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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Sep 22. 2024

예술의 상징성

symbolisme de l'art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 - <자전거 바퀴>(1917)

  예술의 기원은 과연 무엇일까? 혹자는 유희, 노동, 주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예술의 기원을 찾는다. 예술이라는 것은 어쩌면 기호이자 상징이다. 그림 속의 알레고리는 우리에게 성경의 내용을 시각자료를 통해서 상기시키며 머릿속 표상으로 전환시킨다. 종교적 내용뿐만 아니라 다른 내용도 우린 그림에서 읽어낼 수 있다. 가령 정신분석학에서는 길쭉한 물체를 남근(Phallus)으로 읽고, 고흐의 구두는 여성의 결여된 남근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그림의 도상학적 해석이란 학문 범위 밖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 누군가는 기다란 막대가 그려진 회화를 보고 파리에서 보았던 바게뜨 빵으로 읽을 수 있고, 누군가는 학창 시절에 자신을 괴롭히던 사랑의 매를 떠올릴 수도 있다. 이처럼 그림의 해석은 다채로울 수 있으며, 개인의 경험에 따라 무수한 상징을 드러낼 수 있다. 

  나는 이 글에서 예술이 가지는 두 가지 상징성을 논하고자 한다. 나는 앞의 문장에서 예술 작품이 아닌 '예술'이란 단어를 선택했다. 그것은 예술이라는 추상적 개념과 예술 작품이라는 물질성을 동시에 함의하기 위해서 나는 예술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예술이라는 정신적 행위와 물리적 사물의 순환관계는 어쩌면 상징으로써 존재하는 것이 가장 의미 있는 존재방식일지도 모른다. 예술 작품이란 결국 허세라는 원자아와 사회적 시선에 의한 초자아의 인정욕구에 의해 만들어진 자신만의 상징이다. 그 작품이라는 상징을 통해서 현존재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고, 아무 설명 없이도 사람들이 자신의 양식을 통해서 자신을 알아보길 원한다. 이러한 예술의 사회학적 의미가 예술에 대한 상징성을 더욱 강화시킨다.

  예술이 가지는 상징성은 두 가지이다. 첫째, 그것은 인간이 사유하는 존재라는 것을 상징한다. 현대에 와서 인간에게 예술은 그저 재인식의 즐거움을 주는 수단이 아니라 사유하게 만드는 계기이자 동시에 상징이다. 이 부분은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논한 숭고와도 연관이 있다. 둘째, 예술 작품의 소유는 부의 상징이 되었다. 부자들은 자신의 부를 현금, 보석, 부동산, 자동차와 같은 재화뿐만 아니라 예술 작품을 구매함으로써 보유한다. 작품의 가격이 오르면 팔려고 하는 투기성도 물론 있겠지만, 아트 테크라는 단어가 등장한 현대에 예술작품은 하나의 재화가치로서의 상징이 되었다. 벤야민은 예술 작품의 가치가 제의 가치에서 전시 가치로 전환되었다고 말했는데, 작품이란 21세기에 전시 가치뿐만 아니라 현금과 같은 재화가치를 띄는 재산이 된 것으로 보인다.


대자존재의 전유물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일종의 인식이다. 우린 작품을 보고서 아 작품이구나 생각하며, 그다음에 저 작품은 무엇을 재현한 것이구나 혹은 뭐 저런 게 작품인가 하면서 나름의 감상평을 내놓는다. 이러한 인식과 감상은 판단력에 의한 행위이다. 어떤 보편적인 원칙이 있으면 구체적인 사례들 중에 특정의 사례가 이 보편적인 원칙의 어디에 해당하는가(부합하는가)를 알아내야 하는데, 이런 일을 하는 것이 판단력이다(WM, 206). 전자의 경우는 개별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원칙을 찾아낸 규정적 판단이다. 우리는 고흐의 그림에서 해바라기와 사이프러스 나무를 인식한다. 그것은 현실의 것과 다르게 그려지고, 매 작품마다 고흐가 다르게 표현했더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해바라기와 사이프러스 나무로 인식된다. 그래서 그 작품을 보고서 아 이것이 그것이군. 하고 규정적 판단을 내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개별적 개체에서 보편자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러한 판단은 주로 눈에 보이는 것을 재현하거나 혹은 그 의미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고전적 재현 회화를 감상할 때 이루어진다.

  이때 우린 지성으로 그림을 파악한 것이다. 내 눈에 보이는 것과 내 머릿속에 있는 지식의 대상이 일치함으로써 그 인식이 성립되고, 규정적 판단이 이루어진다. 눈으로 감각한 현상과 머릿속으로 아는 표상의 일치. 이것이 규정적 판단이며, 인간이 고전주의적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이루어지는 프로세스이다.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 - <No.5>(1948)

  특수한 개체에서 보편적인 개념을 찾는 것. 그것이 규정적 판단이며, 우리가 아는 것을 재인식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우린 모든 것을 알지 않으며, 모든 작품이 우리가 아는 것을 재현한 것은 아니다. 위의 그림에서 우린 우리가 아는 것에 대한 재현을 찾을 수 없다. 우리는 폴록의 그림에서 의미정보를 찾을 수 없다. 

  의미 정보가 미적 정보에 역전당하면서 예술은 더 이상 정보  소통의 수단이 아니게 되었고, 작품은 예술가의 정보를 전달하는 매개체가 아니라 그저 수수께끼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과 거의 관람자들은 작품이 품은 암호를 해독할 의지가 있었으며, 그것이 가능하다 여겼다. 하지만 의미 정보를 찾을 수 없는 광 활한 캔버스에 압도당해서일까, 현대의 대중은 그 암호를 해독할 의지를 가지지 않게 되었으며, 그저 예술이 사기에 불과한  것이라 생각하는 대중도 늘었다. 그래서 갈수록 추상화(化)되는 현대 예술은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갔으며, 매니악한 분야가 되었다.   

  현대 예술은 사회와의 소통을 거부한다. 왜? 소통은 ‘코드’를  전제하고, ‘코드’는 획일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획 일화 하는 동일성의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예술은 사회 안에 통 용되는 ‘코드’를 거부한다. 그 결과 오늘날의 예술은 평균적인  대중에게는 이해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이는 현대 예술이  관리되는 사회의 비인간성에 항의하는 방식이다. 고전 예술은  대중과 ‘코드’를 공유했다. 현대 예술은 일부러 그 공통의 ‘코 드’를 깨고, 다양한 형식 실험을 통해 오직 자기만의 ‘코드’를  만들어낸다. 현대 예술이 어려운 것은 이 때문이다. 왜 현대  예술은 사회에 널리 공유되는 코드를 거부하고 굳이 이해되지  않으려 하는가? 그것은 모든 것을 획일화하는 동일성의 폭력으로부터 자기의 개별성과 고유성을 지키기 위해서다. 오직 이렇게 할 때만 예술은 비인간적인 사회 속에서 유일하게 인간적인  존재로 남을 수 있다(RC, 25-26).

  그래서 결국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우리는 아는 것을 재확인하는 규정적 판단을 하는데 실패하게 되었다. 따라서 예술을 즐기기 위해선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는 그 새로운 방법을 칸트 미학의 '숭고'에서 찾았다. 우선 숭고는 미의 한 종류가 아니라 별도의 미학 영역이다. 도덕적으로 고상하고 우월한 대상을 ‘숭고’하다고 생각하는 상징적인 관념과는 다소 동떨어진 개념이다.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숭고함은 위대, 장엄 등 윤리적 맥락이고, 미학에서의 숭고 개념은 물론 위대, 장엄도 포함하지만 혐오스러운 것, 무서운 것, 섬뜩한 것들에까지 확대되기 때문이다. 숭고는 1세기 로마 시대 롱기누스가 수사학 교본에서 처음으로 언급했지만 18세기의 버크와 칸트에 의해 본격적으로 미학에 편입되었다(SA, 5-6).

  우리는 미(美)를 인식할 때 오성을 이용했다. 내가 눈으로 담은 것을 내 머릿속의 대상과 일치시킴으로써 그것이 무엇인지 판단하고 아름다움을 느꼈다. 하지만 우린 폴록, 로스코, 뉴먼의 그림을 내 눈에 담고서 내 아는 대상과 대조할 경우 일치시킬 수 있는 표상이 없음을 느끼게 된다. 이때 우리의 상상력은 좌절한다. 이때 오성은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나는 이성으로 작품을 파악한다. 이성 또한 작품에서 아는 것의 재현을 찾진 못한다. 하지만 인간은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이 이성이 있음을 깨닫고 자신의 한계 너머에 있는 대상을 상대로 용기를 가지게 된다.

  숭고란 우리가 이해하거나 제어할 수 없는 어떤 한계(limits) 앞에서 느끼는, 일단 부정적인, 네거티브한 체험이다. 이 체험은 언어로도 이미지로도 표상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그래도 언어로 표현을 해야만 한다면,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이라고 하거나 아니면 좀 더 고풍스럽게 ‘형언할 수 없는’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말하는 방식이 바로 숭고 미학이다. 그러니까 숭고의 대상은 표현 불가능한 관념이다. 미가 대상의 성질이라면 숭고는 주체인 나의 상태이다. 따라서 숭고는 자연의 사물 속에 있다기보다는 차라리 나의 심성 속에 있는 것이다(SA, 66-71).

  우린 현대 예술을 감상할 때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이 많다. 대체 왜 저런 게 예술이며, 작품인가? 예술이라는 가면을 쓰고 대중을 기만하고 사기를 치는 게 아닌가? 싶은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의심이 피어날 때 예술은 제 역할을 해냈다. 그것은 우리의 이성을 깨운 것이다. 사유하지 않고 1분 미만의 짧은 영상만 보는 현대인에게 현대 예술은 생각할 기회를 주었다.

  따라서 예술이 가지는 첫 번째 상징성은 인간을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에서 시작된다. 예술가는 창작과 그 고통에 의해서 사유를 하며, 관람자는 그 작품을 보고 자신만의 감상을 하면서 생각을 하게 된다. 따라서 예술이란 인간이 생각하고 반성하는 존재임을 나타내는 상징이자 대자존재인 인간의 전유물이다.


부르주아의 전리품

  예술은 과거처럼 종교와 정치의 그늘 아래 놓여있는 포로가 아니다. 그것은 더 이상 프로파간다로 존재하지 않는다. 벤야민의 말대로 제의 가치를 상실한 작품은 전시 가치를 가지게 되었으며, 2024년 현재는 재화 가치 또한 부수적으로 가지게 되었다. 아마 소더비, 크리스티와 같은 경매회사들의 역할이 아마 컸을 것이다.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예술가가 되기 위해 넘어야 하는 허들 또한 쓰러졌으며,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나 스타가 되지 못하며, 아무나 수백억에 자신의 낙서 같은 그림을 팔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작품이 그 가치를 진짜로 가지는 지는 모르겠는데, 전문가 카르텔로 똘똘 뭉친 시장경제가 그렇다 하면 그런 거다. 그래서 예술이라는 가면을 쓴 사물은 그저 예술가가 골랐다는 이유로 혹은 예술계가 그것을 작품으로 인정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높은 값이 매겨진다. 그래서 일상 속의 물건들과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는 아름답지 않은 회화들이 명작으로 탈바꿈하고 상상도 못 할 가격에 거래된다. 

  벽에 모나리자를 건다고 내 사업이 잘 풀리거나 내 건강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아무 기능도 없이 그저 자리만 차지하는 사물에 불과한 물감덩어리를 고가에 구매할까? 왜냐하면 작품은 더 이상 전시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경제적 지표를 나타내는 사치품이자 환금성이 있는 자산이기 때문이다. 500억의 작품을 구매한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 부자라는 것을 드러내는 경제활동이며, 동시에 그 정도 여유는 부릴 수 있다는 허세를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부자들은 영리해서 오직 가오와 겉멋만을 이유로 작품을 구매하지 않는다. 그들은 한 수를 더 내다보는 존재이기에 부르주아인 것임을 명심하자. 그들이 작품을 구매하는 이유는 자신의 경제적 과시와 예술적 허세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금괴를 금고에 쌓아 놓듯이 그림을 수집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적 약속을 통해서 빛나는 누런 광석을 금이라고 부르고, 그것에 높은 가치를 가지게 하듯이, 유명 예술가의 작품도 학계의 담론을 통해서 높은 가치를 부여받게 된다.

  그래서 예술 작품은 그저 수집품이 아니라 일종의 자산이 되었다. 그것은 마치 황금과 같이 환금성이 있는 자산이다. 과거에는 전쟁과 침략을 통해서 가치 있는 전리품을 얻어왔지만, 반전이라는 평화의 이름을 가진 경쟁 사회에서 자본이라는 승리를 취한 자는 전리품으로써 예술작품을 수집한다. 따라서 고가의 예술작품의 소유는 부르주아의 전유물이 되었으며, 그 작품의 소유가 가지는 상징성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승자라는 것과 문화예술을 즐긴다는 품격을 드러내는 것이다.


결론

  결국 예술이 가지는 두 가지 상징성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학적인 것들을 함의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활동인 반성적 판단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이성을 확인하며, 자본주의와 사회라는 거짓일 수도 있는 상호적 규약 안에서 자신의 위치와 품위를 확인하는데 예술을 활용한다. 예술은 인간이 사유하는 존재임을 보증하며, 사회를 형성한 인간의 사치와 허영을 드러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예술을 즐기고, 수집한다는 것은 원자아와 초자아의 교점이다.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며, 자신의 사회적 품위도 신경 쓴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은 사회적 존재이며 동시에 대자존재인 인간에게 상징적인 전유물이다. 나는 예술이 가지는 현대적 본질을 허세에서 찾았으며, 그것이 어쩌면 예술시장의 동력이 아닐까 싶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인정욕구와 화폐라는 약속. 어쩌면 이것이 예술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 전체를 돌아가게 하는 원동력은 아닐까. 

  예술이라는 엠블럼이 지니는 가치와 의미는 개인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예술을 누리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필연이다. 인간 존재마저 미학의 영역에서 다루고 있으며, 모든 공산품과 제품이 디자인됨으로써 그 예술성을 부여받는다. 따라서 인간에게 예술이란 영역은 떼려야 뗄 수 없을 것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것일지라도 예술이라는 라벨이 붙으면 우린 그것을 인식하고 고찰한다. 어쩌면 이 사회 자체가 미학의 영역 안에서 돌아가는 것 일도 모른다. 이러한 예술의 상징성을 독점하는 자가 어쩌면 예술계뿐만 아니라 사회라는 광의의 영역에서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Reference

박정자, 『숭고 미학』, 기파랑, 2023. [SA]

백종현, 『인간이란 무엇인가 : 칸트 3대 비판서 특강』, 아카넷, 2018. [WM]

오경수『현대미술이 어려운 이유―현대미학과 그의 변명』, 퍼플, 2024. [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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