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축하라는 큰 숙제를 끝냈으니 홀연한 마음이 될 줄 알았는데 진심은 행동에서 나온다.
내가 느끼는 바를 그도 곧대로 느꼈을 것이고 나는 숙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더 큰 숙제를 떠안은 기분이었다.
오늘은 그의 생일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얼마나 특별한지는 차치하고 나는 출근을 해야 하고 그는 집에 있는 학생이다. 그렇기에 그가 나의 오피스 근처로 왔다. 일이 끝나고 빠른 걸음을 재촉하며 약속장소로 갔지만 이미 약속시간이 지나버렸다. 생일 약속에 늦어 기다리게 하다니. 최악이다. 그러면서 왜 약속시간을 맞추지 못했는지 그리고 왜 이것밖에 준비하지 못했는지, 본인의 어수선한 모습에 조금 놀랐다.
왜냐하면 어제가 같이 사는 룸메이트의 생일이었고 나는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케이크에 꽃다발을 미리 준비해 자정이 되었을 때 방문을 두들겨 그녀를 놀라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초를 불었고 나는 그녀가 소원을 비는 것까지 사진으로 정성스럽게 담아 주었다. 알고 지낸 지 한 달 밖에 안 되는, 친구도 아닌 룸메이트를 위해서도 이 정도는 할 수 있는 사람인데, 쌤에게 있어서는 그 정성이 절반도 되지 않는 것이 괴이할 정도였다.
마음은 행동에 드러나기 따름이다. 나는 원체 아기를 좋아하지 않는데 아무리 활짝 웃으며 온갖 재롱을 떨어보아도 아이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이라고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 반면 원래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저 무심하게 장난을 쳐도 어딘가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느껴지기 마련이다. 마음은 숨겨지지 않는다. 그것을 너무 잘 알기에 나의 반토막 선물이 긴장되지 않을 수 없다. 본인 생일에 그에 대해 고갈되어 버린 마음을 재확인시키는 시험대에 오르게 한 것이기 때문에.
분명 나는 어렸을 때 미국에 살았어서 언어에도 불편함이 없었고 영어 문화권도 친숙하다 줄곧 느끼고 있었지만, 그로부터 12년 후 교환학생을 위해 다시 방문한 미국은 완전히 낯선 땅이었다. 그 당시 어떤 패기로 상대학교 댄스 팀에 합류하기로 했는데 막상 나와 완전히 다른 인종으로만 이루어진 팀들과 협응 하며 매주 안무를 짜고 몇 시간씩 연습을 하면서 나는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연습을 하는 도중 거울 속 조화로운 그들과 어딘가 조화롭지 못한 나의 몸뚱아리가 있었다. 그들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해도 같은 것이 웃기다고 느끼지 않았고, 어색하게 웃어보는 스스로보다 부자연스러운 것은 없었다. 나는 내가 이방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내가 느끼는 불편함과 소외감을 그렇게 정당화했다. 학기가 끝나갈 즘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시크릿 산타를 하기로 했다. 어차피 자기들을 위한 이벤트, 나와는 관계없다고 지레 방어적인 자세로 간단하게 화장품을 하나 준비했다. 하지만 그들은 곧 한국으로 돌아갈 나를 위해 정성스러운 롤링페이퍼를 준비해 줬고 나의 시크릿 산타는 교환학생을 추억할 수 있도록 학교 로고가 있는 맨투맨을 댄스팀답게 직접 수선해 주었다. 내가 받은 과분한 선물과 서로가 서로를 위한 마음이 가득가득 담은 선물들 사이에 내가 가져간 초라한 선물은, 나의 초라한 마음을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보여주어서 참을 수 없게 부끄러웠다. 나는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만들어 놓고 이방인 것을 모든 핑계 삼고 있었다.
쌤의 생일에 그 발가벗은 겨울을 다시 살아내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정적 속에 저녁을 먹었다.
“칼을 선물할까 생각해 봤는데. 네가 요리하는 거 좋아하고, 네가 해준 요리들 너무 맛있게 잘 먹은 게 고마워서. 근데 아무래도 칼을 선물하는 건 안 좋은 의미가...” 나는 멋쩍게 입을 열었지만 끝내 말을 흐렸다.
“뭐 하러. 필요하면 내가 구매하면 되는데.”라고 그는 말하지만 내심 무언가를 기대했다는 적막감을 나는 느꼈다.
실제로 칼을 선물할까 생각을 해 보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고급 칼을 사용하고 있었고, 그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모든 것들은 그가 이미 아주 좋은 브랜드의 것으로 가지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사람에게 무엇을 선물할 수 있을까, 선물을 할 수 있는 빈틈을 주지 않는 거 같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내가 10의 부담으로 그에게 어떤 것을 선물한다 해도 그는 1의 부담으로 그 같은 물건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내가 선물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불현듯 그런 삶을 영위하고 있는 그에 대한 의문스러운 반감까지 느껴졌다. 왜 그는 물질에 의존한 쉬운 삶을 살고 있는가에 대한. 그런 그의 ‘나태한’ 삶에 대한.
그건 다 핑계다. 정성과 애정을 담지 않을 핑계뿐이다.
은우가 내게 줬던 드라이플라워가 말해준다.
인도네시아에 다녀와서 재화와 서비스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다짐은 생일 혹은 기념일을 고역으로 만들곤 했다. 선물교환이라는 관습은 반강제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두 참가원이 결과적으로 온전히 마음에 들지도 않는 물건에 속박되는 것의 되풀이 즘이라고 생각되었다. 물질만능주의와 소비주의에 기꺼이 이바지하는 것이라고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개인적 사유를 이해해 주는 것은 은우 아마도 뿐이었다.
은우와 나는 대학교 내내 연애를 하고 그 앳된 손을 그대로 잡고 나란히 졸업했다. 지방에 계시는 은우의 부모님은 졸업식에 오지 못하셨다. 대신 우리 엄마가 은우의 꽃다발까지 준비해서 수줍고 당찬 두 어른 아이를 축하해 줬다. 그로부터 몇 주 뒤 밸런타인데이 때 그는 선물이라며 드라이플라워를 내게 건넸다. 그것은 졸업식날 엄마가 그에게 선물했던 꽃다발을 그가 직접 말린 것이었다. 그 선물은 아무런 설명이 필요 없었다. 그 자체로 구심적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얼마나 나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는지, 그가 얼마나 나의 세상을 존중하고 헤아리려 노력하고 있는지. 그의 질박한 사랑에 나는 마침내 좋은 선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누군가를 진득이 생각했다는 흔적이다.
그런 아름답고 반짝이는 무언가를 알아버린 이상 그것에 최소 준하는 무언가를 계속 찾아 헤매게 된다. 쌤은 나의 역사와 세계를 다 알아줄 거라 기대조차 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그걸 나누려 하지도 않았다. 그냥 누구나 하듯 관습적인 물질로 숙제를 해치우려 했지만 내성적인 반항감이 들어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도 못하는 우스운 꼴이었다.
“저녁 고마워. 잘 먹었어.” 그가 수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케이크 준비했는데 근처 공원 가서 먹을래? 물론 와인도 준비했어.” 내가 물었다.
“좋지.”
한적한 공원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한 여름 저녁을 만끽하는 청춘들 사이에. 누군가를 강가를 바라보며 기타를 쳤고 아이들은 강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나는 케이크를 박스에서 꺼냈다. 초를 꽂았다. 성냥초에 불을 붙이려 했지만 바람에 몇 번이나 실패해 버렸다.
“혹시 라이터 없지?” 나는 난감해하며 물었다.
“있어.” 그는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주섬주섬 찾았다. 주머니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알레르기 약?”
“언제 또 알레르기 나타날지 모르잖아.”
“누구?”
“너. 나 알레르기 없어.”
누군가를 진득이 생각했다는 흔적.
그 선물을 그의 생일에 내가 받아버려서 나는 또 다른 숙제를 떠안은 기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