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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JO Jul 22. 2023

01 서른에 멈춘 시계

눈을 떴다. 마취 주사를 맞은 듯 정신이 몽롱했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는데 넋 나간 로봇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고속도로 사고였다. 

나는 신태인 고속도로 1차로에 훈련소 신병처럼 납작 널브러져 있었다. 다시 한번 힘겹게 머리를 들어 움직여 보았다. 괘종시계처럼 딸깍딸깍 좌우로 조금씩 움직였다. 이마에 흘러내린 피가 아스팔트 위로 뚝 떨어졌다. 느낌상 뇌는 이상이 없는 것 같았는데 순간 잠이 들었다. 

아스팔트에 부딪히는 억센 바퀴 소리가 나를 깨웠다. 이어 반장님이 나를 일으키며 ‘눈 떠, 눈 떠 봐, 여기서 자면 죽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이제 겨우 서른. 갓 공무원에 임용된 지 이제 3년 차. 

오랜만에 전주 한솔제지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어제 백화점에서 산 조끼가 달린 갈색 양복을 입었다. 평소 꾸물거리던 단추들이 신이 났는지 한 번에 제자리를 잡고 출근 준비를 했다. 행여 가을에 방해가 될까. 조수석에 살며시 앉아 하늘을 보았다. 겨울에 태어났으니 스물아홉 번째 가을 하늘이다. 거울처럼 맑은 하늘 속에 멋진 신사가 앉아 있었다.      

출발. 쏜살같이 청사를 뒤로하고 고속도로를 질주했다. 가을인데 어디서 그렇게 많은 햇살이 순식간에 내게로 쏟아지는지 눈이 부셨다. 어렸을 적 돋보기로 햇볕을 있는 대로 끌어모아 종이를 태워보려고 애쓰던 기억을 하며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오늘 운전은 슈마허. 불리는 반장님이다. 부웅붕 출발도 하기 전에 벌써 작은 봉고차는 잔뜩 겁에 질렸다. 100킬로가 넘는 슈마허의 온 힘이 오른 발바닥으로 모여지는 게 나한테도 전달됐다. 아! 이 양반은 왜 우리 회사에 들어오셨나? 세계 자동차경주에 나갔어도 손색이 없어 보이는 질주 본능이었다. 

운전석과 조수석을 제외하고 차 안은 일독을 마친 신문들로 아우성이었다. 신문들이 밀어내는 힘으로 차 위쪽이 볼록해졌고, 양옆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출렁거렸다. 죽음을 무릅쓰고 탈출을 결행한 무기수처럼 숨을 헐떡거리며 사방으로 뛰어나가려고 야단이었다. 다 본 신문들을 가지고 가서 복사지로 교환하는 출장이었다.


갑자기 정장이 부담스러웠다. 이런 막노동(?) 출장에 정장이라니. 정신 나갔나 보다. 역시나 먼지는 좀 쌓였어도 민방위복이 제격이다. 정말 그랬다. 물품 업무를 맡기 전 근무한 기록보존계에서 민방위복을 걸치고 종일 작업한 기록들을 하역 인부처럼 둘러메고 계단을 오르곤 했는데 참 편했다.         

어디쯤 가고 있었을까?

갑자기 ‘악’하는 슈마허의 비명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본능적으로 고속도로 사고임을 직감했다. ‘내가 여기서 이렇게 죽는구나’하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숙였다. 지난 기억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아버지가 생각났다. ‘이렇게 갑자기 죽으면 안 돼. 이건 세상에서 가장 큰 불효야.’ 어렸을 때는 너무 무서워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했던 아버지. 아버지는 늘 술에 취하시면 삼 형제를 불러놓고 일장 연설을 하셨다. 

‘공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여. 예절 바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신 얘기를 또 하고 또 하고, 무릎이 저려 코에 침을 있는 대로 발라도 아버지의 말씀은 끝이 없었다. 행여 집에 오셨다가 돌아가시는 어르신을 대문 앞까지 따라가 인사하지 않았다고 세 시간에 걸쳐 당신의 격정적인 삶을 풀어놓으시며 야단치시던 아버지. 초등학교 근처도 가시지 않았지만 스스로 한글과 한문을 깨우치시고 침술을 익히셨다. 아버지의 회갑 잔치가 가까워오자 나는 미련 없이 5년 동안 계속된 대학 입시 준비를 포기하고 은행에 입사했다. 아버지는 내가 은행을 퇴직하던 해 고혈압으로 쓰러지셨다.           

무거운 신문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던 오른쪽 뒷바퀴 하나가 갑자기 떨어져 나갔다. 순간 슈마허가 중심을 잃고 핸들을 중앙분리대 쪽으로 돌렸고 분리대를 들이받은 차는 1, 2차선 중간에 내동댕이쳐졌다. 안전벨트를 메지 않았던 나는 그 반동으로 앞 창문을 뚫고 나가떨어졌다. 중앙분리대와 사이좋게 개구리처럼 납작 뻗어 있었다. 


다시 슈마허가 내 따귀를 갈기며 말했다. “눈 떠, 눈 떠, 자면 안돼. 죽어”얼마나 소리가 컸는지 순간 소름이 돌았다. 여기저기 피범벅이었다. 머리 곳곳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무릎이 깨졌다. 그렇지만 이내 기억은 또렷했다. 슈마허의 따귀 때문이었는지 긴가민가 했던 뇌가 정신을 차린 것처럼 전성기 때의 좋은 느낌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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