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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Dec 12. 2023

숭고미(美)

Sublime and aesthetics

카지미르 말레비치(Казимир Северинович Малевич, 1879~1935) - <Black Sqare>(1915)

  놀랍게도 저건 그림이다. 그 잠재 가치는 무려 1조 원이라고 추정하더라. 아 물론 그림은 저 검은 사각형 하나다. 가장자리의 흰 부분은 그림이 아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들을 나열해 보면 위의 그림과 같은 추상화가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가치를 의심한다. 사람들은 마크 로스코나 잭슨 폴록과 같은 현대 미술작가-더 나아가서 추상 표현주의-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현대 미술은 작품 내의 미적 정보와 의미 정보가 그림의 내용을 이해하기 쉬울 정도로 조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폴 세잔까지만 해도 분명히 무엇을 그렸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구도가 좀 어긋난 보여도 그가 그린 것은 사과였으며, 찌그러지고, 색이 달라도 그건 오렌지였다. 그러나 입체주의, 야수주의, 표현주의, 추상 표현주의 등 현대적인 미술사조가 등장하자 대중은 그 그림이 전달하고자 하는 정보를 수신하기 어려워졌다. 대중이 그 그림이 내포하는 것이 무엇인지 호기심을 가지지 않게 만들 정도로 현대미술은 대중에게 친절하지 않다. 현대 미술에서 의미 정보가 미적 정보에 초월당해서 그 의미를 알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저 미적 정보가 의미 정보에 비해 너무 방대해서 그 그림을 이해하지 못한다고만 단정 지어서는 현대미술을 누릴 수 없다. 현대 미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지 미(美)에 대한 개념뿐만 아니라 숭고(Sublime)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어쩌면 미(美)라는 것은 기술복제시대 이래로 의미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미(美)가 아니라 숭고를 느끼기 위해서 현대미술이 그렇게 난해함에도 미술관에 가서 그림을 보나보다. 


  이 글에서는 숭고에 대해 다뤄보려고 한다. 미학에서 숭고를 처음 다룬 사람이 칸트라고 아는 사람들이 있던데, 엄연하게 미학 안에서 최초로 숭고를 다룬 사람은 그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 글에서는 주로 칸트를 통해서 숭고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그래도 짧게나마 롱기누스, 부알로 그리고 버크에 대해서도 언급해보려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와 숭고를 비교해보려 한다. 현대 미학을 이해하고, 논하기 위해서는 숭고를 반드시 알고 넘어가야 한다.


숭고란 무엇인가?

  숭고라는 단어를 평소에 우리는 자주 사용하지 않는다. 숭고라는 명사대신에 "숭고하다"라는 형용사가 아마 더 익숙할 것이다. 숭고한 희생, 숭고한 사랑 등 우리는 숭고를 그 자체로 다루기보다는 부수적인 형용사로 사용하는 것이 더 익숙할 것이다. 하지만 미학에서는 숭고를 형용사가 아닌 명사 그 자체로 다룬다. 어느 명사를 꾸미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된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숭고는 미의 한 종류가 아니라 별도의 미학 영역이다. 도덕적으로 고상하고 우월한 대상을 ‘숭고’하다고 생각하는 상징적인 관념과는 다소 동떨어진 개념이다.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숭고함은 위대 · 장엄 등 윤리적 맥락이고, 미학에서의 숭고 개념은 물론 위대 · 장엄도 포함하지만 혐오스러운 것, 무서운 것, 섬뜩한 것들에까지 확대되기 때문이다. 숭고는 1세기 로마 시대 롱기누스가 수사학 교본에서 처음으로 언급했지만 18세기의 버크와 칸트에 의해 본격적으로 미학에 편입되었다(SA, 5-6).”


롱기누스

 서론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숭고를 최초로 논한 사람은 칸트가 아니다. 최초로 숭고를 논한 사람은 수사학자 롱기누스였으며, 그는 수사학자답게 웅변을 통해서 숭고를 논했다. "웅변의 덕목은 설득이다. 그러나 단순히 설득만 해서는 좋은 웅변이라고 할 수 없다. 설득을 능가하는 덕목이 있으니, 그것이 숭고라고 했다. 숭고란 독자를 감동하게 만드는 ‘표현의 우수성이나 독특함’이다. 숭고를 통해 우리의 영혼은 위로 들어 올려져 고양되고, 우리는 마치 우리 자신이 그것들을 만들어 낸 것처럼 자랑스러운 기쁨으로 충만하게 된다(SA, 24-5).” 그렇다면 롱기누스가 말하는 숭고란 아름다운 말 혹은 담론이 주는 감동일까? 그건 아마 언어를 통해서 얻는 쾌이지만, 언어를 통해서 재현될 수 없는 감정일 것이다. 그가 1세기 사람임을 감안해서 그 당시의 예술은 테크네(Techne) 그 자체였음을 알아야, 그가 왜 회화나 조각 같은 예술작품이 아닌 발화를 통해서 예술적 감정인 숭고를 논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부알로

  17세기의 프랑스의 문필가 부알로는 롱기누스의 숭고론을 근대로 전달했다. 그는 숭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했다. “표현을 감추었다는 것은 어떤 대상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않고 애매모호하게, 즉 비확장적으로 남겨 두었다는 의미다. 문채든 아니든 수사적 비유들이 감춰져야 한다는 것은 가장 고급의 수사학적 기법이 비확정성이라는 것을 뜻한다. 확실하게 정해져 있지 않은 대상을 지시하는 애매한 상태의 표현 방법, 결국 비확정성이 숭고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부알로는 결론지었다(SA, 28-9).”


  확실하게 확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표상을 오로지 한 가지만으로 한정아여 우리의 상상력을 제한한다. 더 이상 상상할 아무것도 없으므로 거기엔 설렘, 막연한 불안감 같은 것이 있을 턱이 없다. 그러나 뭔가 알 수 없는 비확정적인 상태는 우리의 감정을 크게 동요시키며 단순한 미에서 느낄 수 없었던 강렬한 쾌감을 준다. 이 강렬한 쾌감, 그것이 바로 숭고다(29).


  부알로에게 숭고란 비확정성에서 오는 애매함으로 인한 미지의 영역에 의해 느껴지는 쾌감이다. 확정적인 무언가는 우리에게 그것에 대해 더 생각할 기회를 주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의 의식의 지향성은 다른 곳을 향하며, 그 확정적인 것은 고정적이며, 이미 해결된 무언가 일 것이다. 하지만 비확정적인 무언가는 우리를 불안하게도 만들며, 설레게도 만든다. 따라서 의식의 지향성은 계속 그 무언가를 향하게 되고, 우리는 그 확정되지 않은 무언가에 의해서 쾌를 느끼게 된다. 이게 부알로가 말하는 숭고다.


에드먼드 버크

  버크는 철학자보다는 정치인으로 익숙할 것이다. 그런데 그는 철학자이기도 했다. 칸트와 동시대에 살았던 그는 『숭고와 아름다움의 이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연구』(1757)에서 처음으로 미와 숭고를 분리시키는 미학 이론을 제시했다. “버크는 인간의 마음이 종종 고통도 아니고 쾌도 아닌 상태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아니, 고통과 쾌가 혼합된 정도가 아니라 아예 고통이 더 큰 쾌감을 준다는 통찰에 이르렀다. 그에 따르면 미적 쾌감은 직접적인 쾌감인 반면, 숭고적 쾌감은 간접적인 쾌감이다. 미적 쾌감은 그냥 즐겁기만 한 쾌감인데, 숭고적 쾌감은 처음엔 고통이다가 나중에 쾌감으로 전환되는 쾌감이다. 고통과 결합되면 쾌감은 두 배로 상승한다. 따라서 숭고가 주는 만족감은 미가 주는 만족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도 높은 열정을 불러일으킨다(38-40).” 


  더불어서 버크는 미, 특히 숭고의 감정의 기원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며 미를 비례, 적합성, 조화의 문제로 만드는 미학의 틀을 완전히 다시 검토하고 우리가 감정의 미학이라 부르게 되는 것을 장려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미는 "이성에 즐거움을 주는 조화에서 비롯되는 것"이었으며, 고전미학에서 아름다운 사물들의 특징인 조화를 결정하는 것은 규칙성, 균제, 비례였다. 

  버크의 비판의 핵심은 비례들의 조화가 미를 결정한다는 생각이다. 미가 부분들의 비례에 있다고 믿는 것은 잘못이라고 그는 단언한다. 그에 따르면 비례를 판단하는 것은 오성의 일이지만 미는 추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AP, 103-7). 

칸트의 숭고

  흔히 우리는 무한한 우주, 영겁, 신의 섭리, 인간 영혼의 불멸 같은 것들을 숭고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칸트는 자연 현상도 그것이 우리에게 무한성에 대한 감각을 일깨줘 줄 때는 숭고하다고 본다.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자연은 우리의 저항력을 아주 미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며, 이것들의 위력에 비하면 인간의 저항력은 보잘것없고 미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우리 자신을 나약하게 느끼게 만드는 숭고마저도 쾌로 치부하는 것일까? 『판단력 비판』에서 말하길 인간은 아름다운 것 앞에서는 상상력과 오성이 작동하지만, 숭고한 대상 앞에서는 이성이 작동한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숭고한 대상 앞에서 우리에게 우월한 마음의 능력, 즉 이성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 능력이 자연의 절대적 힘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준다고 칸트는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덮칠 것 같은 숭고한 무언가 앞에서 불쾌를 느끼면서 동시에 쾌를 느끼며 이러한 쾌도 불쾌도 아닌 감정을 느낄 때 그것을 즐기게 된다.


  “결국 자연의 위력은 내가 육체적으로 무력한 존재임을 인식하게 해 주는 동시에 그 자연을 능가하는 우월성이 나에게 있음을 일깨워 주었다. 아무리 거대하고 힘센 무시무시한 자연이라도 그 앞에서 “나는 나의 내부에 있는 본능보다 우월한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의 외부에 있는 자연보다 우월하다”는 감정을 느끼게 될 때 그 대상은 숭고하다(SP, 61).”


   따라서, 자연이 숭고한 것은 공포를 야기해서라기보다 오히려 그것이 나의 안에 이성이 있음을 깨닫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두려운 자연 현상 앞에서, 혹은 거대한 인공물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과 경외감, 이것이 바로 숭고의 체험이다. 칸트는 숭고를 둘로 나누었다. 첫 번째는 피라미드나 성 베드로 성당 같은 거대함이 주는 숭고감을 ‘수학적 숭고(mathematical sublime)’, 두 번째는 쓰나미 같은 압도적 힘에 관련된 것은 ‘역동적 숭고(dynamic sublime)’라고 이름 지었다. 수학적 숭고는 무한한 절대적 크기의 관념에서 나오고, 역동적 숭고는 엄청난 에너지 앞에서의 경외감에서 나온다. 그래서 칸트는 “쉽게 말해 절대적으로 큰 것은 모두 숭고다”라고 말했다(62). 이때 거대한 것 앞에서 우리의 오성이 그것들을 따라잡지 못하는 심리적 과정을 칸트는 ‘미적 총괄(comprehensio aesthetica)’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숭고란 우리가 이해하거나 제어할 수 없는 어떤 한계(limits) 앞에서 느끼는, 일단 부정적인, 네거티브한 체험이다. 이 체험은 언어로도 이미지로도 표상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그래도 언어로 표현을 해야만 한다면,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이라고 하거나 아니면 좀 더 고풍스럽게 ‘형언할 수 없는’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말하는 방식이 바로 숭고 미학이다. 그러니까 숭고의 대상은 표현 불가능한 관념이다.     

  칸트 미학에 따르면, 미가 대상의 성질이라면 숭고는 주체인 나의 상태이다. 따라서 숭고는 자연의 사물 속에 있다기보다는 차라리 나의 심성 속에 있는 것이다.


미와 숭고

  미와 숭고, 둘 다 우리의 즐거움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그들이 완전히 다르고, 분리되어 있어도 그들 사이에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을 것이다. 첫째, 미는 양보다는 질에 관련이 있고, 숭고는 양과 관계가 있다. 둘째, 미는 포지티브한 쾌를 유발하며, 숭고는 네거티브한 쾌를 유발한다. 이때, 포지티브한 쾌를 유발하는 '미'는 고요한 관조 속에서 아름다움을 감상, 긍정적인 기쁨을 말하며, 네거티브한 쾌를 유발하는 숭고는 쓰나미처럼 무섭게 달려오는 파도는 우리가 결코 그 앞으로 다가가고 싶지 않은 무서운 광경이다. 그런데도 눈길을 뗄 수 없고 자꾸만 바라보고 싶은 묘한 감동을 준다. 그리고 미와 쾌 둘 다 공통적으로 생명력에 대해 영향을 준다. 미적 감동은 상상력과 오성이 결합하여 생기는데, 이는 직접적 쾌감이라 우리의 생명력을 촉진한다. 이를 조용한 관조라고 한다. 반면에, 숭고는 모든 상상력이 일단 좌절한 후, 그러니까 부정의 과정을 거친 후 비로소 느끼는 간접적 쾌감이다. 우리의 생명력은 일순간 억제되었다가 뒤이어 한층 더 강력하게 분출된다. 이를 역동적 관조라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는 오성과 관련 있지만, 숭고는 이성과 관련이 있다. 고전주의적 미학의 관점에서 볼 때 현대와 다르게 하나의 차이점을 추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미는 사물 자체에 내재된 성질이었다면, 숭고는 사물이 아니라 그것을 관조하는 주체인 나에게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


현대미술과 숭고

  바넷 뉴먼의 작품에서 예술가의 예술적 솜씨를 확인할 만한 것은 전혀 없다. 이렇다 할 기교도 기법도 없고, 심지어 예술가는 핀젤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채색에 사용된 것은 페인트용 롤러다. 여기서 전통적 의미의 예술은 존재하기를 그친다. 예술은 현실을 묘사하기를 포기하고, 이 침묵으로써 ‘이 세계에는 예술로써 묘사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리오타르의 말대로 대상을 묘사하기 포기한 현대예술은 “묘사할 수 없는 것을 묘사”하려는 모순적 시도인지도 모른다. 한 장의 그림 앞에서 바로 그것과 접하는 체험. 나의 인식 능력으로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그것과 마주치는 불편한 체험. 그것은 바로 ‘숭고’의 체험이다(ML, 232).

  현대 미술은 묘사를 포기함으로써 현대예술은 이 세상에 묘사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함을 증언한다. 낭만주의 회화가 숭고한 대상을 그림으로써 숭고의 개념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려 했다면, 모던의 아방가르드는 대상의 묘사를 포기함으로써 숭고를 ‘사건’으로 제시하려 한다(ML, 244).


  현대예술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과거의 예술은 관습적 언어가 있었기에, 그 익숙한 코드에 따라 쉽게 해석이 되었다. 하지만 현대의 예술에는 이렇다할 해석의 코드가 없다. 이미 존재하는 코드(양식)에 따라 메시지(작품)를 만드는 게 아니라 메시지를 가지고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은 새로운 코드를 만들어내려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못한 채 작품과 맞닥뜨리는 관객은 작품 앞에서 번번히 충격을 받게 된다. ‘쇼크’는 아방가르드 예술의 중심적인 미적 범주가 되었다(ML, 249).


  과거의 예술이 유한한 대상의 미를 재현하려 했다면, 현대 예술은 무한한 대상의 숭고를 현시하려 한다. 현대 예술은 형상을 지움으로써 이 세상에 말할 수 없는 것, 볼 수 없는 것, 떠올릴 수 없는 것, 그릴 수 없는 것, 한마디로 형상화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증언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예술은 미가 아니라 숭고를 추구한다. 이를 위해 화면은 점점 아름다운 대상들을 게워내고 그 극한에서 마침내 텅 빈 공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AO3, 220).


  재현가능한 것을 재현하는 것으로 당연하게 여겨지던 예술이 재현불가능한 무언가의 재현을 시도하며 그것의 불가능을 증언하면서부터 예술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어쩌면 예술에서 숭고의 재현이란 바벨의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에게 아담의 언어로 말을 거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대중은 이 불가능한 재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의 경우는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을 보면 다음과 같이 반응한다. 아 재현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거구나. 패턴이 마음에 드네. 오 저 검은색은 좀 스타일이다.


  미술작품이 우리에게 아담의 언어로 말을 걸 때, 우리는 바벨의 언어로 번역해서 그 진정한 의도를 파악할 수 없다. 내가 프랑스어를 모르는데, 프랑스인이 나에게 말을 건다면 나는 뭔 소리지 하고 그냥 넘어갈 것이다. 따라서 나는 그 프랑스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작가가 보여주는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음'을 보고 아 알아들을 수 없구나. 하고 넘어가면 된다. 이제 예술은 정복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완결된 것이 아니며, 대중의 참여를 유도한다.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숭고가 있음을 표현한 작품 앞에서 해석의 정석을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만의 해석으로 그 작품을 칭송하거나 비판하고, 인증숏을 찍어서 올림으로써 그 작품의 완성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미술의 숭고가 어려운 이유는 텅 빈 작품 안에서 무언가를 찾으려고 애쓰기 때문은 아닐까.


Reference

박정자, 『숭고 미학』, 기파랑, 2023. (SA);

진중권, 『현대미학 강의』, 아트북스, 2003. (ML);

_____, 『미학 오디세이3』, 휴머니스트, 2022. (AO3);

시릴 모라나, 에릭 우댕, 『예술철학』, 한의정 역, 미술문화, 2019. (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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