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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Roland 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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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인 Oct 17. 2024

7월 13일 후지산 5 합목역

그가 다시 나의 루틴이 되어버려 나도 예전 같은 욕심이 생겨버렸다. 수단으로 쌤을 자꾸만 찾게 되었다. 그에게 넘쳐나는 시간과 돈, 그 자원으로 나의 욕심덩굴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도쿄 근교에 있는 웬만한 산에 다 가본 듯했다. 나는 지나가는 말로 이제 남은 산은 후지산 밖에 없다 했고, 그 다음날 아침부로 그는 내게 후지산 등산 계획이라며 PPT를 보내왔다. 


그가 제안한 대로 신주쿠역에서 후지산으로 향하는 첫차를 탔다. 예상 도착시간이었던 9시를 훌쩍 넘어 등산을 시작할 수 있는 후지산 5 합목 입구에 내렸을 때는 이미 11시가 되어갔다. 입구에 있던 스태프들은 산정상 근처에 숙박이 마련되어 있냐고 수차례 물었다. 그렇지 않다고 답하자, 지금 올라가면 제시간에 돌아올 수 없다며 올라가는 것을 극구 반대했다. 두 손으로 크게 엑스를 그려가며 말렸다. 나도 버스 안에서 점점 늦어지는 도착시간을 붙잡고 초조해하며 느끼고 있었다. 신주쿠로 돌아가는 마지막 버스가 오후 6시에 출발하기 때문에 지금부터 한숨도 쉬지 않고 뛰어 올라갔다가 뛰어 내려오지 않는 이상 우리는 주차장에서 노숙을 하거나 상당한 거리의 지하철 역까지 걸어가거나 해야 했다. 

그러나 괜찮다 느꼈다. 

쌤이라면 절대 노숙을 시킨다거나 말도 안 되는 거리를 걷게 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와 있으면 야속하게도 그런 든든함이 만연했다.

스태프들에게는 안심시키기 위해서 정상까지 올라가지 않고 되는데 까지만 올라갔다가 내려오겠다 거짓 약속을 하고 무모한 후지산 등반을 시작했다. 등산 장비 하나 없이. 난방에 레깅스, 그리고 반스 운동화를 신고.


“소프트웨어 개발에서도 그렇듯, 인생에서도 의존성을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해.” 이전에 은우에게 말했었다.

“소프트웨어 개발에서는 그게 왜 중요한데?”

“의존하고 있는 라이브러리들의 버전을 관리해야 하잖아. 라이브러리들 간의 의존성도 고려해야 해고. 행여 그 라이브러리에 버그라도 있어봐. 그것을 사용하는 내 프로그램도 작동하지 않게 되겠지. 코스트가 엄청 높고 위험도 높아지는 거지.”

“그렇긴 하겠다. 근데 그게 왜?”

“인간도 의존도가 높으면 삶이 쉬어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잘 작동하는 상태를 유지하는 게 굉장히 어렵지 않겠어? 자유도 독립성도 떨어지지. 진화할 가능성도 현저히 낮아져. 물론 이것도 소프트웨어 개발에서도 같아. 오픈소스가 생기고 개발자들이 그냥 갖다 쓸 수 있는 프레임워크가 많아지면서 스스로 처음부터 모든 걸 개발할 수 있는 개발자가 몇 명이나 될지.”

“그러게. 로우레벨의 코드를 이해하는 개발자가 점점 없어지긴 하겠다.”

“생명체 중에서 과학 기술이 가장 발전된 인간이 사실 가장 나약한 존재일 거라 생각하지 않아?.”

“과학 기술에 의존도가 너무 높아서?”

“응. 인류는 더 이상 진화하지 않을지도 몰라. 머나먼 미래에 계속해서 진화를 해온 생명체와 아무런 진화 없이 과학기술만 발전한 두 종이 대전쟁을 치르게 된다면 나는 전자의 부류가 절대적으로 이길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 너는 어때?”

“음…”

“이런 생각이 들고나서부터는 병원에 가는 것도 약을 처방받는 것도 꺼려져.”

“진화의 기회를 빼앗기는 것 같아서?” 은우는 웃으면서 내가 할 말을 알아차렸다. 나도 따라 웃었다.

“그런 극단적 상황에 놓일 가능성이 적기 때문에 나는 즐길 수 있는 것들은 즐기며 살래.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류의 진화인 거야. 이제는.” 내가 웃는 사이에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반스 운동화가 가파른 경사를 미끄러질 때마다 은우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속으로 혼자 웃었다. 제대로 된 등산화로 이번 산행이 쉬워지는 것보단 더욱 단단하고 굳센 발과 다리로 훈련을 거듭하겠다고 생각하며. 삶의 여러 방면으로 의존성을 없애려는 발버둥이 극단으로 이르러 나는 오히려 나를 해하며 앞으로 강행하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나를 돕고 있지 않았다.


산행이 두 시간을 넘길 즈음 나는 쌤에게 점심을 먹겠냐 물었다. 주인을 기다린 강아지 마냥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였다. 나는 그에게 챙겨 온 삼각김밥과 단백질 바를 건넸다. 그리고 멀뚱이 입으로 음식을 넣는 그를 쳐다보았다. 나는 나의 시선에 깃든 알 수 없는 우월감을 느꼈다. 식욕을 느끼는 것은 원시적인 일이고 나는 그런 욕구 따위를 초월한 것 마냥. 나는 아직도 인도네시아에서의 긍정적 학습에 의한 프레임에 갇혀 살고 있었다. 욕구를 자연스럽게 느끼고 해소하는 것이 무섭다. 나의 욕구에는 수치가 따른다. 정상까지는 아직 두 개의 합목을 더 가야 했다. 목표했던 세시반까지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오히려 능률이 폭발적으로 높아진다. 매 걸음을 좇아오는 시간의 압박감에 나와 쌤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3시간 반 만에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내게 유일한 쉼은 나보다 훨씬 뒤처진 쌤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후지산은 활화산이라 작은 알갱이 같은 돌이 땅의 주를 이루었다. 이는 평소에 우리가 다니던 흙으로 되어있는 산보다 훨씬 미끄럽고 무릎과 다리에 많은 힘을 요한다. 평발이었던 그에게는 꽤나 힘든 산행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것을 알면서도 나는 뒤쳐지는 그를 보며 묘한 기쁨을 느꼈다. 도파민의 위험인가. 경쟁에 중독이라도 된 듯이.


정상에 올랐을 때 우리는 구름 위를 걷고 있었다. 당일치기인 사람은 모두 오래전에 하산을 시작했고 숙박을 하는 사람들은 아직 산 밑에서 출발을 안 해서 인지 적요뿐이었다. 적요 안의 시간은 다르게 흐르는 듯했다. 서둘러 하산의 방향으로 발을 옮겼지만 그 발자국 아래의 몽글몽글한 구름 같은 안개들이 걸음 사이에 간극은 만들었다. 그 선명한 틈을 잊을 수 없다.


올라온 길보다 길게 느껴졌던 하산이 끝나고 무사히 막차에 올라탔다. 

“혹시 몰라서 근처에 숙소를 예약해 두었는데. 힘들면 오늘 쉬었다가 내일 쉬엄쉬엄 돌아갈래?” 그가 물었다. 산행이 유일한 목적이었던 나는 곧바로 집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언제나와 같이 그것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면 굳이 마다할 필요가 무엇인가 하면서 못 이기는 척 숙소로 따라갔다. 


저녁은 호스트 분이 직접 잡은 생선 사시미, 버섯과 여러 야채가 들어간 다키코미고한, 그리고 피클류의 정성스러운 반찬들이 나왔다. 그는 나를 보며, 네가 좋아할 거 같은 걸로 미리 전화해 부탁해 두었다 했다. 저녁 후 그가 맥주를 사러 편의점에 다녀오겠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같이 가자고 했다. 숙소에서 제공하는 여성용 슬리퍼와 남성용 슬리퍼 중 그가 먼저 여성용 슬리퍼에 본인의 발을 꾸겨 넣었다. 더 큰 불편함을 자처하는 그의 언제나와 같은 신사다움 그리고 두터운 발가락이 슬리퍼 밖으로 튀어나온 모습. 그 부조리에 시선이 머물렀다.

우리는 각자 공용 온센을 즐겼고, 내가 다시 방으로 들어왔을 때는 이미 이불이 펴져 있었다. 그는 다다미 한쪽 벽면에 붙어 깔아 둔 이불 위에 누워있었고, 나는 반대쪽 벽면에 깔린 이불 위에 누웠다. 

“후지산 등반한 게 오늘 있었던 일이라는 게 안 믿겨.” 들릴 듯 안 들릴듯한 저음으로 그가 말했다.

“그러게.”

“내년에도 또 올 거지?”

“당연하지.”

“급하게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쉴 수 있어서 덜 피곤하지?”

“그렇네, 고마워.”

그리고 잠에 들 때 즘, 그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Love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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