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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JO Jul 25. 2023

02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슈마허의 목소리에 비례하여 따귀의 강도는 점점 더해갔고 나는 ‘괜찮다’고 말할 틈도 없이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었는지 도로 한가운데 서서 손을 흔들며 지나가는 차를 세우려고 했다. 버스와 트럭 몇 대가 1차선으로 달려오다 급하게 차로를 바꿔 3차로로 피하며 지나갔다. 그의 손짓에도 아랑곳없이 몇 대가 더 지나간 뒤에야 우리 차와 똑같은 봉고차가 멈춰 섰다. 슈마허 님은 잽싸게 나를 안아 차에 태웠다.      

슈마허의 애원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반 죽어가는 신음 소리를 내며 '살아 있음'을 알렸다. 그것이 오히려 더 그를 걱정스럽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그래, 그래 여기서 잠들면 안 돼’를 연발했다. 속으로 계속 대답하고 있었다. ‘나도 잘 알아요, 참 곤란하네, 아픈 곳은 많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에요, 그래도 뇌도 다치지 않고 정신 온전하니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돼요’. 


더 이상 버티면 안 되는데. 언제까지 이 뺨을 견딜 수 있을까? 슈마허 님은 운전자에게 환자가 매우 위중한 것 같으니 최대한 속력을 낼 것을 부탁했다. 여차하면 자신이 운전대를 잡을 기세였다. ‘아닙니다. 천천히 가도 됩니다. 안전이 우선입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더니 슈마허보다 더 빨랐다. 세계 1, 2위가 이 차 안에 탄 듯했다. 화가 났다. 이러다 병원에 가기 전에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과속인데. 나에게는 세 번 진실을 고백할 기회가 있었지만 번번이 때를 놓쳤다.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했는데…….     

얼마나 과속을 했는지 예상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했다고 운전자는 의기양양했다. 그분처럼 고속도로를 달리다 멈추고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을까? 존경스러웠다. 어찌 되었든 ‘고맙다’고 했어야 했는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3년 전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수술을 받았던 그 병원 응급실이었다. 아버지가 누우셨던 그 침대라고 생각하니 정신이 맑아지고 따뜻했다. 편안히 누워 보니 여기저기 사고의 흔적들이 보이고 느껴졌다. 무릎이 심하게 까졌고, 엉덩이와 머리도 여러 곳에서 엄지손톱만큼씩 살점이 떼어져 나갔다. 여전히 의식불명인 것처럼 누워 있었다. 


갑작스러운 환자에 응급실에 생기가 돌았다. 지금이라도 괜찮다고 말할까? 잠시 망설이는 순간 또 타이밍을 놓쳤다. 어금니를 굳게 물고 있는데 서너 명의 간호사들이 왁자지껄 몰려왔다. 이내 나를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들게 만든 그녀들의 수군거림. “이번에는 네가 한번 해봐, 의식 없는 것 같으니까 겁내지 말고 맘 놓고 해 봐.” 실눈을 뜨고 봤더니 실습 간호대생 명찰이 보였다. 실습생은 전혀 겁내지 않는 것 같았다. 약간은 힘이 들어간 내 왼쪽 팔뚝을 아무렇게나 거칠게 잡아끌고 대뜸 주사기를 들었다. 살려면 진실을 고백해야 한다. ‘저....' 가 나오기도 전에 앙증맞은 주사기가 내 혈관을 찾느라 주춤주춤 끙끙거렸다.     

허리춤에 양손을 얹고 바라보던 간호사가 말했다. “아니, 잘못했잖아, 다시 해봐.” 맙소사! 내 팔뚝은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빨간 피가 엉금엉금 기어 나오고 있었다. 몇 번이고 주사기를 찔렀다 뺐다 하는 느낌이었다. ‘성공’이라고 했다. 실습생이 눈물 나게 고마웠다. 다음은 CT 촬영실이었다. 오는 내내 괜찮은 느낌이었지만 정말로 이상이 없을지 긴장이 되었다. 

결과는 ‘이상 없음’이었다. 정말로 다행이었다. 여기저기 외상이 있는 곳에 응급처치를 하고 광주로 향했다. 뇌에 이상이 없어 굳이 이 병원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뇌진탕 등 4주 진단이 내려졌다. 

죽지 않았을 뿐인데 태어나 가장 큰 효도를 했다고 생각했다.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파손된 봉고차는 죄인처럼 폐차장으로 끌려갔는데 그 후 소식은 모른다. 큰맘 먹고 장만했던 정장이 못내 아쉬웠다. 내 몰골처럼 곳곳이 찢겨 나가 더 이상 입을 수가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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