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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생각 08화

달빛 아래의 무의식

사라져도 괜찮은 순간

by 하진
ⓒ Pixabay

어둠은 희미한 빛을 삼켜버렸고, 거리에는 소음 대신 메아리만 흩날렸다. 사람들은 끊어진 필름처럼 흔들렸고, 웃음은 허공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유령들은 서로의 기척을 더듬으며 춤추듯 나아갔다. 그들이 남기고 간 빈자리의 여운만이 나의 발걸음을 이끌었다.


세계는 누구를 위해 재생되는 영화일까. 적어도 나를 위한 장면들은 아니었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의 시선보다 달빛이 건네는 부드러운 숨결이 좋았다. 그러나 내가 마주한 스크린에는 해도 달도 떠오르지 않고, 공허한 장면들만 되풀이되었다.


세계는 손에 닿는 순간마다 흩어졌다. 허공을 움켜쥐는 듯한 감각뿐. 그러나 믿음이 비어간 자리에 알았다. 흘러간 것들이 오히려 나를 채운다는 사실을. 사라지는 것들 속에서 오히려 더 크게 울리는 잔향이 있다. 부서짐조차 파동처럼 나를 감쌌고, 공허는 끝내 공허로만 남지 않았다.


스스로를 잃을 때마다 세계는 더 깊이 스며들었다. 어쩌면 나는 이미 흡수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비워지고 지워지며 다시 피어나는 역설 속에서 나는 기꺼이 스며들길 택했다. 태초의 힘,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원형같은 순수 속에서, 경계는 풀려갔다.


닿을 수 없던 달빛을 더듬었다. 멀리 있으면서도 가까이 스며들고, 잡히지 않으면서도 부드럽게 감싸오는 빛. 그것은 잊힌 이름들을 불러내듯 내 안을 적셨다. 나는 세계에서벗어나, 빛의 잔향으로 흩어졌다. 그곳에서라면, 사라짐마저 평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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