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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랍비 Sep 23. 2024

어쩌다 식집사

식물 암살자들과의 혈투

어느 순간부터 ‘식집사’라는 말이 생겨났다.

이는 ‘식물’과 ‘집사’라는 말이 섞여 탄생한 말인데, 식물에 애정을 쏟아 키우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아마도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을 ‘집사’라고 부르는 것을 패러디한 게 아닌가 싶다. 


그렇다.

나는 식집사다!


그것도 경력 6년 차의 식집사이며, 대대손손 ‘식물 암살자’의 혈통이 흐르는 아내를 살상력을 상쇄하는 엄청난 식집사다!

이런 날 비유하자면, 마치 슈퍼맨을 억제하는 ‘크립토나이트’와 같다고 하겠다.

아내가 슈퍼맨이고 내가 크립토나이트인 것이 이상한 비유지만, 그냥 그렇다고 하겠다.

아무튼 내가 식물에 빠지게 된 계기가 있었으니, 이 또한 특수교사란 직업이 밑거름 되었다.


<아내의 살기를 이기고 자란 억센 나의 식물들이다>


내가 막 임용에 합격하여 어색한 교사 생활을 할 때였다.

나는 ‘순회교육’을 담당하며 심한 장애와 건강상의 이유로 집에만 있는 아이들에게 다양한 체험을 시켜주고 싶었다.

*순회교육: 심한 장애나 건강상의 이유로 가정이나 시설, 의료 기관에 거주하는 학생들을 위해 해당 장소로 교사를 파견하여 교육하는 시스템. 


사실 이론상으로는 ‘순회교육대상자’에게도 국어나 수학 같은 교과목을 가르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순회교육대상자 아이들은 장애가 심하고 인지 능력이 부족하다.

게다가 말도 못 하는 아이가 대부분이기에 교과 가르치는 건 무리다.

그렇기에 아이들에게 무엇을 해주면 좋을까 고민하던 나에게 들어온 것이 바로 식물이다. 


‘그래! 바로 이거다!’ 


나는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노벨, 혹은 비행기를 발명한 라이트 형제처럼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번뜩인 나 자신을 칭찬했다. 


아이들이 흙을 만질 기회가 어디 있겠어? 그리고 식물이 자라나는 걸 실시간 관찰하며 이파리도 만져보고 자기가 키웠던 작물도 먹어보고. 얼마나 재미있을까? 식물은 오감을 충족시켜 주잖아! 그리고 식물 키우는 걸 안 좋아하는 학부모가 어디에 있겠어! 


나는 뿌듯한 마음에 당장 실행으로 옮겼고, 곧 노벨이나 라이트 형제처럼 본인의 판단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과거의 나 자신아 왜 그랬니!’ 


알다시피 식물의 생장에 필수조건이 바로 흙이다.

물론 수생식물이나 ‘물꽂이’라는 방법도 있지만, 이제 막 교사가 된 애송이가 뭘 알겠는가.

그러다 보니 각 가정에서 흙을 다루었는데….

그게 안 떨어지면 이상한 일이지 않겠는가? 

게다가 식물을 처음 심어 보는 애송이다.


이로 인해 내가 수업을 하고 나면 방바닥은 흙으로 너저분해졌다.

그리고 곧 나는 생판 남의 집에서 청소기를 빌려 청소하며, 내가 그렸던 ‘수업 판타지’를 종잇장처럼 구겨 던져버렸다. 

아…. 정말 왜 그랬을까.

나를 보던 학부모들은 도대체 무슨 마음이었을까.

아직도 과거의 나에게 괜찮다고 말해주시던 학부모들에게 죄송하고 감사하다.

그때 식물 심는 것은 그때가 마지막인 걸로 다짐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들과 식물을 키우며 드는 생각은 ‘참 잘했다’였다.

아이들에게 허브 향기도 맡게 하고 식물도 직접 만져보게 하니 드는 생각이었다. 


‘그래. 흙만 아니면 되겠네.’ 


식물의 생장을 직접 보고 체험하니, 아이들의 반응이 좋았고 학부모도 만족도가 높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가 굉장히 뿌듯했다.

이후로 나는 매 학년도마다 아이들과 함께 식물 하나씩은 같이 기른다.

화분에 흙도 채우고 식물도 심어 아이들에게 물을 주게 한다.

그리고 새로운 이파리가 생기면 아이들과 함께 그림으로 관찰 일기를 그리게 했다.

이로 아이들이 성취감을 느끼고 인성 교육에도 도움이 된다. 

물론 우리 반 제일 미남 성준(가명)이는 아직도 자기가 기르던 식물의 이름을 모른다.

그저 새로운 이파리가 자라면 나에게 달려와서 자랑한다. 


“선생님, 나무에 새로운 풀떼기가 자랐어요.”

“어… 저건 나무가 아니고 몬스테라야. 그리고 이파리.”

“네. 몬스테라에 풀떼기가 자랐어요.”

“아…그, 그래. 풀떼기 자라는 거 보니까 기분이 좋지?”

“네. 그런데 풀떼기는 안 먹어요.” 




그렇게 아이들과 식물을 기르며 한 학기가 지나면, 신기하게도 모두 다 죽어있다.

식물 암살자인 아내의 힘도 감당하는 나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도저히 모르겠다.

아무튼 그런 연유로 나는 그렇게 학기가 끝나기 전, 아이들 몰래 옆 반 선생님과 새로운 식물을 심는다. 


“선생님 올해는 많이 안 죽이셨네요?”

“네. 올해는 밖에 내놓았더니 덜 죽었어요.”

“그럼 저도 내년부터 그래볼까 봐요.”

“어! 벌레가 조금 생기는데 괜찮으세요?”

“아니, 안 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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