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사무실. 조사관 김재호는 책상 위에 놓인 친일파 명단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명단에는 국회의원, 장관, 경찰 고위직까지 줄줄이 올라 있었다. 그는 손에 쥔 수사보고서를 검찰에 넘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걸 다 기소할 수 있을까… 검찰이 협조만 해준다면.” 하지만 그날 오후, 검찰은 조사관들을 체포했다. 수사 기록은 압수됐고, 언론은 ‘과잉 수사’라며 반민특위를 비난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침묵했고, 친일파들은 웃었다. 검사 박영수는 회의실에서 상부의 지시를 받으며 말했다. “정의는 권력 앞에 무력하다. 우리는 법을 지키는 게 아니라, 권력을 지키는 거야.” 그날 이후, 검찰은 권력의 도구가 되었다. 반민특위는 해산됐고, 친일 청산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59년, 서울구치소. 진보당 대표 조봉암은 간첩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마지막 면회에서 딸에게 말했다. “나는 이 나라를 사랑했다. 하지만 이 나라는 나를 버렸구나.” 검찰은 증거 없이 그를 기소했고, 법원은 형을 집행했다. 이후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지만, 조봉암은 이미 이 세상에 없었다. 검사 최기훈은 법정에서 말했다. “국가 안보를 위해선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의 말은 법복 없는 제왕의 논리였다.
1967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유학생 이수진은 갑작스레 체포되었다. 동백림 사건. 검찰은 그를 간첩으로 몰았고, 언론은 ‘문화계 침투’라며 대서특필했다. 서울의 검사실에서, 검사 이형석은 수사 보고서를 읽으며 말했다. “예술가든 뭐든, 국가 안보 앞에선 모두 잠재적 위험이야.” 하지만 독일 정부는 강하게 반발했고, 국제사회는 한국의 인권 탄압을 비난했다. 수진은 결국 무죄로 풀려났지만, 그의 삶은 이미 망가져 있었다. 그는 귀국 후 인터뷰에서 말했다. “나는 단지 시를 썼을 뿐입니다. 그 시가 국가를 위협했다는군요.”
1974년 봄, 서울대학교. 학생 이정우는 민주화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검찰은 그를 체포했고, ‘내란 음모’로 기소했다. 고문, 협박, 조작된 진술. 검사 김도현은 법정에서 말했다. “국가를 위협하는 자는 법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그는 정의를 말했지만, 법정은 진실을 묻지 않았다. 이정우는 징역 15년을 선고받았고, 그의 청춘은 감옥에서 사라졌다. 출소 후 그는 말했다. “나는 민주주의를 꿈꿨습니다. 검찰은 그 꿈을 죄로 만들었죠.”
1975년 4월 8일, 서울구치소. 8명의 사형수가 선고 18시간 만에 형이 집행되었다. 그 중 한 명, 대학생 김태훈은 마지막으로 가족에게 편지를 남겼다. “나는 죄가 없습니다. 하지만 법은 나를 죽입니다.” 검찰은 고문으로 자백을 받아냈고, 법원은 이를 받아들였다. 2007년, 재심에서 전원 무죄가 선고되었지만, 이미 그들은 이 세상에 없었다.
1979년, 검찰청 내부 회의. 검찰총장 이재훈은 말했다. “우리는 수사와 기소를 모두 가진 유일한 조직이다. 이 권한은 국가를 위해 쓰여야 한다.” 하지만 그 권한은 견제받지 않았다. 고문은 관행이었고, 기소는 정치적이었다. 검찰은 법복 없는 제왕이었다. 그날 밤, 젊은 검사 최민호는 일기를 썼다. “나는 법을 공부했다. 정의를 믿었다. 그런데 오늘, 나는 한 사람을 고문으로 자백시키는 걸 지켜봤다. 그가 죄를 지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기소할 것이다. 왜냐하면 위에서 그렇게 지시했으니까.”
검찰은 언론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수사 초기 단계에서 피의사실을 흘리고, 언론은 이를 받아쓰며 여론을 형성했다. 1970년대, ‘간첩단 사건’ 보도는 검찰의 발표를 그대로 받아썼다. 피의자들은 얼굴이 공개됐고, 국민은 그들을 조롱했다. 피의사실 공표는 헌법과 형법에 위배된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피의자가 유죄로 확정되기 전까지는 무죄로 간주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그러나 검찰은 언론을 통해 피의자를 유죄로 몰았고, 그 피해는 회복할 수 없었다.
검찰은 법복을 입지 않았지만, 법관처럼 군림했다. 피의자의 얼굴을 언론에 노출시키며 여론을 조작했고, 기소 여부를 통해 정치적 생명을 좌우했다. 국민은 검찰을 두려워했고, 정치인은 검찰을 경계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검찰을 견제하지 못했다. 검찰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법을 넘나들었다. 수사와 기소의 독점은 견제받지 않는 권력으로 이어졌고, 특별수사부의 존재는 그 문제를 더욱 심화시켰다.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었다. 정권은 흔들렸고, 검찰은 방향을 잃었다. 검사 정진우는 회의실에서 말했다. “우린 누구를 위해 일해왔던 거지? 법을 위해서였나, 권력을 위해서였나.” 그는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날 이후, 대한민국은 또 다른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