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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JO Aug 10. 2023

06 농고 대신 상고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처절하게 경험했다.

순창에서는 더 이상 송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선택의 기로에 섰다. 남원에 있는 중학교로 진학해 운동을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순창중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할 것인지. 한동안 고민의 연속이었다. 이미 남원에서 실력을 검증(?) 받은 터라 송구를 계속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체육선생님만큼은 여전히 나의 잠재력을 인정해 주고 계셨다. 

"니는 꼭 국가대표가 될 기다." 선생님은 틈만 나면 남원으로 가셨다. 

"아닙니다. 선생님. 저는 이제 송구 그만하렵니다. " 

한동안 선생님과 옥신각신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결국 국가대표 주전공격수의 꿈을 포기하고 순창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는 집에서 10킬로 정도 되었다. 가난한 집안 살림에 매일 버스를 타고 다니는 것도 쉽지 않았다.  곧 부서질 것 같은 자전거를 싸게 한대 사서 타고 다녔다. 책가방을 매고 포장이 전혀 안되어 울퉁불퉁한 길을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도 어린 내게는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자전거가 나보다 훨씬 컸다. 

학교에서 실컷 놀고 어둑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귀신이 나온다는 무시무시한 모퉁이를 지날 때면 멀리서부터 머리가 쭈뼛쭈뼛 섰다. 미리부터 속력을 올려 순식간에 지나가곤 했는데 어떤 때는 진짜 뒤에서 귀신이 잡아당기는 듯 바퀴가 헛도는 것 같았다. 

오가는 길이 너무 힘들어 2학년 때부터는 읍내에 조그마한 방을 얻어 형과 함께 자취를 했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방이었는데 1년에 18,000원이었다. 70이 넘은 주인 할머니는 꼼꼼하고 까다로운 성격이었다. 1,500원 방세가 하루라도  밀리기만 하면 어김없이 잔소리를 퍼부어댔다.

"오늘까지 방값 안내면 나가. 알았지? 그리고 전기세 많이 나오니까 9시 되면 불 끄고 얼른 자고, 물도 적당히 쓰고." 귀가 얼얼했다. 

가난은 여전히 순창까지 나를 따라와 괴롭혔다. 방을 따뜻하게 데우기 위해 매일 시골에서 가져온 나무로 아궁이에 불을 때 저녁밥을 했다. 여전히 구석기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한테서 밥 하는 방법을 배우긴 했지만 처음에는 태우기 일쑤였다. 한 겨울 수도에서 물을 뿜어 보리쌀과 쌀을 7:3의 비율로 씻고 나면 손이 얼얼했다. 물을 적당히 붓는 것도 중요했지만 김이 나기 시작할 때부터 불 조절이 중요했다.  아무 생각 없이 불에 취해서는 안된다. 

반복의 힘. 이내 밥 도사(?)가 되었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밥을 하고 나면 방은 금세 뜨끈해졌다. 하지만 밤 새벽 두세 시가 되면 알람을 맞춰놓은 것처럼 차갑게 식어버렸다. 이불 몇 개를 뒤집어써봐도  그냥 두지 않겠다는 놀부 심보처럼 추위는 밤새 나를 부둥켜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중학교 시절 나는 영어와 글쓰기에 관심이 많았다. 영어선생님이 여자이기도 했고 또 내게 자주 칭찬을 해 주셨기 때문에 더욱 영어를 좋아했다. 그리고 이다음에 크면 나도 영어선생님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얼마 후 형은 전주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했는데 나도 형처럼 전주로 유학(?)을 가고 싶었다.  

고등학교 입시가 시작되었을 즈음 아버지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우리 집 사정을 니도 잘 알제, 너를 인문계 학교에 보낼 형편이 안된다형 하나도 힘드니 너는 농고를 가거라, 장학생으로 갈 수 있으니까. 경운기도 중고로 좋은 거 한 대 사 줄 테니’. 하늘이 노랬다

순창을 떠나고 싶었다. 여전히 6.25 전쟁 직후처럼 가난에 찌든 이곳. 여기에 있다가는 일만 하다 죽을 것 같았다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술만 드시면 아버지는 신세한탄 하듯 말씀하셨다. "나는 둘째로 태어나 초등학교도 못 가봤어. 그래도 여기저기 다니면서 글도 다 띠고 한자도 배우고, 침도 배웠다. 공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마지막 말씀은 항상 '예절 바른 사람, 정직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다. 

큰 아버지는 육군대위로 복무하시다가 6. 25. 전쟁 때 이마에 총을 맞는 부상을 입고 전역을 했다고 했다. 나는 늘 큰 집이 부러웠다. 우리 집에 비해 월등히 잘 살았기 때문이었다. 논도 우리보다 훨씬 많았고 2남 6녀로 식구들도 많았지만 일도 거의 하지 않았다. 내가 전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원호대상자이셨던 큰아버지의 약을 타기 위해 자주 보훈병원을 가곤 했었다. 그렇게 둘째라는 이유로 당신도 초등학교도 가보지 못하셨는데 어떻게 농고를 가라고 하실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무섭기만 한 아버지에게 감히 전주에 있는 고등학교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어렸을 적 술에 취해 물건을 던지고 어머니에게 화풀이를 할 때마다 큰 집으로 피신한 적도 많이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심기를 거었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전주상고에 가겠다고 말씀드렸다. 어차피 상고도 돈이 들지 않는다고 아버지를 설득했다. 어쩐 일인지 아버지는 흔쾌해 주셨다. 돈이 안 들어간다는 것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바라던 대로 우리 집을 탈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상고진학은 두고두고 후회스러운 선택이 되었다상고의 교과과정은 전혀 나의 적성에 전혀 맞지 않았다내가 입학하기 몇 년 전까지는 꽤나 명성이 있었고 많은 선배들이 좋은 대학도 갔고은행에도 취직을 많이 했었다그러나 나에겐 생소했다특히차변이니 대변이니 하는 용어가 나오는 '상업부기'란 과목은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멀었고주산 역시 쉽지 않았다. 3학년이 되어 취직을 하기 위해서는 주산부기 모두 2급 자격증이 필요했는데 친구들은 2학년 때 대부분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나는 3학년 2학기가 되어서야 겨우겨우 자격증을 땄다그때 시험에도 떨어졌으면 대리시험이라도 부탁해 볼 정도로 마음이 급했다.  비록 적성에는 맞지 않았지만 시험 때만 되면 밤을 새워 공부한 덕분에 성적은 항상 반에서 1,2등을 내주지 않았다. 

3학년 2학기가 되니 하나둘씩 친구들의 취직 소식이 들렸다나도 운 좋게 증권회사 추천을 받아 시험을 봤지만 보기 좋게 낙방하고 말았다. 합격은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떨어지고 보니 어디에서도 낯을 들 수 없었다. 내게 고등학교 3년은 내내 방황의 연속이었다

아버지가 술을 너무 좋아하셨기 때문에 나는 금요일만 되면 댓 병 소주를 사 매주 집으로 가야 했다. 그 소주를 과일주로 담겠다고 부어 놓으면 그다음 날 이미 바닥이 보일 정도로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다. 3학년 2학기나는 늘 나의 선택을 후회하고 현실에 절망했다내게 어울리지 않음을 알면서 껄렁껄렁한 친구들을 따라다니며 담배를 피우고 술도 마시며 일탈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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