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이 사라진 인간, 감정이 병이 되어버린 시대
지나간 감정들을 되짚고, 인과의 흔적을 더듬을수록 우울에 취약해진다. 무언가를 안다는 건, 결국 그것을 결코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다. 돌아볼수록 남는 것은 지나간 실패들과 눈물이다. 앎이란 정작 무한한 오차의 시작이었으며, 그럼에도 끝내 이해를 포기하지 않는 행위였다.
인생을 무대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인간은 그 안에서 ‘역할’을 받고, 이야기를 하나의 의미로 엮어가려 하는 배우라고 할 수 있다. 존재의 이유는 끝내 무대를 떠나지 않는 것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종종, 주어진 역할을 잘 수행하는 것이 미덕인 시대에도, 누군가는 역할을 거부한다.
거짓된 연극의 배경을 찢고 나오는 몸은 쾌락에 도피하지 않고, 박수갈채를 기다리지않는다. 무대에서 벗어난 순간, 더 이상 역할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누군가에게는 의미의 흔적을 남기며 등장하는 진실의 누설자.
여기서 의문이 든다. 역할이 무너진 배우는 어디로 가는가. 가령, 나만의 방식으로 견뎌왔던 노력들이, 어느 날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된다면 말이다. 이미, 인공지능은 인간이 기계보다 더 기계적이라는 사실을 드러냈다. 사회가 부여한 역할을 착실하게 수행하는 존재ㅡ‘인간다움’은 여기에 있는가?
인간은 무의식에서 인과를 구성하고, 타인과 호응하며 뒤섞인다. 이러한 희미한 경계 속에서, 누군가는 남의 슬픔에 먼저 울고 있었다. 종종 뇌과학은 특정 정신병의 원인을 유전자로만 말하려 하지만, 그것은 기질일 뿐이다. 또한, 기질이 문제라면, 그것이 어떤 상황에서 발현되는지까지 말해야 한다.
우린 인간이 상상만으로도 임신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는 걸 알지 않나. 사람은 병자라 불리는 순간, 병자가 된다. 어떤 사람은 정신병자가 되지 않고서야 살아남을 수 없는 세계에서 병자가 된다. 그러므로 우울은,어쩌면 아직 감각이 살아 있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정직한 증상이다.
누군가는 우울은 나약함이고, 자살은 그 결과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반박하고 싶다. 인간은 원해서 태어난 존재가 아니며, 죽음조차 자기 뜻대로 허락되지 않는 삶이라고. 누군가는 감옥을 빙자한 병원에서, 의미 없는 처방전을 받고도 ‘살아야 한다’는명령 앞에 선다고.
그 명령은 누구의 발화인지, 왜 그러한 명령앞에 놓이게 되는 것인지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결코 우울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나, 그것이 바로 문제다. 우울은 묻는 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무너짐을 힘으로 바꾸는 방식이 이제는 아주 조금 더 많아졌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술을 마시고, 어떤 이는 약을 삼킨다. 그렇게라도 나아가려는 마음이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삶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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