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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침묵은 어떻게 울리는가

말이 되지 않는 고통과 세계의 잔향

by 하진
ⓒ Pixabay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침묵하라.” 공동체의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타당한 명제다. 말할 수 없는 것이 누군가에게 공포를 유발할 수 있다는 전제를 품고 있으니까. 말이 되지 않는 것, 그것은 우리가 세계를 지탱해 온 언어・논리・상징의 구조로는 포섭되지 않는 어떤 것의 도래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공포는 낯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익숙했던 것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 발생한다. 낯섦이 아니라, 익숙함의 전복. 그 순간 주체는 자신의 구조가 해체되는 자리와 조우한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끊임없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고자 해왔다.


누군가는 그것을 해석 불가능한 채로 지워버리지만, 또 어떤 이들은 그로부터 의미를 짜내 타자에게 되돌려주려 한다. 하지만 실증주의적 사유는 이러한 시도들을 견디지 못한다. 그것은 체계의 외부로부터 기어오르는 울림이기 때문이다. 말이 되지 않는 것을 제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애초에 없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내 질문은 이렇다. 왜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감지했을 때, 그것을 진실의 단서로 보지 못하는가? 가령, 과학은 끊임없이 증명을 요한다. 그러므로, 생존을 증명할 수 없는 죽음은 끝이라고 가정한다. 정작 죽음의 층위는 그 어떤 수치로도 증명할 수 없는 ‘증명 불가능한 증명 불가능성’ 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또한, 죽음의 층위에서 가장 근접한 이들ㅡ 가령, 드물게 뇌사에서 돌아온 자들, 자살 시도 후 살아난 자들ㅡ 그들이 말한 것들은 왜 언제나 오류로 처리되나. 물론, 그 태도마저 이해할 수 있다. 혼란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자.


만약 그들이 말한 것이 ‘받아들여지는 세계’ 안에 있었더라면, 애초부터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했더라면, 그것은 낯설지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어떤 것이 이상하고, 낯설고, 불편하게 한다면, 그것은그들의 문제가 아니라ㅡ 그들을 통해 본인의 연약함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타자가 ‘나보다 앞서 도래한다’고 말한다. 문학적 은유가 아니라,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주체는 타자를 통해 자신을 구성하고, 타자를 통해서 존재를 인식한다. ‘나’는 타자의 거울인 동시에, 타자의 거울이 된다. 이성은 그것을 보호하지만, 그것에 저항하려는 어긋남이, 무언가를 드러낸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이미 한 번 경험했거나, 기호화된 것들의 조합일 가능성이 크다. 그저 말해지지 않는 것 앞에서, 철학이 할 수 있는 일은 침묵이 아니다. 그 자리의 구조를 밝히는 일, 반복되는 패턴속 유의미한 차이를 감각해내는 일이다.



‘정상’의 세계는 견고하고 평평하다.
그러나 ‘비정상’이라 불리는 자들은
세계의 균열을 감지한다.

그들은 질서의 바깥에서,
침묵하는 방식으로 달리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자주,
그들의 고통을 덮어버리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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