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문’ 세계대전 속 이념의 폭력

by 김작가a

나는 그 문을 처음 본 순간부터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문이 아니었다. 나무로 만들어졌지만, 그 결이 살아 있었고, 붉은 빛이 스며들 듯 퍼져 있었다. 마치 피가 흐르는 듯한 문양이 문 전체를 감싸고 있었고, 그 위에는 희미하게 ‘에덴’이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그 문 앞에 서 있었다. 이름도, 시간도, 공간도 잊은 채. 다만 내 안에서 울리는 하나의 목소리만이 나를 이끌었다. “세구, 너는 기억해야 한다.”

나는 세구였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그러나 내가 누구였는지, 왜 이곳에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붉은 문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문을 열었다. 그 순간, 나는 과거로, 혹은 미래로, 아니면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첫 번째 문 너머에는 전쟁이 있었다. 참호 속에서 젖은 흙과 피가 뒤섞여 있었고, 병사들의 눈은 이미 생명을 잃은 자들의 그것과 같았다. 나는 그 속에서 한 아이를 보았다. 그는 울고 있었고, 그의 손에는 찢어진 편지가 들려 있었다.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아.” 그 말은 내 가슴을 찔렀다. 나는 그 아이를 안고 울었다. 그 순간, 나는 기억했다. 나도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누군가의 아버지였으며, 누군가의 동료였다.

두 번째 문은 수용소였다. 철조망 너머로 보이는 인간의 얼굴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숫자로 불리는 사람들, 이름을 잃은 존재들. 나는 그 속에서 한 여인을 보았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기억은 고통이지만, 잊는 것은 죄야.”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그 속에는 생명이 있었다. 나는 그 생명을 느꼈고, 그것이 내가 지켜야 할 것임을 깨달았다.

세 번째 문은 이념이었다. 붉은 깃발과 푸른 깃발이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나는 그 사이에 있었다. 양쪽 모두 나를 적이라 불렀고, 나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나는 단지 생명을 지키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말했다. “이념이 없으면 질서도 없다.” 나는 외쳤다. “질서가 생명을 죽인다면, 그 질서는 거짓이다.” 그 순간, 나는 총을 버렸다. 그리고 나는 기억했다. 나는 의사였다. 생명을 살리는 자였다.

문은 계속되었다. 나는 20개의 문을 지나야 했다. 각 문은 하나의 시대, 하나의 폭력, 하나의 기억을 품고 있었다. 나는 그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이념을 위해 생명을 희생시키는지를 보았다. 나는 그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기억을 봉인하고, 고통을 피하려 했는지를 보았다. 그러나 나는 알았다. 기억은 고통이지만, 그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네 번째 문에서 나의 과거를 보았다. 나는 전쟁 속에서 동료를 잃었고, 그 슬픔을 견디지 못해 기억을 지웠다. 나는 붉은 문을 통해 그 기억을 되찾고 있었다. 나는 다섯 번째 문에서 나의 사랑을 보았다. 그녀는 나를 위해 죽었고, 나는 그녀를 잊었다. 나는 여섯 번째 문에서 나의 죄를 보았다. 나는 생명을 지키기 위해 한 생명을 포기했다. 나는 그 죄를 잊고 살았다.

문을 통과할수록 나는 무거워졌다. 기억은 나를 짓눌렀고, 고통은 나를 삼켰다. 그러나 나는 멈출 수 없었다. 나는 마지막 문을 향해 걸었다. 그 문은 가장 붉었다. 마치 피로 물든 듯한 문이었다. 나는 그 앞에서 멈췄다. 문은 나에게 말했다. “이 문을 열면, 너는 모든 것을 기억하게 된다. 너는 고통을 감당해야 한다. 너는 선택해야 한다.”

나는 문을 열었다. 그 순간, 나는 모든 것을 기억했다. 나의 이름, 나의 과거, 나의 사랑, 나의 죄, 나의 선택. 나는 울었다. 나는 웃었다. 나는 무너졌다. 그리고 나는 다시 일어섰다. 나는 생명을 선택했다. 나는 이념이 아닌 생명을 우선하는 세계를 만들기로 했다. 나는 기억을 나누기로 했다. 나는 고통을 감당하기로 했다.

『붉은 문』은 나의 여정이었다. 그것은 인간이 기억을 통해 생명을 되찾는 이야기였다. 그것은 이념의 폭력 속에서 생명의 우선성을 선언하는 이야기였다. 나는 세구였다. 나는 기억하는 자였다. 나는 생명을 지키는 자였다. 그리고 나는 문을 닫았다. 이제, 당신의 차례다.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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