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3장. 눈물 앞의 응답

인질로서의 나

by 하진

※ 본 글은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사유를 바탕으로 한 개인적 독해 시도입니다. 여기에서 제시하는 해석은 정통 학술적 견해와 차이가 있을 수 있으며, 필자의 사유 흐름과 해석적 재구성을 포함합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

존재와 달리 또는 존재성을 넘어

그린비, 문성원, 초판 2쇄 20240411

ⓒ Pixabay


대신함ㅡ 그것에서 타인은 실재의 실제성과 전적으로 달리 부과된다. 그가 부과되는 것은 그가 타자이기 때문이며, 이 타자성이 가난과 약함의 전적인 짐을 내게 돌리기 때문이다. 대신함은ㅡ그리고 선함은—여전히 “운동”으로서나 존재의 존재성의 한 양상으로서 해석되어야 할 것인가?


대신함—타자에게 사로잡힌 인질. 타자의 현전 여부와 무관하게, 나는 이미 타자의 가난과 약함 앞에서 책임을 진 자다. 타자가 나를 넘어 파고드는 이 현상, 내가 그를 책임지는 행동까지도 존재의 질서 속에 가둬지는가? ‘대신함’과 ‘선함’은, 존재성ㅡ동일화·계산·규칙ㅡ의 양상으로 환원되어야 하는가?


참고

길에서 우는 아이를 만나면, 우리는 묻는다.“왜 울고 있니?” 그다음 돕는다. 이러한 행위는 아이에게 관심이 있어서도, 무언가를 얻기 위함도, 그가 도움을 원해서도 아니다. 울음이 보였고, 그래서 책임이 먼저 왔다. 그렇다면, 이 선함은 무엇인가? 내가 의식하기 전에 이미 나를 불러 세운 것, 곧 지향성을 넘어서는 사건이다.


한편, 존재의 ‘존재성’은 인과·역사·분류로 정리되는 존재의 질서다. 레비나스의 목적은 이 질서가 타자까지 흡수해 버리는 걸 막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함과 대신함을 존재성 밖에 세워, 존재론의 환원을 차단한다.


대신함은 여전히 존재의 빛 속에서 움직일 것인가? 하지만 얼굴의 봄(vision)은 존재의 빛 안에 있는가? 여기서 이 봄은 곧바로 부담 짐이 아닌가? 타인에게로의 지향, 자신의 정점에 이른 지향은 그것이 지향성에 야기하는 반대 사태를 드러낸다.


대신함은 기존 철학의 역사, 인식·현전의 틀 안에서 설명되어야 하는가? 얼굴의 봄(vision)은 존재의 질서에 귀속되는 운명인가? 여기서, ‘봄’은 곧바로 책임을 요구하는 사태가 아닌가? 타자는 의식의 지향성마저 건너뛰고, 나를 책임의 자리에 내세운다.


참고

여기서 ‘봄’은 서양 철학이 오래 붙들어온 빛–현전 모델을 뒤집는다. 전통적으로 철학은 “보이게 함(빛)→현전”의 흐름을 신뢰해 왔다. 가령, 플라톤은 태양(=선의 이데아)을 존재와 인식을 동시에 가능케 하는 근거로 보았고, 하이데거 역시 드러남의 형식 속에서 존재를 사유했다.


그러나 레비나스의 타자는 현전의 경제ㅡ계산·동일화ㅡ너머에서 도래하는 초월이고, 의식 이전의 층위에서 나를 붙잡는다. 그때, 지향은 전복되고 나는 응답을 강요받는다. 따라서, 이 ‘봄’은 존재의 도식 안에 말끔히 정리될 수 없다. 그것은 현전하지 않아도, 나보다 앞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타인에로 향함은 타인을 위함에서, 그의 고통에 대한 고통에서 절정에 이른다. 빛 없이, 즉 아무런 척도 없이 말이다. 이것은 스스로를 자의에 내맡기기 위해 단순히 눈을 감는 것으로 보이는 운명의 여신의 순전히 부정적인 맹목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타인에로 향함—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지켜보며 내 안에서 일어나는 고통으로부터 절정에 이르는 움직임이다. 이 충동은 빛에 의해 주어지거나 드러나는 종류의 인식이 아니며, 주어진 운명이나 질서에 복종하라는 명령에서 비롯되지도 않는다.


참고

‘타인에로 향함’은 명확한 인식,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계산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어떤 규칙이나 명령에 순응하는 행위도 아니다. 오히려, 운명 앞에서의 반항이다. 정해진 것 앞에서도 눈을 감지 않고, 한복판으로 몸을 던지는 선택. 체념 대신, 깨어 있으려는 고집. 내가 원하는 것과 타자가 원하는 것이 동일시되는 상태.


존재성의 정점에서 솟아 나오기에 선함은 존재와 다르다. 선함은 더 이상 계산하지 않는다. 선함은 자신이 부정한 것을 자신의역사 속에 보존하는 부정성과 같은 것이 아니다. 선함은 피로 물든 희생물들을 위해 과거의 우상들에 세워진 재단들을 기억으로 남기지 않고, 박물관으로 옮기지도 않은채, 파괴해 버린다.


존재성의 틀을 뚫고 나오는 선함은 존재를 넘어선다. 하지만, 존재의 언어로 깔끔히 번역되는 순간 그것은 의미를 잃는다. 선함은 피로 물든 희생물들을 위해 과거의 우상들 위에 세워진 재단을 기억으로 보존하지도, 박물관으로 옮겨 봉인하지도 않은 채, 파괴해 버린다.


선함은 과거의 메아리가 울려 퍼지는 성스러운 숲들을 불태운다. 선함의 이 예외적인, 비상하는 초월적인ㅡ특성은 정확히 말해서 존재 및 존재의 역사와의 단절을 노리는 것이다. 선을 존재로ㅡ존재의 계산으로 또 존재의 역사로ㅡ환원하는 것, 그것은 선함을 무효화하는 것이다.


선함은 과거의 메아리가 울리는 성스러운 숲을 불태운다. 이 예외적이고, 비상하면서,초월적 성격은 정확히 존재 및 존재의 역사와의 단절을 겨냥한다. 만약 선함을 존재나 계산, 혹은 역사의 틀 안에 가둔다면, 그 자체로 선함은 소멸하고, 무효화된다.


참고

개념은 굳어진다. 그리고 그 순간, 단어만 남고 눈물과 희생은 사라진다. 선함은 정의를 외운다고 오지 않고, “도와야지”라는 슬로건에서 나오지도 않는다. 누군가의 눈물 앞에 함께 서는 것, 지난 실패를 핑계로 덮지 않는 것,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실패하겠지만, 끝내 포기하지 않는 것—이것이 내가 이해하는 선함이다.


주체성과 존재 사이의 언제나 가능한 균형—주체성은 단지 이러한 균형의 한 양태일 텐데—은, 두 언어 사이의 등치는 여기서 멈춰진다. 선함은 주체성에게 환원 불가능한 그것의 의미작용을 준다. 눈물과 웃음의 경계에서 책임을 요구받는 인간 주체는 자연의 화신도 아니고, 개념의 한 계기도 아니다.


주체성과 존재를 맞춰 세우는 균형은 여기서 멈춘다. 서로 같은 언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선함은 주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남는 의미를 남긴다. 웃음과 눈물 사이, 그 경계에서 책임을 호출받는 인간은 자연이 빙의한 존재도, 어떤 개념의 단계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존재성이 존엄성에 충분한 것인 양 인간의 존재론적 존엄성을 단언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존재의 철학적 특권을 문제 삼고, 너머 또는 이편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인간을 자기의식으로, 자기의식을 개념으로, 다시 말해 역사로 환원하는 것.


중요한 것은 인간의 존엄을 존재론적 범주로 목록화하는 관행을 멈추는 일이다. 존재 중심으로 짜인 철학의 자동 우선권을 내려놓고,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관계의 사건과 그 너머-이편에 주의를 돌리는 행위다. 다시 말해, 폐쇄적인 개념이 아니라 살아 있는 역사에 주목하라는 것.



Point

- 윤리는 정의나 구호가 아니라 눈물 앞의 응답이다.

- 선함은 동일화·계산·역사로 묶는 존재성의 서랍에 들어가지 않는다.

- 역사에 남길 문장보다, 눈앞의 타자에게 내미는 손이 먼저다.


인권이 깨지면 미래는 없다. 인간의 각성은 장엄한 죽음의 사유에서 오지 않는다. 눈앞의 타자, 사소한 주어짐에 대한 감사, 그에 대한 책임에서 온다. 이를 부정하는 사회는 기술과 진리의 과잉 속에서 모든 것을 계산으로 환원하며, 감성과 감정을 잃어버린 채 기계적 합리성에 자리를 내줄 것이다.


#철학 #인공지능 #레비나스 #윤리 #에세이 #사회 #타자 #인문학 #폭력 #정치

keyword
금요일 연재
이전 12화12장. 윤리의 역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