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나는 그에게 오늘까지 생각 정리를 하고 이야기해 주겠다고 했다. 퇴근을 하고 그의 집으로 곧바로 갔다. 어느 때와같이 현관문을 열었을 때는 저녁밥의 향기와 가정의 온기가 풍겨왔다. 마지막이라 생각해서일까, 그의 집으로 퇴근을 할 때마다 그런 온기를 배경으로 한 채 나를 보며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는 쌤의 얼굴들이 첩첩이 떠올랐다. 수고했다고, 잘 다녀왔냐며.
그 포근한 환영에 대해 지친 눈빛과 침묵으로 응했던 지난날들의 나의 모습도 같이 되살아났다. 새벽같이 출근해 힘겨운 교통체증을 겨우 뚫고 온 사람을 집에서 하루종일 낮잠 자고 게임하는 네가 이해는 할까.
그럼에도 그 인사를 아침, 밤으로 수십 년 반복했을 엄마가 떠올라 마음 한편이 다시금 아렸다.
엄마의 모습이 눈앞을 스치자,
나에겐 하루의 지침 속에 친절과 따스함까지 베푸는 여유가 없는 사람인데, 이 관계를 강요당함으로써 자꾸만 못난 스스로가 미워지는 이 상황이 싫었다. 미안한 마음을 짊어진 삶은 비비탄 총을 맞으면 얼마나 아픈지를 알면서도 계속 쏘는 것, 그래서 스스로에게 쏘는 것 그런 것이다.
그래서 마음을 강하게 먹고 전해야 할 말을 꼭 하고야 말겠다 다시 한번 다짐했다.
나는 늘 내 자리였던 거실의 나무 의자에 앉았다.
“You cut your hair?” 그가 물었다.
“Uh, yeah.”
“I like it.”
“Thanks. 연구실 다녀왔어?”
“어.”
“실험은 잘 되어가고?”
“응. 그냥 뭐 똑같아.”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한참을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것마저 끝나버리자 퍽 긴 침묵이 있었다. 그는 내게 차를 권했다. 나는 받아 마시지 않고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그니까 우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잖아. 우리 관계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중요해?”
“응.”
“이름을 붙이면 우리에게 부여되는 역할도 달라져?”
“꼭 그런 건 아닌데.”
“나는 관계의 이름에 따라 마땅히 따라야 하는 것들이 생기는 것은 싫어. 이 관계가 내게 의미 있고 소중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너에게 어떤 친밀감의 의무를 갖고 싶지 않아… 아니, 가질 수 없어.” 그는 말없이 식어가는 찻잔에 시선을 고정했다. 나는 계속 말했다.
“어떤 연락의 의무감을 느끼고 싶지도 않고. 어떤 부자연스러움으로 오히려 멀어지는 것도 원치 않아. 이름을 붙인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이름이 없다고 달라지는 것이 없고.”
그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있었다.
“너 말대로 달라지는 것이 없는데 왜 붙여주지 못하는데?” 그가 마침내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와 눈이 마주치게 될 것 같자 이번에 내가 바닥으로 시선을 떨궜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다 느꼈다. 또 한 번의 침묵 후 나는 입을 열었다.
“미안. 나는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주지 못할 것 같아.” 나는 여전히 시선을 아래로 고정시킨 채 말했다.
그러자 그는 주저 없이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바로 이 집에서 나가 주었으면 좋겠어.” 어렵게 시선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퍽이나 괴이한 광경을 목격했다. 그때 그는 이 말을 하며 웃고 있었다.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놓은 사람 마냥 입을 벌린 채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그런 웃음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괴리가 참으로 소름 돋는 것이었다.
“왜.. 웃어?”라고 물어보자, 그는 간신히 웃음을 멈추려 하며 말했다.
“나에게는 이상한 습관이 있어. 너무 슬플 때 오히려 웃음이 나와.” 나는 지금 아픔이 많은 자의 정신 승리를 목격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실제로 의학적 증세를 의미하는 걸까? 영화 조커에 나오는 해피처럼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신체 정신적 반응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그런 걸까? 어찌 생각할 줄을 모른 채 그의 힘겨운, 한편으로는 묘하게 흥겨운 웃음을 지켜보았다.
“그래 그럼 나는 가볼게.”라고 말하며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나며 가방을 챙겼다. 그도 빠르게 일어나며 역까지 데려다주겠다 했다. 이날 그를 만나기 직전에 나는 머리를 싹둑 잘랐다. 그리고 아무래도 이것이 문제였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왔는데 어떻게 돌아왔는지 그 길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에도 지하철 환승을 할 때에도 나의 모든 정신은 쌤에게 가 있었다. 그가 이긴 건가.
“나는 내가 이겼다고 생각해. 내가 더 사랑함으로써. 그들은 그들을 이렇게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거지만 나는 나를 별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잃은 것이니.” 그가 했던 말이 계속해서 생각났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나는 억울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관계에 임하지 못했다고 해서 이것이 사랑이 아니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결국 연애관계라는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면 나의 동반은, 나의 존재는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었던 걸까.
나는 그를 복잡하게 갈기갈기 찢겨 하루하루 살아내는 한 인간으로서 사랑했다. 하지만 정신이 어딘가 완전하지 않은 그를 나의 친구로서 혹은 나의 애인으로서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은 티끌도 없었다. 불온한 그를 옆에서 지켜보는 것 만으로 나는 많이 다쳤다. 마지막으로 그의 집에서 나오는 길에 현관에 있는 그의 자전거를 보았다. 그가 매일같이 타던 것이었는데 어느 날부터 뒷바퀴의 고장으로 인해 현관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내게 관계를 요구하는 것이 그 고장 난 자전거를 타라고 권하는 것 같은 기분을 씻어낼 수 없었다.
쌤은 나를 소중히 대했고 나와의 관계를 틀림없이 아꼈다. 내게 어떤 어려움이 생겼을 때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도으려 했고 가끔은 내가 도움을 청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상처를 받곤 했다. 그가 나를 구하려 발버둥을 치는 줄곧 나와의 관계가 어렵다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끝끝내 그는 알지 못했다, 그가 어렵다고 느꼈어야 하는 부분은 본인 스스로를 구하는 데에 있음을.
왜냐하면 그와 나는 각자 살아오는 길에 부서지고 닳아져 버린 부품을 가진 채 만났지만, 그것이 정확하게 어떻게 오작동하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타인과 밀접해지지 못하는 것, 특정 촉각에 예민한 것이 내게 있어 그와 단 둘이 그의 집에 있는 것이 때로는 얼마나 위협적일 수 있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언제든지 떠날 수 있고 전심으로 전념하지 못하는 나의 존재가 몇 번의 배신과 배척의 트라우마로 인해 그에게 얼마나 큰 공포의 대상일 수 있었는지 나는 최선으로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가끔 소파에 앉아 있을 때 극엄한 표정을 한채 내게 다가와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너는 꼭 내일 당장이라도 없어질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아. 아니, 너는 늘 다른 곳에 가 있는 것만 같아.”라고 말하곤 했다. 내가 위로 올려다본 그의 손아귀 안의 나의 움츠러듦과 아무리 움켜잡아도 잡히지 않는 나라는 존재를 두고, 우리는 각자의 두려움에 떨며 서로가 가하고 있는 두려움에 대해선 무지했다.
그는 그가 나를 고칠 수 있다 믿었고 내가 그를 고쳐주길 바랐다. 하지만 나는 너무 잘 알았다. 각자의 고장 난 자전거는 서로가 수리해 줄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그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가 들어낸 생채기를 못 본 체할 수 없었기에 줄곧 그 주변을 맴돌았을지도 모른다. 난 그에게 묻고 싶었다. 나를 위한다면서 왜 헐어버린 자전거를 타라 권하는 건지. 왜 브레이크가 닳지는 않았는지 바퀴에 구멍이 나지는 않았는지 확인하지도 않은 채 나를 앉히려 하는지. 본인 때문에 내가 벽에 돌진해버리기라도 한다면, 바퀴에 공기가 빠져 꼼짝 나아갈 수도 없게 된다면 그것이 그가 바라는 희생적인 관계인 것인지. 그저 서로에게 한없이 잔혹한 것은 아닌 건지.
이런 말들이 가슴 지면으로부터 솟구쳐 올랐지만, 말을 하는 것 마저 엄청난 악역을 자처해야 하는 상황임을 나는 잘 알았다. 왜냐하면 어느새 약자 됨은 도리어 무기가 된 이 사회에서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 아픈 사람보다 본인의 안전을 무릅쓰면서까지 아픈 사람을 돌보지 않는 사람이 악한이기 때문이다. 쌤은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나에게 부서진 자전거가 있으니 네가 고쳐 타라고, 많이 고장 나 있으니 특별히 더 소중히 대해달라고. 이미 방치되어 있는 것을 소중히 대해지기를 바라는 본인의 적반하장적인 태도를 전혀 지각하지 못했다.
은우와의 관계에서는 악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 둘 다 카인의 표식을 갖기를 바랐기 때문에. 강자는 결국 자신을 위해 선을 선택하고 선하다는 것을 궁극적으로 이기적이길 택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은우와 나는 서로를 위해 각자를 최선으로 위했다. 각자가 최상의 상태일 때야 비로소 관계가 기동함을 알았다. 이것이 인간관계에서 어려운 과제로 여겨져야 할 부분이다, 상대방과의 차이점이나 상대방의 어떤 반응들의 문제가 아니라.
은우를 만나기 전에는 여러 사람을 만나봐야 한다는 말, 에 별생각 없이 수긍하고 살았다. 그를 만났을 때 이미 몇 번의 연애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어떤 부분에서 호감이 사랑이 되고 어떤 포인트에서 상대방이 지칠 수 있겠구나 등 상상력이 힘을 발휘할 때면 문득 이래서 많은 사람을 만나보라고 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가볍게 스치곤 했다. 그런 반면 나와의 연애가 처음이었던 은우는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연애를 하며 상대방에게 쓸 시간을 자기 자신에게 투자했다고. 모태 솔로라는 사회적 낙인 때문에 농담으로 웃어넘기기 위해 한 말인 것 같았지만 그의 말에는 상당한 진실이 담겨 있었다. 실제로 그의 연애 방식은 서툴지 몰라도, 그에겐 관계를 유지하는 단단한 힘이 있었다. 연애를 많이 해본 경험으로 인한 스킬은 표면을 이루는 얇은 천 같은 것뿐이지 본질의 확장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려주었다.
“우리는 왜 서로에게 이렇게 끌리게 되었을까?” 둘이 침대에 누워 단란하게 이야기 나눈다. 나는 그의 손을 끌어당겨 천장을 항해 겹쳐 잡으며 물었다.
“그러게.” 잠에 들려는 참이었는지 그는 나긋한 목소리로 답했다.
“무엇이 한 사람을 흥미로운 사람으로 만드는 걸까? 인풋이 많은 사람이지 않을까?” 왜 서로를 흥미롭다고 느끼는지에 대해 가장 쉽게 떠오른 생각을 이야기했다. 조금 생각을 하다 그는,
“네가 흥미로운 사람인 이유는 아주 사소한 인풋을 주어도 너에겐 아주 잘 만들어진 함수들이 있어서 아웃풋에 항상 증분이 있기 때문이야”라고 말했다.
확실히 그랬다. 나는 스스로를 배신함의 통증을 너무 어린 나이에 배워버렸다. 시간은 그 무엇도 약속해주지 않았으며 그 어떤 결실도 그냥 맺어지는 법이 없었다. 자전거가 소모품이듯 마음도 닳기 마련이었다. 우울증이나 불안장애는 감기와도 같은 것이라 마음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개인의 탓은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 상황이 나아져 있겠지 더 멋진 내가 되어있겠지라는 착각, 부모님이나 선생님과 같은 보호자가 나를 돌봐주겠지 하는 착각은 결과로써 배신하게 되어있다. 그것을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스스로의 수호자가 되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한 벗어 나올 수 없는 절망만이 남게 된다. 그렇기에 자신의 내면의 자아를 재양육하고 본인에 대한 집요한 관심을 갖는 과정은 개인의 몫인 것이다. 그 과정에서는 필연으로 잘 작동하는 함수들을 설계하고 구현하게 되어 하나의 인풋이 열의 아웃풋을 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관계에의 끊임없는 매력과 건강한 안정성을 구축하는 방법이다. 내가 간망한 쌤에게서의 노력은 바로 이 스스로를 가꾸는 데에의 노력이었다. 나에게 쏟아내고 있는 정성 전에 스스로를 우선하는 노력. 슬플 때는 눈물을 흘리고 즐거울 때는 흥겹게 웃을 수 있도록 하는 노력.
어김없이 그와 대척점을 이루고 있는 은우가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