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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나를 잃어야 나를 안다

자아가 흐르는 자리에서 피어나는 정체성

by 하진

※ 본 글은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사유를 바탕으로 한 개인적 독해 시도입니다. 여기에서 제시하는 해석은 정통 학술적 견해와 차이가 있을 수 있으며, 필자의 사유 흐름과 해석적 재구성을 포함합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

존재와 달리 또는 존재성을 넘어

그린비, 문성원, 초판 2쇄 20240411

ⓒ Pixabay

강박의 수동성에서 의식은 이웃으로부터 오는 떠맡을 수 없는 소환을 더 이상 숨기지 못한다. 이 수동성은 순진한 의식에 대한, 즉 철학 이전의 직접성에 대한 다른 이름이 아니다. 정반대로 그 수동성은 에고(Ego)의 순진한 자발성을 문제 삼는다. 그것은 가장 근본적인 문제 삼기다.


이웃으로부터 떠맡게 되는 책임. 거부할 수 없는 타자의 부름은 모든 수동성보다 수동적인, 에고(Ego)의 자발성에서 비롯된다. 전-의식적 층위에서 주어지는 무한한 책임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것이다.


참고

역자가 에고-자아를 구별해 표기한 이유는 현상학에서의 ‘에고(Ego)’와 정신분석학의 ‘자아(Ego)’를 구별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현상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후설은 의식 작용들의 전-반성적 지평으로서 에고를 언급했고, 메를로퐁티도 살(flesh)의 지평을 설명하며, 에고를 지각이 일어나도록 허용하는 전-반성적 토대로 명시한다. 즉, 현상학에서 말하는 ‘에고’는 의식 이전의 층위이자, 삶과 세계가 맞닿는 접면이다.


반면, 프로이트가 말하는 자아(Ego)는 현실 원칙에 따라 원초아와 초자아를 중재하며, 현실 속에서 능동적으로 기능하는 구조다. 두 개념은 의미상 구분된다. 이후 장에서 ‘에고’라는 용어가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나’는 어느 정도 그와 유사한 의미로 쓰인다고 이해하면 된다. 여기서 에고는 ‘나’와 가까운 개념인 반면, 레비나스가 비판하는 자아는 프로이트적 의미의 자아다.


예시

1) 에고: 오른손으로 왼손을 만질 때, 왼손은 만져지는 감각을, 오른손은 만지는 감각을 경험한다. 이때 나는 동일적 주체가 아니라, 감각들이 교차·뒤얽히는 장이 된다. 이것이 의식보다 먼저 도래하는 전-의식적 층위이자, 지각을 허용하는 전-반성적 토대인‘에고’다.

2) 자아: 집에 8시까지 들어오기로 엄마랑 약속했는데(Superego), 친구랑 더 놀고 싶다(Id). 전화해서 30분만 더 늦게 들어가도 되냐고 물어볼까?(Ego)


자아는 자신을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이미 책임에서 빠져나간다. 반면에 이자아와 언제나 대조되는 나는 그 책임에 강제된다. 이 책임을 대신할 사람을 요구할 수 없다. 자아는 그-자신에 대해 반성하는 의식 속에서, 대상으로 변모될 수 있고 그와 동시에 보편적 주체의 찢기지 않는 현시다.


자아는 책임의 자리에서 스스로 빠져나간다. 반면, 이 자아와 대조되는 ‘나’는 그 책임에 강제로 매여 있다. 자아는 자기 자신을 객관화된 ‘대상’으로서 사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보편적 주체로서 존재한다.


참고

보편성은 폭력으로 전환되기 쉽다. 서로 다른 개체의 다양성과 차이가 정상과 비정상으로 배제되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보편성의 폭력을 일관되게 비판했다. 또한, 자아는 스스로를 객관화된 대상으로 삼아 반성할 수 있지만, 동시에 온전한 ‘보편적 주체’로서의 위치에 머문다.


자아의 자발성은 자아를 판단하는 바로 이 눈 속으로 자아가 피신할 수 있게 해 준다. 자아는 자신을 보기 위해 그-자신에서 떨어져 나오지만, 이와 같은 부정성은 어느 모로 보나 결국 자기 회복이다.


자아의 능동성은 ‘나’를 밖으로 분리해, 스스로를 관찰 가능한 대상으로 만든다. 그렇게 분리된 자아는 자기비판의 눈길을 피해 숨을 곳을 얻는다. 하지만 이 분리는 결국 자아를 다시 결합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참고

분리된 자아는 메타인지적 사유와 유사하다. “나를 관찰하는 나”는 관찰자 자아에 의해 가능하지만, 그것마저도 자기비판을 회피하기 위한 도피처가 될 수 있다. 이러한 분리는 다시 자아를 통합하는 순환으로 되돌아가며, 탈-자아적 초월을 막는다.


자기에 대한 모든 의식보다 더 일찍 자아를나의 정체성 이편의 자기로 되돌리고 나를절대적으로 벌거벗기는 것은 타자에 의한 강박이다. 타자, 곧 나의 이웃은 내가 저지른 것이 아닌 잘못에 대해 나를 고발한다.


타자는 자아의 모든 의식보다도 먼저, 나를 나 이전의 나로 되돌린다. 그로 인해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사유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자유의 산물이 아니다.


존재가 그 흔적을 간직하지 못하는 이 "이편"을, 존재의 코나투스에 묶인 이기주의의 얽힘보다 더 오래된 이 "이편"을 피조성이라고 불러야 할까? 자기로 돌아오는 것, 그것은 설사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긴 채라 하더라도 자기 집에 자리 잡는 것이 아니다.


존재가 흔적을 간직하지 못하는 이편, 이기주의의 얽힘보다 더 오래된 이 이편을 피조성이라고 불러야 할까? 자기로 돌아온다는 것, 그것은 자기 동일적 자아와의 대면이 아니다. 자신만의 장소인 집에 갇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나의 정체성, 내가 쌓아 올린 자아라는 피막조차 밀어내는 경험이다.


참고

존재의 코나투스는 스피노자의 개념으로, 자기 보존의 힘을 의미한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자기중심적 코나투스를 넘어서는 차원, 존재가 자기 정체성으로 구성되기 이전의 ‘이편’을 문제 삼는다. 이 이편은 나의 의지, 나의 의도보다도 먼저 도래하며 나를 침투한다. 즉, 나의 자발성을 넘어선 응답성이다. 또한 존재가 흔적을 간직하지 못한다는 말은, 이 만남이 비기억적이고 탈-정체적인 방식으로 나에게 각인된다는 뜻이다.


그것은 이방인처럼 자기 집까지 쫓기는 것이고, 자신의 정체성과 자신의 빈곤에서조차 항의를 받는 것이다. 그 빈곤이란 마치 피부처럼 자기를 여전히 가두어, 이미 자기로 모아지고 이미 실체인 내면성에 자기가 자리 잡도록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를 만난다는 것은, 익숙함에 정박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지탱하던 내면성마저 넘어서, 자기를 여전히 가두려는 것에 저항하며, 그 너머의 응답 불가능한 요구와 마주하는 일이다. 그곳에서는 ‘나의 집’이 더 이상 피난처가 될 수 없다. 나는 내가 누구였는지 되묻고, 나로부터 밀려난다.


참고

피부는 보호막인 동시에 세상을 느끼는 접촉의 장소이다. 빈곤은 자아가 자기 동일성에 정착하는 것을 가로막지 못하고, 오히려 그 속에 스며들어 자기 이해를 구조화한다.


자기로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새로이 자기를 스스로 비우는 것이고, 혈우병의 출혈에서처럼 자기를 용해하는 것이다. 여전히 동일화 가능하고 보호받고 있는 자신의 핵 결합 이편에서, 준-형식적(quasi-formel) 정체성에 이르기까지 자기를 용해하는 것이다.


자기로 돌아온다는 것은 자기를 스스로 비우고, 녹아내리는 고통스러움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행위다. 자기 동일적 환상에 갇힌 자아에서 벗어나, 탈-자아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용해하는 일이다. 나의 의도나 계획을 초과하는 만남 안에서, 형체가 흐트러지는 것을 감수하는 행위다.


참고

자기로의 귀환은 고정된 자아에 대한 복귀가 아니라, 오히려 자아의 지속적 해체, 용해, 흘러내림이다. 혈우병의 출혈이라는 비유는 고통스럽고 피할 수 없는 유실성을 상징하며, 이 준-형식적 정체성은 더 이상 고정된 자아가 아닌, 끊임없이 열려 있는 자신을 가리킨다.


Point

- 윤리는 주권적 자아의 귀환이 아니라, 타자 앞에서 반복되는 자기-비움이다.

- 정체성은 끝내 완성되지 않는 질문이다.

- 자기 중심성을 넘어서는 부름 앞에서, 나는 피막을 뚫고 들어오는 책임의 요구에 직면한다.


상처를 감수하고 먼저 나를 내민다.
끝내 닿지 못할 손을 향해.

나를 살게 한 손을 기억하며
나로 인해 울던 얼굴을 기억하며
오래전부터 들려오던 부름에 응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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