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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JO Aug 07. 2023

04 이놈아, 제발 공부 좀 해라

나는 1967년 전라북도 순창에서 오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순창은 고추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예로부터 물이 좋아 장류가 발달했다. 우리 마을은 순창에서도 버스를 타고 25분을 더 가야 나오는 산골 마을이었다. 마을 앞에는 국민학교가 있었는데 학생 수 부족으로 폐교된 지 오래되었다. 마을 뒤편으로 팔 명당이 있고, 뒤로는 큰실봉과 작은실봉이 큰집, 작은집처럼 정답게 마주하고 있다. 

한때 120여 가구나 되었던 융성했던 마을이 지금은 열 서넛 가구이고 7, 80대 어르신들이  대부분이다. 회관 앞에는 당산나무 한그루가 있는데 이제는 지팡이를 짚어야 할 것처럼 노쇠하여 내가 가끔씩 가는데도 잘 알아보지 못할 때가 있다.     

너무 가난이 슬퍼 태어날 때 울었던 것 같다. 가난 때문에 어린 시절은 그야말로 지옥 같은 일의 연속이었다. 나를 유년을 송두리째 뺏어간 일들.


첫 번째는 소 풀베기다. 시골말로는 ‘깔’ 베러 간다고 했다. 소가 먹는 밥의 주재료가 ‘깔’이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기 무섭게 곧장 조선낫과 외낫 한 자루를 날카롭게 갈고 나보다 큰 망태 하나를 어깨에 메고 들로 달음박질했다. 당시 소는 우리 집에서 제일가는 재산이었다. 매년 새끼를 한 마리씩 낳곤 했는데 그럴 때면 집안의 큰 경사였다. 다른 집도 모두 소 한 마리는 키우고 있어서 조금이라도 더 빨리 깔을 한 망태 가득 베려면 늘 서둘러야 했다. 서로 경쟁적으로 깔을 베니 가까운 곳은 잔디를 깎은 것처럼 늘 깔끔해서 동네에서 점점 먼 곳으로 가야만 했다. 한두 시간에 걸쳐 깔을 베어 망태 한가득 꾹꾹 눌러 담아 돌아오는 길, 늘 어둑해진 들녘은 나의 친한 친구였다.  


집에 돌아오면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황소가 저녁밥을 기다렸다. 서둘러 쇠죽을 끓여야 했다. 작두로 갓 베어온 싱싱하고 푸릇한 깔을 먹기 좋은 크기로 썰고 이미 썰어놓은 짚과 반반씩 솥에 넣은 다음 물 서너 양동이를 붓고 아궁이에 불을 때기 시작했다. 유일한 친구인 라디오를 켜면 ‘마루치 아라치’가 방송되는 시간이다. 노래에 맞춰 부지깽이로 솥뚜껑을 탁탁 두드린다. 수증기가 솥뚜껑을 비집고 새어 나오면 사료를 한 바가지 퍼붓고 젓기 시작한다. 조바심이 난 황소가 아무리 쳐다봐도 아직이다. 10분을 더 끓이면   맛있는 저녁밥(?)이 완성된다. 쇠죽을 양동이에 가득 담아 구유에 부어주면 앞발 뒷발을 차고 고개를 흔들며 고맙다고 난리다. 추운 겨울이면 쇠죽을 끓일 때마다 알루미늄 양동이에 물을 담아 쇠죽솥에 넣고 데웠다. 양동이에 담긴 뜨거운 물에 찬물을 더해 아버지부터 차례대로 씻곤 했는데 내 차례가 오면 뜨거운 물은 거의 없었다. 매일 책 한 장 읽을 시간도 없이 지쳐 쓰러져 잠이 들었는데 그럴 때 마다 내일은 절대로 해가 뜨지 않기를 기도했다.  

    

두 번째는 나무하기다. 

석기시대처럼 오직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방을 따뜻하게 해야 했기 때문에 가을 추수가 끝날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겨울을 나기 위한 나무를 해야 했다. 

‘나무’에는 크게 가리나무(소나무 잎)와 끌텅(나무를 베고 난 밑동), 그리고 잎은 떨어진 채 나무에 엉거주춤 붙어 있는 마른 나뭇가지가 있었다. 깔과 마찬가지로 나무도 온 동네 사람들이 하기 때문에 거의 전쟁을 방불케 했다. 친구, 형들 몇 명이 함께 지게를 지고 동네로부터 더 먼 곳으로, 더 높은 산으로 올라갔다. 높고 험하고 경사가 심한 곳일수록 나무가 많았는데, 그런 곳을 발견하면 마치 산삼이라도 본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신속하게 내 구역을 정해 놓고 낫으로 바닥을 깨끗하게 다듬어 놓은 다음 나무에 올라 낫으로 마른 가지를 자른다. 원숭이처럼 날렵하게 이 나무 저 나무로 옮겨 다니며 마른 가지를 잘라 사각으로 넓게 쌓은 후 이번에는 갈퀴로 가리나무를 긁어모은다. 어른 베개보다 약간 크게 직사각형 모양으로 한 아름씩 정성껏 각을 낸 다음 펴 놓은 나뭇가지 위에 차곡차곡 쌓아 올린 다음 다시 둥그렇게 나뭇가지를 대고 새끼줄로 묶으면 드럼통 5개 크기의 둥그런 가리나무가 완성된다. 우리는 그것을 ‘한 동’이라고 했다. 잠시 땀을 닦고 숨을 고른 후 한 동을 지게에 지고 집으로 향하는 길. 턱턱 숨이 막히고 잠시 식었던 땀방울이 다시 힘을 냈다. 나 혼자 산속 너무 깊은 곳으로 들어가 길을 잃고 헤매다 울던 일, 욕심에 내 키보다 몇 배를 지고 오다가 넘어져 데굴데굴 굴러 넘어졌던 일…. 서서히 나무하기의 달인이 되고 있었지만 하루가 멀게 공부와는 멀어지고 있었다. 가난이 원망스러웠다. 학교에서 놀거나 집에서 책 읽고 지내는 친구들을 보면 한없이 부럽기만 했다.    

  

세 번째는 담배 농사다.

담배 농사는 내가 해본 일 중 단연 극한이었다. 봄이 오면 우선 밭을 갈아 도랑을 만들고 비닐을 씌운다. 비닐에 조그맣게 구멍은 낸 다음 어린 모종을 심고 둥그렇게 흙을 살살 덮고 갓난아기 트림하라는 듯 탁탁 몇 번 두드려 주면 첫 단계가 끝난다. 몇 번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나면 어느새 나보다 더 크게 자란다. 비닐 아래쪽 고랑에 탐욕에 가득 찬 잡초들이 진을 치기 시작하면 이미 30도가 넘는 한여름이다. 뙤약볕이 쨍쨍 내리쬐는 여름날 그 잡초를 베어내는 일은 어린 내가 감당하기에는 실로 힘에 겨웠다. 담뱃잎에 묻어 있는 진드기며 끈적한 액체가 머리부터 온몸에 달라붙어 머리를 감아도 그 끈적하고 기분 나쁜 느낌은 며칠이 갔다. 노랗게 담뱃잎이 익으면 그때 잎을 따게 된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모종 하나에 부채 크기만 한 담뱃잎이 10장 넘게 달리는데 잎이 상하지 않도록 정성스럽게 딴 후 지게에 지고 담배를 엮기 좋은 그늘 아래로 가지고 간다. 그런 후 온 식구가 나무 밑 그늘에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아 약 5미터 길이로 한 잎 한 잎 엮은 다음 다시 집으로 가지고 지고 와 그늘에 매달아 말린다. 시간이 지나 갈색을 띠며 바삭하게 마르면 어느덧 겨울이 온다. 이제부터 아버지의 시간이다. 아버지는 잘 마른 담뱃잎을 내다 팔기 위해 한겨울 밤을 새워 가며 묶음을 만들었다. 그러고 봄이 되면 시장에 내다 팔았다.    

  

매일 아침 일어나는 것이, 해가 뜨는 것이 두려웠다. 아침과 해가 마치 아버지 어머니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내게 소원이 하나 있었다면 부모님에게 한번이라도 ‘이 놈아, 제발 공부 좀 해라’는 말을 듣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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