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에서 “아우라(Aura)의 붕괴”를 예견했습니다. 지금 AI 이미지는 아우라의 상실을 넘어, ’프로비넌스(Provenance, 기원)’의 소멸을 보여줍니다.


AI 이미지에는 역사가 없습니다. 화가가 어떤 시대를 살았고, 어떤 맥락에서 붓을 들었는지에 대한 전사(前史)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결과값으로서의 이미지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습니다.


맥락 없이 부유하는 이미지는 우리를 잠시 붙잡을 수는 있어도, 사유의 깊은 곳으로 끌고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예술 작품 앞에서 발이 묶이는 것은 이미지 그 자체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미지에 얽혀 있는 텍스트와 컨텍스트가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기 때문입니다. AI의 이미지는 이 대화가 단절된 독백과 같습니다.


그러나 벤야민의 아우라 개념을 다시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지점이 발견됩니다. 그가 말한 아우라는 “지금, 여기’의 일회성”과 관련됩니다. 원본이 특정한 시공간에 유일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우라를 만듭니다.


그렇다면 AI 시대의 아우라는 어디에서 발생할까요? 생성의 순간이 아니라 “선택과 맥락화의 순간”에서 발생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같은 프롬프트로 생성된 이미지라도, 누가, 언제, 어떤 맥락에서 그것을 선택하고 제시하느냐에 따라 고유한 아우라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큐레이터가 전시장에서 작품의 위치와 조명, 동선을 결정하며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듯이, AI 시대의 아우라는 “발견자의 에디터십”에서 탄생합니다.


이것은 전통적 아우라와는 다른 종류의 아우라입니다. 창작자의 손때가 아니라 선택자의 시선이 만드는 아우라. 생산의 일회성이 아니라 맥락화의 일회성에서 비롯되는 아우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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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수신에서 투영으로: 감상 방식의 전환


그렇다면 AI 시대에 ‘발이 묶이는 경험’은 불가능한가? 저는 감상의 메커니즘이 “수신(Reception)“에서 ”투영(Projection)“으로 전환되고 있다고 봅니다.


과거의 감상이 작가가 숨겨둔 의도를 발견하고 해독하는 과정이었다면, AI 이미지 앞에서의 감상은 텅 빈 기표(Signifier)에 관람자의 내면을 투사하여 기의(Signified)를 채워 넣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수많은 생성 이미지 중 하나를 선택하고 멈춰 섰다면, 그것은 AI가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무작위의 패턴 속에서 나의 미적 취향, 혹은 나의 무의식적 욕망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무의미한 잉크 얼룩을 보며 저마다 다른 형상을 읽어내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조심해야 할 지점이 있습니다. 무의미한 잉크 얼룩의 비유는 투영의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데는 유용하지만, 동시에 위험합니다. “모든 투영이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면, 예술적 판단의 기준은 무엇이 될까요?”


당신이 AI 이미지에서 발견한 “나의 맥락”과 다른 누군가가 발견한 맥락 사이에 질적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 걸까요? 투영의 민주화가 곧 예술 경험의 민주화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을까요?


전통적 예술 비평은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미술사적 맥락에 대한 지식, 형식 분석의 능력을 요구했습니다. 이러한 전문성이 때로는 배타적인 장벽이 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감상의 질을 담보하는 장치이기도 했습니다.


AI 이미지 앞에서의 투영이 순전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좋은 선택과 나쁜 선택을, 의미 있는 맥락화와 무의미한 끼워 맞추기를 구분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필요한 것은 “투영의 리터러시(Literacy)”입니다. 단순히 자신의 감정을 이미지에 투사하는 것을 넘어, 왜 그 이미지가 특정한 반응을 이끌어내는지, 그것이 어떤 시각문화의 코드를 활용하고 있는지, 어떤 역사적 레퍼런스와 공명하는지를 읽어낼 수 있는 능력입니다.


투영은 능동적 행위이지만, 그렇다고 무제한적으로 허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투영의 시대에는 “더 높은 수준의 시각적 교양”이 요구됩니다.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고, 맥락을 구축하고, 다른 선택들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 말입니다.


#5 발견하는 자의 에디터십


결국 AI 시대의 예술적 경험은 “만들어진 의미를 읽는 것”에서 “의미를 부여하여 만드는 것”으로 이동합니다.


이제 작품 앞에서 발이 묶이는 이유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해서가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의 바다에서 나의 맥락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창작의 주도권이 생산자(AI)에게서 선별자(인간)에게로 완전히 넘어오는 순간입니다.


지난 글에서 언급한 “선택하는 것으로 충분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제는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선택은 단순한 고르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비어 있는 맥락을 채우는 가장 적극적인 창작 행위이며, 이것이 바로 AI 시대에 우리가 가져야 할 새로운 안목입니다.


다만 이것이 전통적 의미의 ‘발이 묶이는 경험’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열린 질문으로 남습니다. AI 이미지 앞에서의 멈춤이 호퍼의 <Nighthawks> 앞에서의 멈춤과 같은 무게를 가질 수 있을지, 아니면 본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경험인지 우리는 아직 단언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두 종류의 ‘발이 묶임’을 구별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는 “타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멈추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멈추는 것”입니다.


전자가 대화라면, 후자는 독백입니다. 전자가 공감이라면, 후자는 투사입니다. 둘 다 의미 있는 경험이지만, 그 질과 깊이는 다릅니다.


AI 시대의 과제는 이 두 가지 멈춤이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알고리즘이 생성한 이미지 속에서도 집단적 타자의 메아리를 듣고, 동시에 그것을 나의 맥락으로 의미화하는 능력. 수신자이면서 동시에 창작자가 되는 이중의 위치. 그것이 AI 앞에서 발이 묶이는 새로운 방식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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