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동, 검찰청 11층 회의실. 형광등 아래, 몇 명의 간부들이 모여 있었다. “전직 대통령입니다. 수사 강도는 높여야 합니다.” “언론은 준비됐습니다. 논두렁 시계부터 시작하죠.” 그 말은 명령이었다. 수사는 이미 기획되었고, 죄는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름을 적었다. “노무현.” 그는 퇴임 후 봉하마을로 내려가 유기농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는 대통령이었지만, 이제는 시민이었다. 그러나 검찰은 그를 다시 권력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 이번엔 피의자로서.
그날 아침, 노무현은 마을을 걷고 있었다. 논두렁에 이슬이 맺히고, 바람은 조용히 불었다. 그는 신문을 펼쳤다. “박연차 게이트, 전직 대통령 측근 수사 확대.” 그는 웃었다. “이제 시작이군.”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검찰은 그를 향하고 있었고, 언론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문재인에게 말했다. “나, 서울 가야겠네.”
검찰청에 도착한 그는 기자들 앞에 섰다. “나는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시민이다. 검찰의 질문에 성실히 답하겠다.” 그는 시계를 차지 않았다. “쪽팔리잖아.” 이인규 중수부장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통령님, 이건 수사가 아닙니다. 정의입니다.” 그러나 그 정의는 기획된 것이었다. 검찰은 박연차의 진술을 확대했고, 측근들의 계좌를 뒤졌다. “딸의 미국 집, 부인의 시계, 조카의 자금…” 증거는 모호했고, 진술은 흔들렸다. 그러나 언론은 이미 유죄를 확정지었다.
“피아제 시계 두 개, 논두렁에 버렸다.” 그 말은 보도되었고, 조롱이 시작되었다. “대통령이 논두렁에 시계를 버렸다고?” 그는 침묵했다. 그 말은 그가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언론은 그것을 진실처럼 다루었다. 그는 말했다. “나는 시계를 받은 적이 없다. 받았다면, 돌려줬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기사에 실리지 않았다.
검찰은 기소를 준비했다. 혐의는 ‘부패방지법 위반’, ‘정치자금법 위반’. 그는 피의자가 되었고, 가족은 고통을 받았다. 딸은 미국에서 신상털이를 당했고, 부인은 언론의 표적이 되었다. 그는 말했다. “너무 많은 사람에게 신세를 졌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 없다.” 그는 유서를 남겼다. “화장해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2009년 5월 23일, 새벽. 그는 봉화산 중턱의 부엉이바위에 올랐다. 그곳은 그가 자주 찾던 명상 공간이었다. 그는 마을을 내려다보며 눈을 감았다. 청와대의 회의실, 국회의 탄핵안, 검찰의 수사, 언론의 비난… 모든 것이 밀려왔다. 그는 조용히 일어섰다. 경호원은 “담배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몸을 던졌다.
김해 세영병원 → 양산 부산대병원. 오전 9시 30분, 사망 확인. 직접 사인은 두부 외상. 바위 아래 약 30m 낙하. 경호원은 진술을 번복했다. “경호 실패를 은폐하려 했다.”
서울 덕수궁, 광화문, 부산역… 전국 곳곳에 자발적 분향소. 수백만 명이 조문 행렬에 참여했다. 그를 지지했던 이들도, 반대했던 이들도, 그날만큼은 침묵했다. 그는 단순한 정치인이 아니었다. 그는 시대의 상징이었다.
타살설, 유서 조작설… 그러나 경찰은 투신 자살로 최종 확인. 경호원의 교신 기록, 진술 번복… 기획수사의 흔적은 남았지만, 진실은 침묵 속에 묻혔다.
그의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봉하마을에 묘역이 조성되었다. 그의 철학은 문재인 대통령 등 측근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노무현재단이 설립되었고, 봉하마을은 시민들의 성지처럼 자리잡았다. 그의 비석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다.” 그 문장은 단순한 유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대를 향한 당부였고, 미래를 향한 씨앗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