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0장. 레비나스의 말함과 말해진 것

말함(le dire) · 말해진 것(le dit)

by 하진

ⓒ Pixabay

한 아이가 환히 웃으며 선생님에게 건네는 인사 속에는, 붙잡히지 않는 의미가 스며 있다. “안녕하세요.” 단 세 음절의 울림은 하나의 뜻으로 가둘 수 없다. 그것은 말함(le dire)의 세계에 속한다.


그 속에는 ‘저 여기 있어요.’라는 존재의 신호가, ‘저를 봐주세요.’라는 간절한 요청이 함께 흐른다. 순간의 눈빛과 목소리의 떨림, 공기 속 온도가 얇은 막처럼 겹치며, 말이 다층적인 생명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입술을 떠나는 순간, 그것은 말해진 것(le dit)으로 고정된다.


살아 있던 온기는 기호의 틀 속에 묶이고,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 여운의 울림은 잦아든다. ‘말함’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스쳐 지나가고, 그곳에서 ‘말해진 것’은 이미 과거의 빛으로 기울어 있다. 그래서, 글과 예술은 그 생생함을 붙들기 위해 쓰인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시도는 늘 실패한다. 기록하는 순간ㅡ 모든 경험은 언어와 의식의 틀 안에 갇히기 때문이다. 가령 봄날의 벚꽃을 한 문장으로 묶으려 하면, 과거의 햇살과 바람의 결, 꽃잎을 바라보던 순간의 감정은 스르르 빠져나간다.


언어와 형상은 결코 순간 자체를 붙잡지 못한다. 그러므로 문학과 예술은 늘 그 틈으로 향한다. 담아낼 수 없는 것을 전하기 위해 문장은 흔들리고, 경계를 깨뜨리며, 작품은 정상의 자리를 거부한다.


작가가 쓰는 것은 문장이 아니라, 그 문장을 쓰게 한 이유다. 우리가 붙드는 것은 글이 아니라, 그 글을 쓴 사람에게서 흐른 의미의 온기다. 그러니 어떤 문장도 끝날 수 없고, 어떤 작품도 머무를 수 없다. 진리는 언제나말의 바깥에서 조용히 숨 쉰다.


말해진 것의 경계를 넘어, 우리는 발을 내딛는다. 그 느린 걸음 속에서만 누군가의 울림 가까이 스며들 수 있다. 개념 속에 머물 것인가, 끝내 다 품지 못하는 여백 속에서 타자를 맞이할 것인가. 어느 길을 택하든, 말은 먼 곳에서 바람처럼 불어와 우리를 부른다.



레비나스와 하이데거의 분기점

하이데거의 말함은 존재의 장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거기서 드러남과 은폐가 교차하며, 말은 언제나 말해지지 않은 여백을 남긴다. 그러나 레비나스에게 말함은 타자 앞에 선 자기의 노출이다. 말해진 순간 그것은 기호로 고정되지만, 타자는 늘 그 고정에서 벗어나며 저항한다. 레비나스는 그 틈에서 초월을 본다.


#철학 #에마뉘엘레비나스 #데리다 #에세이 #수필 #감정 #감성 #존재 #하이데거 #위로 #심리


keyword
금요일 연재
이전 09화9장. 나를 잃어야 나를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