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용 SW 시장에 대하여
B2B SaaS 업계에서 8년 차 사업기획자로 일하면서 기업용 소프트웨어 시장을 바라보는 관점은 아래와 같았다.
이제는 특정 분야와 기능에 완전히 집중하는 버티컬 SaaS*의 시대다. 하나의 소프트웨어로 모든 업무를 관리할 필요가 없다. 고객은 업무나 부서에 전문화된 SaaS를 취사 선택하여 사용하기를 원한다.
* 버티컬(Vertical) SaaS: 특정 분야와 기능이 완전히 집중한 SaaS
* SaaS (Software As A Service): 클라우드 기반으로 제공하는 소프트웨어
다양한 기능을 평범한 수준으로 제공하는 80점짜리 SaaS를 하나를 도입하는 대신, 특정 분야와 기능에 완전히 특화된 100점짜리 SaaS를 여러 개 도입하여 평균 100점의 효과를 기대한다.
예를 들어, 어떤 회사는 협업툴은 '구글 워크스페이스'를 사용하면서, 메신저는 '슬랙'을 쓰고, 고객 대응은 '채널톡', HR 솔루션은 '플렉스', 비용관리는 '스펜딧'으로 하고, 화상회의는 '줌', 미팅 일정 조율은 '되는시간'을 통해 한다. 너무나 당연한 선택이다.
<Craft+Alchemy 블로그>를 운영하는 Christopher Chae님은 "좋은 SaaS를 도입한다는 것은 잘 정립된 프로세스를 도입한다는 것과 같다"고 표현했다. 즉, 각 분야에 좋은 SaaS를 여러 개 도입하면 그 분야에 적합한 프로세스를 쉽게 구축할 수 있다는 말로 재해석할 수 있다. 이 말에 200% 공감했다.
통계도 이를 뒷받침한다. BetterCloud의 조사에 따르면 2023년 기준 기업당 평균 SaaS 사용 개수는 112개를 넘었다. ¹ 실제로 이 시장을 공략하는 기업용 SaaS 구독 관리 플랫폼도 다수 출시되었다. (해외 서비스: Vendr, Zluri / 국내 서비스: 심플리, 메가존 PoPs 등)
그래서 B2B 시장에서 SaaS를 여러 개 이용하는 것은 대세고 뉴노멀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니까 사업기획자로서 가장 중요한 목표는 회사에서 사용하는 여러 SaaS 중에 선택받는 '하나'가 되도록 제품과 기능을 잘 만들고 새로운 시장을 발굴하는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최근 데이터 전문 기업, <Palantir 블로그>에서 완전히 다른 관점의 글을 읽었다. 뼈를 세게 맞는 기분이었다. 글을 쓴 Palantir의 제품 책임자 Peter Wilczynski의 주장은 이렇다.
업계에서 점점 더 많은 소프트웨어가 만들어지고 있지만, 소프트웨어가 경제 생산성에 미치는 영향은 과거에 비해 나아지지 않았다. ²
그 이유는 소프트웨어 산업의 구조적인 문제에 있다. 대부분의 소프트웨어 회사는 전체 비즈니스 성과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는 전체 엔터프라이즈 시스템의 통합에 신경 쓰지 않는다. 이들은 개별 기능 단위, 부품, 모듈을 만드는 것에 집중한다. (*기능 단위, 부품, 모듈은 B2B 시장의 다양한 소프트웨어, SaaS, 제품들을 의미한다.)
우리는 개별 부품을 만드는 것이 더 쉽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고객이 알아서 부품들을 잘 조립하여 가치 있게 만들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 이렇게 상황 판단 능력을 잃었다. 그 결과, 현재 소프트웨어 아키텍처는 고객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벤처 캐피탈리스트의 수익 창출에 최적화되었다. 또한, 통합된 시스템의 전체적인 성능에 초점을 맞춘 파트너 간의 'Positive-Sum' 협업보다 개별 구성 요소 공급업체 간의 'Zero-Sum' 경쟁이 심화되고 있다.
지난 20년 동안 이러한 개별 부품(모듈)에 해당하는 제품은 양과 질적으로 크게 개선되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개선은 기업 시스템 전체를 희생시키는 대가로 이루어졌다. 구성 요소를 개별적으로 최적화하면 분산된 여러 구성 요소의 변경 사항을 동기화/연동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결국, 컴포넌트(부품/모듈) 수준에서의 개선이 기업 전체 시스템 수준에서의 개선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민첩함을 위해 도입한 제품이 오히려 파편화된 엔터프라이즈 아키텍처를 초래한 것이다.
내 언어로 요약하면 '나무(부서/개인)' 관점에서는 이익이라고 판단하여 도입한 제품들이 전체 '숲(회사 전체 시스템)'의 비즈니스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여러 조직에서 자기 입맛에 맞는 제품을 여럿 도입하면서 연결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하나의 엔터프라이즈 시스템으로 통합/운영할 때의 이점을 누릴 수 없게 된다는 것.)
일리 있는 지적이다.
위에서 소개한 두 가지 관점 모두 맞는 얘기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의 소프트웨어 산업 체계 안에서 수많은 서비스 중에 하나로 살아남아야 하고, 고객의 비즈니스 성과와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시스템 통합'도 고려해야 한다.
그럼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01. 고객이 여러 개의 소프트웨어를 동시에 사용한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함과 동시에 02. 여러 소프트웨어를 하나처럼 쓸 수 있도록 높은 수준으로 시스템 연동/통합을 준비해야 한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우리 제품과 연동하여 사용했을 때 사용성이 극대화되는 'Best Practice' 제품을 발굴하고 연동을 추진하는 것이다. 이때 연동은 하나의 시스템처럼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제품이 부품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시스템 수준으로 확장할 수 있다. (생태계 구축을 기반으로)
이를 위해서라도 B2B 제품을 만드는 회사는 OpenAPI 또는 SDK를 잘 구축해 놓아야 한다. 고객이 언제, 어떤 기능을 어떤 제품과 연동하고 싶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고객은 API와 SDK를 통해 여러 제품을 하나의 시스템에 가깝게 사용할 수 있다.
위의 2가지 관점은 B2B 소프트웨어의 AI 기능과도 연결 지어 생각해 볼 점이 있다. 요즘 B2B 소프트웨어에 탑재되는 AI 기능의 핵심은 회사 내부에 흩어진 데이터를 검색/요약/정리하여 인사이트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³ 이때 만약, 고객이 사용하는 제품이 파편화되면 AI의 힘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각기 다른 제품에 접근하여 데이터를 모으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B2B 분야에서 타제품과의 '연동'이 앞으로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Glean'이라는 AI 기반 기업 검색 서비스가 뜬 기반에도 Jira, Google Workspace, Figma, Github 등 타 소프트웨어와 '연동'하여 여러 데이터를 긁어온 상태에서 검색할 수 있다는 것이 한몫했다.
정리하면 B2B 소프트웨어의 미래는 개별 제품의 전문성과 통합 시스템의 효율성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에 달려 있다. 제품의 전문성을 유지하면서도 다른 제품들과의 원활한 통합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또한, '개별 부품 제조업체'에 속한 제품일지라도 '전체 시스템 설계자'라고 생각하고 충분히 고민해야 한다. 그래야만 고객의 전체 비즈니스 성과와 만족도를 모두 높이는 제품이 탄생할 거라고 믿는다.
[참고 자료]
1) State of SaaSOps 2024 by BetterCloud [원문 링크]
2) Why did software eat the world but not increase the size of the pie? by TED MABREY [원문 링크]
3) For B2B Generative AI Apps, Is Less More? by Andreessen Horowitz [원문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