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진의
박종진은 벽에 기대 선 채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 속으로 차갑고 건조한 병원 공기가 파고들어 옆구리를 찌르는 듯 아렸다.
눈꺼풀을 감았다 뜰 때마다 세계가 기우뚱 기울었다. 모든 감각이 흐려지고, 발밑이 꺼지는 듯한 어지러움이 밀려왔다.
그러나 그 혼란 속에서도 한 가지 사실만은 칼날처럼 뚜렷했다.
아버지는 곧 세상에 없다.
그 단순한 문장이 그의 가슴속에서 수도 없이 되뇌어지며 심장을 갈가리 찢었다.
“아버지…”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듯, 그의 낮은 목소리는 거의 숨에 가까웠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기억 속에서 아버지는 언제나 단단한 등짝, 낮고 결연한 목소리, 흔들림 없는 결정을 가진 사람으로 남아 있다. 종진이 어린 시절 넘어지면 달려와 일으켜주던 거친 손바닥, 청년이 되어 방황할 때마다 묵묵히 등을 돌려 밀어주던 그 넓은 그림자…
그 아버지가, 이제는 병상에서 마른 숨을 몰아쉬며 종진의 이름을 간신히 부르고 있다. 그 음성의 떨림이 종진의 심장에 그대로 박혔다.
그리고 그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바라던 것.
강지윤과의 혼사.
그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종진의 눈가가 천천히 일그러졌다. 눈앞이 아릿하게 흐려지며 그는 턱을 꽉 물었다. 눈을 감아도, 떠도, 강지윤의 얼굴이 떠오른다.
도도하고 차가운 눈매. 필요 이상의 정중함. 그리고 자신과 단둘이 있을 때면 더욱 또렷해지는 미묘한 거리감.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 사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자신을 향한 열정도, 미련도, 심지어 호기심조차 읽히지 않았다.
종진은 그 무심함이 두려웠고, 동시에… 자신이 그런 무심함을 견딜 만큼 비참해졌다는 사실이 더 두려웠다.
“지윤아…”
그는 거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마치 불러도 대답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부르는 이름.
갑자기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요동쳤다.
왜 하필… 왜 지금… 왜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이 그것이어야 했나.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지윤에게 마음이 없다는 것을.
하지만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종진의 인생을 끝까지 책임지고자 하는 마지막 방식으로 그 혼사를 바라던 것이리라.
그러나 종진은 그 기대를 짊어지고 서 있는 자신이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한쪽에서는 아버지의 마지막 부탁이, 다른 한쪽에서는 지윤의 차가운 무관심이, 양쪽에서 동시에 그의 폐를 쥐어짜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이마에서 미간으로, 미간에서 턱으로 이어지는 손끝이 떨렸다.
쓰러질 것처럼 다리가 후들거렸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러는가.
아버지를 위해? 내 체면을 위해? 아니면… 내가 아직도 어딘가에서 그녀를 원하기 때문인가?
질문들이 정신을 난폭하게 갈가리 찢었다.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그 어떤 대답도 자신을 더 고통스럽게 만들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잠시 뒤, 그의 호흡이 조금씩 가빠졌다. 벽에 기대 세운 손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는 바닥을 향해 시선을 내리깔고 속으로 절규하듯 중얼거렸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그 순간,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환자 모니터의 끊임없는 비프음이 그의 귓속에 깊이 울렸다.
아버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냉혹한 현실을 다시 한 번 일깨우는 소리였다.
종진의 가슴이 격하게 요동쳤다.
그는 길게, 아주 길게 숨을 내쉬었다.
마치 그 한숨 속에 자기 몸의 생기를 절반쯤 토해버린 것처럼.
그리고 마침내—
그는 얼굴을 들었다.
눈동자는 붉었고, 감정의 홍수로 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그 깊은 곳에는 무언가 단단해진 그림자가 내려앉아 있었다.
두려움, 상실감, 체념, 증오, 사랑, 책임감…
그 모든 감정이 모여 하나의 결의로 얼어붙는 듯한 눈빛.
그는 자신이 어떤 길을 선택하든 결국 누군가를 잃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그 잃음 속에는 자기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선택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마지막 숨이 다하기 전에, 그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종진은 비틀거리며 벽에서 몸을 떼어냈다.
아직 발걸음은 무겁고, 심장은 갈라질 듯 아팠지만—
그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한 발을 내딛었다.
마치 무너질 운명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