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면 보물 모르면 고물

by 김단영

알면 보물 모르면 고물

김단영



남편은 에어컨 설치기사다. 덕분에 나는 보조기사로 따라다니고 있다. 작업하러 방문하면 에어컨이 없는 집도 있고, 설치된 기존 에어컨을 뜯어내고 새 제품으로 교체하는 집도 있다. 철거한 폐에어컨은 물류센터로 입고시키기도 하고, 개인 작업한 건 고물상에 넘기기도 한다.


숨만 쉬어도 죽을 것만 같은 뜨거운 여름날이었다. 하루 작업을 마치고 폐가전을 옮기고 있었다. 스탠드형 에어컨을, 남편이 위쪽을 내가 아래쪽을 맞들고 끙끙거리며 나르던 중, 딱 내 눈높이에 붙어있는 금빛 스티커를 발견했다. 어라, 이게 뭐지?


남편은 지칠 대로 지쳐서 빨리 옮기자고 했지만, 나의 호기심을 이기지는 못했다. 명함 크기의 반짝이는 명판을 조심조심 떼어냈다. 폐에어컨을 처리하고 집으로 돌아와 명판을 검색했다. 이거 아무래도 순금 같은데?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가끔 남편을 따라 고물상에 가면 ‘어디 쓸만한 거 없나?’ 두리번거리곤 한다. 모르면 고물이지만 알면 보물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고물을 처리하러 갔다가 제법 쓸만한 그릇을 골라온 적도 있었다.



내가 들은 이야기 중에 고물상에서 발견한 보물이라면 다산의 『하피첩霞帔帖』이 으뜸으로 떠오른다. 오래전 TV쇼 진품명품에 나타난 고문서 세 권은 김영복 감정위원을 깜짝 놀라게 했다. 빛바랜 고문서는 다산 정약용이 강진 유배 시절에 만든 서첩으로 밝혀졌다.


‘하피’는 노을빛 치마라는 뜻으로 다산의 부인(홍혜완)이 초당으로 보내온 다섯 폭짜리 빛바랜 명주 치마로 만든 서책이었다. 다산은 치마를 책장 크기에 맞춰 여러 장으로 잘라 서첩 4권을 만들고 훈계의 말을 지어 아들 학연과 학유에게 보냈다. 자식을 향한 그리움과 당부가 절절하면서도 담담하게 녹아 있다고 전한다. 이후에 후손들이 잘 보관하였는데, 6.25 전쟁 때 피란길에서 분실되고 말았다.


수십 년 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하피첩이 진품명품 TV쇼에 나타난 경위가 재미있다. 고문서를 들고 나온 중년남성 이 씨는 경기도 수원에서 건물 인테리어업을 하는 사람이었다. 2004년 어느 날 수원의 주택 철거 현장 쓰레기 더미에서 폐지 줍는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는 폐지를 얻어가고 싶어 했다. 그때 이 씨는 할머니의 리어카 바닥에 깔려있던 고문서 세 권을 발견하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폐지와 맞바꾸기로 했다 한다. 그렇게 이 씨의 손에 넘어온 고문서는 2년이 지나서 ‘진품명품’에 감정을 받으러 나오게 되었다.


이 씨도 이것이 『하피첩』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그저 15만 원 정도로 예상했다. 그러나 진품으로 확인이 되었고, 다산의 『하피첩』임을 알아본 감정위원은 1억으로 감정가를 제시했다. 고물상 리어카 바닥에서 발견하고 거저 얻다시피 한 고물의 가치에 놀라 나자빠질 뻔하지 않았을까? 감정위원도, 감정을 의뢰한 사람도 모두 부들부들 떨었다는 후문이었다. 이후에 주인이 몇 번 바뀌면서 경매에 부쳐졌고, 최종 7억 5천만 원에 낙찰되었다고 한다.


『하피첩』 이야기를 들은 후로, 고물상에 가면 나도 모르게 두리번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하지만 내 눈에는 고문서는커녕 노비문서 쪼가리 한 장도 보이지 않았다.



노랗게 빛나는 명판을 사진 찍어 들여다보며 검색을 시작했다. 철거한 폐에어컨은 2007년도에 L 사에서 생산된 제품이었다. 경쟁업체인 L 사는 2003년부터 ‘인테리어 가전을 넘어 예술 작품으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전면 패널에 유명 화가의 그림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실용성보다 장식 효과를 기대하며 명화 액자형 에어컨을 출시했는데, 제품 로고를 순금으로 붙여 1000 대 한정으로 판매한 적이 있다. ‘WHISEN’이라는 로고를 순금으로 붙여 판매했다는 정보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명판으로 붙어있을 줄은 남편도 전혀 모르던 사실이었다. 17년이나 지났는데 그런 눈먼 금덩이가 남아있기는 할까?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지만, L 사의 뉴스 기사도, 소비자의 후기도 전혀 찾아볼 수 없어 에어컨 업계의 전설쯤으로 생각하고 말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수지 크래머(SUSI KRAMER)가 디자인했고, 1000대 중 278번째 생산된 리미티드 에디션이라고 적혀있다. 그리고 맨 아래에는 보일까 말까 한 아주 작은 글씨로 ‘3.75g FINE GOLD 999.9’라는 각인이 새겨있다. 그러면 순금 맞는구나! 앗싸, 순금 한 돈이면 돈이 얼마야?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1억짜리 『하피첩』에 견줄 수는 없겠지만, 살면서 뭘 주워본 적이 별로 없는 나에게 이것은 최고의 행운인 셈이다.



명판을 뜯어낼 때, 조심스레 뜯어내는 걸 진득하게 기다리지 못한 남편이 홱 뜯어버려 한쪽이 조금 구겨졌다. 온전하게 뜯어내어 에어컨의 역사 유물로 수집하고 싶었는데 아쉽게 되었다. 그래도 뭐 괜찮다. 구겨져도 금은 금이니까.


남편도 명판 사진을 찍어 S 사 에어컨 설치 기사들한테 자랑했다. 40대 미만인 기사들은 금시초문이라며 놀라워했고, 50대 이상은 들어보긴 했어도 실제로 뜯어낸 건 처음 본다고 했다. 딱 한 사람이 뜯어서 금방에 가져간 적이 있었는데, 순금 맞다고 돈으로 바꾸어 주더라 했다. 남편은 십수 년간 이 일을 해왔다. 어쩌면 몰라서 그냥 고물로 넘겨 버린 적도 있지 않을까 싶다. 알면 보물, 모르면 고물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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