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2025년 5월)로부터 1년 9개월 전.
“Congratulations on your graduation! Class of Summer 2023!"
나는 졸업만 하면 대기업들이 나를 뽑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명문 디자인 대학, 과 장학생, 인턴 경력, 꾹꾹 애정을 눌러 담은 포트폴리오. 이만하면 충분히 잘했지- 하던 나의 오만함을 겸손케 하듯 취업의 창에는 찬바람이 쌩 불었다. 내 마음은 금세 ‘좋은 곳에 안착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한 감정으로 스멀스멀 채워졌다. 같이 학업의 길을 걸은 학교 동기들로부터 취업 소식을 하나 둘 들을 때, 나는 내세우지도 못할 만한 곳에 가 내팽개쳐져 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미묘하게 Ego 섞인 불안한 복잡한 감정과, 나는 사실 그다지 가치가 없는 게 아닐까 하는 나 자신을 향한 의심 때문에 제일 괴로웠다.
졸업 전시 중, 나의 최애 교수님 J가 우리 과 부스를 구경하다 내 작품 벽 앞에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너 잡헌팅은 잘 돼 가니? 내 버디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스타트업을 하는데 관심 있으면 연락해!” 원하는 곳을 골라서 가는 그림은 꿈속에 묻혀버린 지 오래였지만, J의 이 제안은 깜깜한 터널 속 한줄기 빛 마냥 비쳤다. 다른 기회는 없었고, 곧 결정의 순간 앞에 섰다. ‘LA에 더 있으면서 지출을 아끼며 천천히 좋은 곳을 찾을 때까지 기다릴까, 아니면 모두가 가지 말라고 말리는 샌프란시스코, 거기에다 고생길이 훤한 스타트업에서 구르더라도 경험을 쌓을까.’
J의 제안은 좋은 점도 있었지만 여러 방면으로 내가 바라던 최고는 아니었기에 확신이 안 섰다. 이 상황을 굳이 비유하자면 마치 Big Bear Mt. 언저리를 오르는 한 차선에서, 뿌연 안갯속 차량 안에서 운전대를 잡고, 하나의 희미한 빛을 따라, 이것이 신호등 불빛인지 정체불명 짐승의 빛나는 눈인지는 모르지만 뒤에서는 차들이 올라오고 앞으로는 가야만 하는 드라이버의 마음이었달까. 나는 솔로몬의 지혜를 구하는 심정으로 잠언을 읽기 시작했다. 그중 이 한 구절이 내 결정에 확신을 주는데 큰 역할을 했다. “The horse is made ready for the day of battle, but victory rests with the LORD.” (Proverb 21:31)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나 자신을 준비시키는 건 할 수 있지만, 취업 시장이 힘든 것도, 마침맞는 기회가 찾아오는 것도, 컨트롤하는 건 내가 아니었다. 내가 느끼는 불안의 근원은 내가 할 수 없는 것에서 오는 거였는데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님이 분명했다. “승리”의 정의조차 지금의 내가 상상할 수 있을 만한 게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 드는 순간 마음의 평안이 찾아왔다. ‘그래, 무서워하지 말고, 이렇게 된 거 주어진 것에서 최선을 다해서 해보자. 가자, 샌프란으로.’
깐따삐아, 작은 사회에서 큰 사회로!
내가 맞이한 회사의 재정 상태는 상당히 열악했다. 진짜 찐 스타트업 맞는구나. 그나마 동료들의 관계만은 끈끈했다. 그리고 힘든 환경에서도 내가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던 건, 나를 불러준 내 교수님 J와의 동행, 그의 무한 긍정 에너지, 격려와 지지가 제일 컸다. ‘J 아니었음 내가 이러고 있었을까.’ 자주 하던 생각이다. 내가 그리는 이상적인 근무 환경은 이러했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흐르고 긍정적이고 유연한 사고가 격려되는 말랑말랑한 조직. 서로 믿고, 경청하고 서로의 성장을 응원해 주는 그런 거. 그와 다르게 현실의 오피스에서 오가는 “Fxcking ass hole!” “너 해고야!” — 이런 리더들의 농담반 진담반 표현 방식이 적응이 안 됐다. (물론 나한테 하는 말은 아니었다.) 이 작은 오피스에서 굳이 안 들어도 되는 대화부터 필터링 없는 표현까지 안 들리는 게 없었다. ‘이게 바로 아메리칸 스타트업 스타일인가?’
그러는 와중에서도 나는 또 나름대로 나만의 씨름을 혼자서 하고 있었다. 나중에야 깨달은 그 씨름의 이름은 Imposter Syndrome. 어째서인지 이 도시로 이사 오고 어언 8개월 동안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려는 시도가 어려웠다. 사람들을 만나도 지금의 내가 보여줄 만한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중에는 일하느라 바쁘고 집에 돌아와 저녁 먹고 나면 지쳐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주말에는 장보기, 청소, 빨래 등등 하다 보면 시간 혹은 에너지가 바닥나 버렸다. 아직 다 가꾸어지지 못한 내 방에 들여야 할 것들 하나 둘 생각하면 필요한 것도 여전히 산더미였다. 대학교 동기들을 만나보기도 했지만, 학교와는 다른 사회에 있는 우리 사이에는 왠지 모르게 설명할 수 없는 다른 공기가 흘렀다. 누군가를 만나던지 나는 제대로 내보여줄 만한 게 없다는 생각에 내 마음은 한없이 쪼그라들었다.
내 씨름에는 커뮤니티의 부제의 영향도 컸다. 이전에 다니던 교회에서 매주 만나고 지지해 주는 친구들과 선교사님들이 이곳에는 없었다. 또 서로의 작업에 호기심을 가지고 멋진 디자인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할 동기들도 없었다. 매번 내가 달려가 도움을 청하거나 시시콜콜 말을 걸곤 했던, 한결같이 같은 곳에 있어주는 도서관 사서, 목업실 지도사님들, 캠퍼스를 오가며 교류하던 모든 이들이 이곳에는 없었다. 짧게 말하자면, 허심탄회하게 크고 작은 이야기를 나눌만한 친구가 없었다. ‘와, 내가 있던 작은 사회는 온실같이 안전하고 좋은 곳이었구나.’
혼자만의 싸움 속에 조금씩 무기력해져 가던 나에게 어느 날 손을 내밀어준 한분이 있었다. 그는 3년 전 인턴십을 통해 같이 일했던 디자인 디렉터 K. 샌프란으로 이사 온 지 8개월 차 처음으로 가게 된 유일한 디자이너 Meet up에서, 이제 막 나가려는 문 앞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짧게 서로의 안부를 나누고 나는 그곳을 나왔다. 며칠 후, 링크드인 메세지함에 그분의 메시지가 남겨져있었다.
“Hey Chobunny, great seeing you the other day at OOO. Hope all is well, feel free to reach out if you need anything. Cheers. - K”
전 스튜디오 디렉터로서 예의상 한 말일수도 있었겠다. 우리가 그다지 애틋한 사이도 아니었는데, 잠깐 스치듯 일했던 인턴을 향한 옛정이었을까? 그날 K는 이 메시지를 충분히 안 보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를 기억해 주고 손을 내밀어준 이 한마디가 나도 모르게 한껏 움츠려 있던 내 작은 마음에 너무나 큰 용기를 심어주었다. ‘내가 다가가면 받아줄 사람이 이곳에도 있구나!’ 이게 뭐라고 사무치는 고마움에 내 방구석 모니터 앞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렀다. 이후로 나는 용기를 얻어 K에게 조언을 구하고 같이 커피를 마시면서 그동안 힘들었던 고민들을 풀어내었다. 2024년 8월 중순, 이날을 기점으로 샌프란에서의 삶을 서서히 바꿀 용기가 생겼다. 그리고 다짐했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K와 같은 존재가 될 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