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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Roland 2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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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인 Oct 04. 2024

6월 28일  코마자와다이가쿠역

아름답게 끝이 난 줄 알았다. 그에게 뜬금없이 메시지가 오기 전까진.


그가 집에서 나가달라 한 이후로 나의 일상은 평온했다. 물론 삶 속 그의 흔적들은 끈적거렸고 나는 덧날 것을 알면서도 계속 뜯게 되는 딱지처럼 그곳을 긁었다. 리타와 마이클과 미술관 전시를 가기도 하고, 마이클과 케인과 저녁식사를 하기도 했다. 대만에 관한 뉴스에 나도 모르게 클릭해 읽고 있었고, 편의점에서 그가 좋아하던 대만 차 맛의 맥주를 굳이 골라 마셨다.

거울에 얼굴이 비칠 때마다 싹둑 잘라버린 나의 머리에 대한 그의 말을 한번 지그시 되새김질해 본다. 세 단어의 짧은 문장, 마음에 든다는 그 말. 웃음을 참지 못하고 뱉어버린다. 

‘내 머리통에 붙어있는 내 머리카락이 나랑 잘 어울리는 것 말고는 본인의 마음에 들고 말고가 내게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지?’


여느 때와 같이 일에 열중하고 있었던 회사에서의 오후. 

메시지 도착을 알리는 핸드폰의 진동. 

빠르게 확인하려 화면으로 흘깃 한 그대로 멈춘 동공.

“You wanna go for a run?”


홀연히 반가웠지만 애써 침착하려 했다. 답장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겨우 정리된 것 같은 소동에 다시 휘말리고 싶은가. 혹은 답장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과반응하는 것이 아닐까. 이 이상으로 생각이 진행되기 전에 나는 도리어 거절의 의미로,

“그럼 오늘 어때?”라고 답했다. 당일, 그것도 당장 몇 시간 뒤라는 약속에 응할 사람이었던 것을 간과한 채. 그리고 그 대가로,

“Alright. I’ll be there.”라는 답장을 받아버렸다. 일분의 지체도 없이 답장이 온 것을 바라보며 쌤은 여전히 수동적 삶의 상처를 통각하지 못하고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를 만났을 때 그와 나는 어떤 군더더기의 말도 없이 가벼운 안부를 주고받으며 스트레칭을 하고 달리기를 시작했다. 그는 더 이상 내게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고 본인의 역할을 확실하게 이해한 듯이 내게 어떤 활동을 하기를 제안했다. 존재로서 충분한 관계가 될 수 없음을 드디어 깨우치기라도 한 듯이. 그래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주 만나 달렸고,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고 등산을 했다.


배드민턴을 치기로 한 어느 6월 끝무렵의 저녁은 선선했고 바람이 적잖게 불었다. 나는 그와 배드민턴을 친다기보다 나와 그가 바람에 대항하여 배드민턴을 치는 것 같았다. 공은 대체로 원하는 곳으로 날아가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머쓱해하며, 

“Sorry!”라고 외쳤다. 

그가 친 공이 엉뚱한 곳에 떨어지면 그 또한 머쓱해하며,

“My bad.”라고 간결하게 말했다.

나의 실수로 공을 주으러 가야 하는 수고스러움에 대해 미안해하는 반면 그는 잘못을 인정할 뿐인 건가, 머리가 잘 어울린다는 말 대신 마음에 든다고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건 분명 언어적 관습이다. 같은 의미를 관습적으로 다르게 표현했을 뿐이라 할지도 모르겠다. 언어는 사고의 결과물이고, 관습적으로 특정 사고를 하는 문화권에 익숙한 사람과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관습을 공유하는 사람이 있다. 저 표현을 선택했다는 것이 그 개인의 성격이나 성향에 대해서 말해 준다고 할 수는 없어도 최소 그가 속해 있는 부류가 어떠한지는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와 나는 너무나도 다른 세계에 속해있음을 이렇게 간단한 말의 습관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급하게 다리 아래로 숨었다. 좀처럼 그칠 것 같지 않은 비였다. 저녁시간이 지날 대로 지나버렸고 그와 나는 꼼짝을 못 하고 있었다. 결국 그가 저녁을 사 오겠다며 비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십 분 즘 뒤에 그는 피자 한판과 편의점 비닐봉지를 들고 돌아왔다. 그는 바보 같은 웃음을 하며 비닐봉지에서 우유를 꺼냈다.

“너 어렸을 때 피자를 우유랑 먹었다며.”

나도 웃음을 터뜨렸다.

“후회할 텐데.”

“But you said you would challenge me.”

쌤의 세계는 나를 중축으로 돌고 있었다. 내가 한 말은 아무리 사소해도 며칠이 되지 않아 현실이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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