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피서 방법은?
한낮의 햇볕이 너무나 강렬해 세상 모든 것을 하얗게 표백해 버린 듯한 풍경이었다. 그야말로 작열하는 햇살은 대지에 내리 꽂혔고, 도시 골목을 돌아다니던 길고양이들 마저 햇살을 피해 그늘 속으로 도망간 듯 거리엔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맨 몸으로 더위를 이겨냈을 터프가이들도 요즘은 양산 없이 돌아다니기 힘들 정도의 레이저 같은 햇살이 오늘도, 저 하늘 위에서 대지를 쪼고 있다.
너무나 파랗다 못해 투명하게 하얘진 것 같은 하늘에 초신성 폭발하듯 떠있는 태양. 모든 게 한층 더 밝아진 사물. 실시간으로 타버릴 것 같은 피부. 여름이 이렇게까지 뜨거워진 적이 있었나- 이것도 기후 변화일까 생각하며 나는 창가에 서 있었다.
어떻게 하면 한여름을 잘 보내야 할지 모르겠다.
밖을 나가서 산책이라도 하고 싶은데, 습도라는 놈은 사람의 스트레스와 불쾌감을 최고조로 끌어내기에, 오늘 같은 날 산책을 나갔다간 내가 힐링을 하러 나온 건지 셀프 킬링을 하러 나온 건지 모르겠다며 기력이 빨린 채 집으로 돌아와 바닥에 쓰러져 버릴 것 같았다.
결국 안전을 위해서 집에 있기로 한다. 여름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겨울의 차가운 냉기는 정신을 바짝 차리게 만들며 좀 더 뽀송한 느낌, 크리스마스의 설렘, 포근한 것, 코코아, 목도리, 핫팩, 펑펑 내리는 눈처럼 그나마 낭만적인 것들과 연관이 있지만 '여름'하면 생각나는 것들은 바다, 수박, 더워, 더워, 더워... 같은 느낌뿐이라 나는 계절 중 여름을 가장 견디기 힘들어한다.
다행히 우리는 직장인이기 때문에, 사무실에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며 일할 수 있지만 주말은 각자 더위를 해결해야 하기에 안심할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뜨거운 우롱차를 내려놓고 시원하게 먹을 수 있을 때까지 식혀두기로 한다. 우롱차를 내린 것뿐인데 집안의 습도가 10%는 더 상승한 것 같다.
내친김에 요리를 하기로 한다. 여름 맞이 음식을 준비하기로 했다. 우선 장마가 다가오면 쉽게 물러질 수 있는 감자와 양파를 꺼낸 뒤, 감자 냉수프를 만들었다. 뜨거울 때 먹어도 되지만 차갑게 식혀 먹으면 더욱 맛있는 별미이다.
두 번째로 무생채를 만들었다. 냉장고에서 돌아다니는 반쯤 잘린 무를 꺼내 껍질을 벗기고 얇게 슬라이스 해서 잘랐다. 고춧가루와 소금, 멸치액젓 등으로 간을 해두고 잠시 익어가도록 식탁 위에 놔둔다. 그 사이 떡갈비와 함께 먹을 깻잎을 씻고, 양배추를 자른다.
세 번째 요리는 양배추찜이다. 양배추를 힘껏 잘라 여러 등분으로 나눈 뒤, 찜기에 올렸다. 그리고 한 양배추 덩어리는 얇게 잘라 나중에 토르티아를 만들거나 케첩과 마요네즈를 둘러 샐러드로 먹을 수 있도록 잘라두었다. 여름에는 일단 더운 불을 켜고 요리를 하는 것 자체가 귀찮기 때문에 바로바로 냉장고를 꺼내 먹을 수 있도록 소분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네 번째로는 여름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수미 감자 몇 알을 골라, 냄비에 넣고 삶았다. 찐 감자를 선풍기 앞에서 먹으면 생각보다 엄청 맛있고 풍미를 느낄 수 있다. 찐 감자는 뜨거울 때 껍질을 벗긴 뒤, 냉장고에 넣어두면 나중에 매쉬포테이토를 하거나 다른 감자 요리에 사용하기에도 용이하니 기왕 더울 때, 미리 삶아두었다.
빠르게 요리를 하고 시간을 보니 아직 오전이 채 가지 않았다. 햇살은 아침 6시~7시 사이부터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저녁 8시까지 거뜬히 온 대지를 강렬하게 내리쬔다. 태양이 너무나 이글거려서 아직 12시나 1시쯤인가? 하고 시계를 보면 5시나 6시쯤일 때가 많았다.
그러고 보니 베란다에서 이 작열하는 더위를 견디고 있을 꽃들이 생각나 발걸음을 옮겼다. 역시 꽃잎의 색깔은 시들어가고 있었다. 촤아아하고 정성스럽게 물을 뿌리면서 잠시 멍을 때렸다.
어떻게 하면 여름을 잘 보내야 할까.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을까. 하지만 도서관에 가는 길에 이미 더위로 지쳐 짜증이 날 것 같았다. 수영을 배울까. 하지만 수영복을 입고 그곳에서 샤워를 하고 다시 머리를 말리고 돌아오는 것은 상상만 해도 귀찮았다.
언젠가 수영을 잘할 수 있도록 배워야지 배워야지 하고 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듯하다. If not now, when?이라는 어느 회사의 광고문구가 떠올라 나를 압박하지만 그냥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오늘은 아니야..' 하고 다른 취미를 생각해 본다.
바다에 갈까. 하지만 여름에 바다를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일단 모래사장 자체가 이글이글한 태양에 달궈져, 그곳에 들어가는 사람은 소금구이 위에 올라간 새우의 심정을 알게 된다. 또한 바닷가 놀이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도 아니라 패스했다.
아무래도 집에서 혼자 운동을 하는 것이 가장 좋아 보인다. 그리고 여름을 위한 요리를 하고, 가끔 도서관에 가는 것. 저녁에 해가 늦게라도 떨어지면 산책을 가는 것. 아침에 일찍 일어나 햇살이 세상을 상대로 힘을 과시하기 전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조금씩 하는 것. 역시 별 수 없군- 생각하며 메모장에 이런저런 생각을 써 내려갔다.
여름을 잘 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최근 다큐멘터리에서 본 기후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지구온난화 현상이 점점 심해지며 지구의 온도가 1도 올라감에 따라 대기 중의 수증기양이 많아지게 되는데 이는 날씨가 난폭하게 변할 수 있는 에너지가 되어, 점점 더 허리케인, 가뭄, 홍수, 우박 등의 이상현상이 잦아지게 된다고 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해류와 에너지의 흐름은 일정한 규칙이 있었지만, 지금은 에너지가 여기저기서 맴돌아 열화상 카메라 같은 것으로 지구를 보았을 때 난장판 같이 변한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북극곰의 눈물이 곧 인간의 눈물로 변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살인적인 여름 날씨가 앞으로 점점 더 강해지면,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두툼한 방호복을 입고 여름의 거리를 돌아다니는 인류? 날씨 이상현상을 막기 위해 대기 중에 인공 날씨 생성을 위한 투명한 돔을 설치한 인류? 일론 머스크의 화성 이주 계획?
무엇이 됐든 간에 향후 5년 혹은 10년 안에 지구에 많은 것들이 변할 것 같다. AI의 발전, 이상기후, 생명과학 같은 키워드가 앞으로 지구인들의 최대 관심사가 될 것이다.
이렇게 된 마당에 여름뿐만이 아니라,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앞으로 인간의 노동이란 것이 의미가 있을까? 내일 당장 세계의 종말이 다가온다면 난 무엇을 할 것인가.
앞이 보이지 않을 땐, 뒤를 봐야 한다는 말이 있다. 과거를 돌아보니 지구에서 일어난 대멸종의 시기에 살아남은 개체들은 이런 특징들이 있었다.
첫째, 변화할 것
둘째, 운이 좋을 것
그래서 일단 우리는 변해야 한다. 직업도 정신도 변해야 한다. 운이 좋아야 하는 건 사실 달리 방도가 없으니 넘어간다. 그리고 나는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늘려야 하고,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대재앙을 다룬 영화를 봐도 가장 끈끈한 것은 가족의 사랑이듯이. 현재를 의미 있게 보내고, 나와 가족을 사랑하기. 그리고... 느슨하게 살기.
세상살이를 돌아보면 그 시대에 중요하게 생각했던 이념, 가치관들이 지나고 보면 크게 의미가 없거나 오히려 새로운 보통의 기준이 생기면서 과거 이념이 이상해 보이는 시기가 찾아오게 된다.
그래서 사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직업을 갖고 있고, 또 '열심히 살아야 한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이는 지금 시대에만 공유되는 가치관일지 모른다.
언젠가 인공지능과 로봇이 우리의 일을 대체하게 된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노동은 신성한 밥벌이이자 힘든 일이 아니라, 인간의 무료함을 달래주는 놀이라는 개념으로 변할 수 있다. 코로나 시기 전후로 new normal (새로운 보통) 이 생겨났듯이, 노동이든 뭐든 공유되는 가치관이 순식간에 바뀔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일단 나는 일을 느슨하게 하려고 한다. 느슨하게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언젠가 인공지능이 나보다 일을 잘하게 된다.
2. 느슨하게 하면 오히려 효율성이 증가한다.
3. 열심히, 빠르게 해야 한다는 생각은 비효율을 부를 수도 있다.
실제로 나는 회사에서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동시에 맡고 있는데, 이것 저것 하면서 멀티태스킹이랍시고 다양한 업무를 번갈아 진행하였더니 오히려 A에서 B업무로 전환에 걸리는 에너지 소모가 상당했고, 이는 곧 멀티태스킹이 아니라 산만한 상태가 되어 평소보다 빠르게 집중력이 고갈된 적이 있다.
그때부터 욕심을 내려놓고 한 번에 한 가지씩만 하자, 나머지 것들이야 늦어지든 말든 나는 하나만 판다-라는 생각으로 업무에 임했더니 생각보다 하나씩 하나씩 처리하는 것들의 걸음이 더 빨랐다.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내가 저기까지 빨리 가야지, 다 가져야지! 생각하는 손에는 많은 것들이 기대만큼 잡히지 않는데 그저 천천히 사부작 움직이는 사람에게는 생각보다 많은 것이 들어오게 된다.
이는 절대 법칙은 아니지만 경쟁사회가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는 숨겨진 이스터 에그 같은 사실이며, 어쩌면 우리는 돈을 벌지 않고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지만 돈을 위해 인생의 많은 부분을 포기하고 있는지 조차도 모르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우리에겐 이 여름 속에서 자아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선풍기 앞에 누워 찌르르 거리는 매미 소리와 함께. 어차피 더운 날 특별히 갈 곳도 없으니 내친김에 나와 친해지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