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된 주체가 타인에게 응답하는 방식
※ 본 글은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사유를 바탕으로 한 개인적 독해 시도입니다. 여기에서 제시하는 해석은 정통 학술적 견해와 차이가 있을 수 있으며, 필자의 사유 흐름과 해석적 재구성을 포함합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
존재와 달리 또는 존재성을 넘어
그린비, 문성원, 초판 2쇄 20240411
시간의 시간화는, 말해진 것에서 드러나는 대로, 확실히 능동적 자아에 의해 회복된다. 능동적 자아는 기억으로 회상하거나 지나간 과거를 사료 편찬을 통해 재구성한다. 또는 상상에 의해, 그리고 예상에 의해 미래를 예측하며, 글을 통해 기호들을 공시화하면서 타인을 위한 책임의 시간까지도 현존으로 모은다—즉, 재현한다.
시간의 시간화는, 능동적 자아에 의해 회복된다. 자아는 기억을 회상하고 사료를 편찬하며 과거를 현재 의식 속에 통합한다. 또한 상상과 예상을 통해 미래를 선취하고, 글을 통해 기호를 공시화함으로써 타인을 향한 책임의 시간마저 현존으로 모은다. 즉, 재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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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에게 시간의 진정한 의미는 재현의 능력 안에 있지 않다. 그가 말하는 ‘시간의 시간화’는 재현 불가능한 통시성, 곧 동일성의 해체를 포함한다. 능동적 자아의 시간화는 인류 역사의 순환 속에서 시간의 재통합을 시도하지만, 그 시도는 언제나 초과되는 무언가—무-시원—에 부딪힌다.
그런데 타인에 대한 책임은 자유로운 개입으로부터, 다시 말해 현재로부터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모든 현행의 또는 재현된 현재를 초과한다. 그것은 그런 식으로, 시작 없는 시간 속에 놓인다. 타인에 대한 책임의 무-시원(無-始原)은 현재에서 이전의 현재로 단순히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타인에 대한 책임은 자유로운 개입, 즉 현재의 자율적 행위로부터 생겨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재현된 현재를 초과하며, 시작 없는 시간 속에 놓인다. 이 무-시원의 책임은 현재 이전에, 이미 나를 향해 도래한 타자의 호출이다. 따라서 책임은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되돌릴 수 없는 과거의 잔향으로 나에게 부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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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이러한 무-시원의 상태는 되려 반성의 계기가 된다. 욕망의 대상—가족, 식욕, 돈—이 사라진 상태에서 주체는 더 이상 자신에게 몰입하거나 세계에 안주할 내적 근거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재하려는 의지마저 박탈된 이 순간, 오히려 타인을 향한 순수한 관심이 열린다.
욕망의 대상이 사라질 때 주체는 비로소 수동적 주체성, 즉 타자에게 응답하는 능력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따라서 책임은 주체가 통합하고 예측할 수 있는 시간, 곧 외삽적 계산으로 포착되지 않는다.
기억 가능한 시간에 의한—다시 말해, 재현 가능한 재현의 거둬들임을 통해 모을 수 있는 시간에 의한—현재들의 외삽(extrapolation)으로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이 무-시원, 재현으로 모아짐에 대한 이 거부는 나에 관여하는 고유한 양태를, 즉 경과를 갖는다.
타인에 대한 책임은 나의 과거 경험이나 현재의 계산을 초과하는 절대적인 것이기에, 주체가 통합하고 예측할 수 있는 외삽ㅡ미래를 계산하는 시간ㅡ으로는 결코 포착될 수 없다. 이 책임은, 주체의 통제를 벗어나 돌이킬 수 없이 흘러가는 시간(‘경과’)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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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에게 실재는 언어 이전의 외상적 흔적이며, 의식으로 포착되지 않는 영역이다. 나는 레비나스의 윤리적 책임을 이 실재와 유사한 차원에서 해석한다. 그것은 나의 자유 의지가 아니라, 나의 의식 바깥에서 이미 도래한, 거부할 수 없는 근원적인 부름이기 때문이다.
시간—회귀 없이 상실된 시간—이 통시성인 것은, 그리고 시간이 내게 관여하는 것은, 기억의 회복 저편의 노화로서다. 시간의 이 통시성은 간격의 길이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재현은 이 통시성을 포함할 수 없을 것이다. 이 통시성은 동일성의 해체(disjonction)다.
시간—회귀 없이 상실된 시간—이 통시적인 것은, 그리고 시간이 내게 관여하는 방식은 기억의 회복 너머, 곧 ‘노화’로 드러난다. 이때의 통시성은 단순한 시간 간격이 아니라, 되돌릴 수 없는 상실의 체험이다. 노화는 이 상실의 불가역성을 몸으로 경험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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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나이를 먹을 때, 우리는 어느 순간 삶의 결정적인 무언가를 영원히 놓쳐버렸다는 감각 속에서 실존적 슬픔과 피로를 느낀다. 그러나 나이는 단순히 지나온 시간의 양이 아니라, 회복 불가능한 상실을 견디며 살아온 시간의 질이다. 이러한 통시성의 시간은 나를 하나로 묶어주는 자아의 동일성을 해체한다.
이 순간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자아의 선은 끊어지고, ‘나’는 더 이상 하나로 합쳐지지 않는다. 이 해체의 과정에서, 실재는 의식과 언어를 뚫고 파열처럼 들이닥친다. 실재의 침입은 자아를 일시적으로 무너뜨리지만, 바로 그 붕괴의 틈에서 타인을 향한 윤리적 개방이 가능해진다.
여기서는 동일한 것이 동일한 것을 재결합하지 않는다. 즉, 그것은 비-종합(non-synthèse)이고, 피로다. 동일성의 대자는 이제 더 이상 대자가 아니다. "나"에서의 동일한 것의 동일성은 자기에 거슬러 밖으로부터 그에게 다가온다.
과거의 경험이나 미래의 계획이 더 이상 지금의 나를 온전히 설명하지 못할 때, ‘나’의 연속성은 끊어진다. 자신이 하나로 묶이지 못하고 해체되는 이 경험은 깊은 실존적 피로로 다가온다. 이때 동일성의 대자(le Moi)는 더 이상 자율적 주체로서의 ‘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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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이후에도 주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불려 나온 존재로서 다시 다가온다. 주체는 타자를 위한 존재이며, 그의 존재는 타인을 향한 응답 속에서 의미를 잃고, 동시에 새로운 의미를 낳는다. 노화 속에서 드러나는 이 주체성은 고유하며 대체 불가능하다.
마치 선출처럼 또는 들숨(inspiration)처럼, 소환된 자의 단일함으로서 다가오는 것이다. 주체는 대타적이다[타자를 위한다](pour l'autre) 그의 존재는 타자를 위함으로 나아간다. 그의 존재는 의미 작용으로 사라진다. 늙음에서 주체성은 독특하며, 대체 불가능하다. 그것은 나이지 타자가 아니다.
따라서, 윤리적 주체는 타인 그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나’로 남아 있지만, 존재의 근거는 더 이상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향한 책임에 있다. 즉,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 부름받은 존재’다. 이것을 레비나스가 말하는 윤리적 주체의 궁극적 구조로 이해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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