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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살아야 100년인것을 (72)휴식의 죄책감

숨을 허락하는법

by seungbum lee

휴식 죄책감
Q: 왜 쉬면서도 죄책감을 느낄까요?
A: 생산성을 최고 가치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해법은 휴식도 생산성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재충전 없이는 지속할 수 없습니다.


<숨을 허락하는 법>
쉬지 못하는 사람
서울 도심의 새벽은 유난히 느리고 차갑다.
하늘이 아직 완전히 밝아오지 않은 시간, 공기의 결이 다른 도시보다 조금 더 날카롭게 느껴지는 이유를 윤재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몸이 먼저 반응했다. 눈꺼풀이 무겁고, 목 뒤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회사 사무실 유리창 너머에서 서서히 푸른빛이 차오르기 시작하자 윤재는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황급히 모니터 밝기를 더 키웠다.



그가 마지막으로 집에 돌아간 게 언제였는지 정확한 날짜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지난주? 지지난주?
모든 날이 같고, 모든 날이 흐릿했다.
책상 위에는 쾨쾨하게 식은 커피, 수없이 수정된 기획서, 마감이 지났음에도 붉은 표시만 늘어나는 일정표. 슬리퍼 아래로는 먼지가 쌓여 있었다. '오늘도 이 일을 끝내지 못하면 큰일이 난다'는 생각이 그의 뇌에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누가 큰일이라 했는지, 무엇이 문제인지도 불명확했지만, 윤재는 스스로를 계속 몰아붙였다.
“조금만 더 하자. 이 정도는 버텨야지.”
책상 위 손목시계는 멈춘 지 오래였지만, 그는 그 사실조차 몇 시간 뒤에야 눈치챘다.
그 시계가 멈춘 것은 마치 응급 신호처럼 보였지만, 윤재는 이상하게도 그 신호를 무시했다.
지금 쉬면, 뒤처진다.
그 문장은 그의 머릿속에서 자동 재생되었다.
휴식은 ‘약한 사람의 핑계’처럼 느껴졌다.
남들보다 빠르게 성공하지 못한다면, 남들보다 더 오래 노력해야 한다는 강박이 윤재 안에는 굳건하게 자리했다.



하지만 그의 몸은 이미 붕괴 직전이었다.
그러던 어느 새벽, 조용히 울리던 휴대폰 진동 하나가 윤재의 피로한 의식을 흔들었다.
메시지는 짧았다.
— “윤재야, 너 괜찮아? 며칠째 연락이 안 돼.”
보낸 사람은 대학 시절 가장 가까웠던 친구, "서현"이었다.
윤재는 답장을 쓰려다가 결국 하지 못했다.
이유를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이 괜찮지 않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스스로에게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친구에게 설명하는 일은 더욱 어려웠다.
조용한 사무실 속에서 모니터만이 끼익끼익 소리를 내며 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 순간, 윤재는 생각했다.
휴식이란 건… 단지 내가 허락하지 않아서 생긴 문제일 뿐인가?
하지만 그 생각도 곧 지워졌다.
그는 다시 키보드 위로 손을 움직였다.
마치 그 손이 잠시 쉬는 것조차 거부하는 듯, 한 마디 문장처럼 뇌는 속삭였다.
지금 멈추면 안 돼.



쉬는 순간 찾아온 불안
며칠 뒤, 윤재는 회사에서 급하게 나오는 길에 우연히 창밖에 있던 카페를 바라보게 되었다.
사람들은 커피를 마시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은 윤재에게 낯설고, 어느 정도는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밖에 저렇게 시간이 많은 사람들이 많았나?”
그는 현실에서 잠시 이탈된 듯한 감각을 느꼈다.
사람들이 미소 짓는 모습, 여유 있게 찻잔을 드는 손.
그 모든 것이 자신과는 너무 다른 세계처럼 보였다.
윤재는 어느새 카페 문을 밀고 들어가 있었다.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몸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는 느낌.
이래도 될까?
이렇게 쉬어도 되는 걸까?
주문을 마치고 자리에 앉자마자 불편함이 엄습했다.




목덜미가 간질거리고, 심장이 일정하지 않게 뛰었다.
커피를 섞던 손은 미세하게 떨렸다.
이 시간에도 다른 사람은 앞서 나가고 있을 텐데.
지금 이렇게 앉아 있어도 될까.
이건 그냥 게으름 아닌가?
휴식은 그에게 달콤함이 아닌 죄책감의 맛이었다.
그때 카페 유리창 너머로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눈 밑은 어둡게 패여 있었고, 피부는 들뜬 기름기와 건조함 사이 어딘가에서 힘없이 흔들렸다.
자신의 얼굴인데도, 낯설었다.
“언제 이렇게까지…?”
그러자 손에서 펜이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
몸이 내려놓으라고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뇌는 여전히 쉬지 않았다.
그때였다.
문득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이 다시 진동했다.
서현이었다.
— “윤재야, 우리 잠깐 볼 수 있을까?”
그는 잠시 고민했다.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오늘만큼은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더 힘겨웠다.
며칠을 버티며 쌓아 온 긴장감이 마침내 어디론가 균열을 내기 시작한 듯했다.
“...그래. 보자.”
윤재는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렇게 답장을 보냈다.



깨달음이 찾아온 순간
서현을 만난 곳은 도심에 자리한 작은 공원이었다.
가을이 막 시작되던 때라 은근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칠 때마다 살짝 차가운 향기가 흘렀다.
서현은 그를 보자마자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야… 너 얼굴 왜 이래. 잘 못 잤지?”
윤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현은 그를 공원 벤치로 데려가 앉히고 조용히 물었다.
“단순히 힘든 건 괜찮아. 누구나 힘든 시기가 있으니까.
근데… 너는 힘든 걸 힘들다고 말할 시간을 안 주는 것 같아.”
그 말이 윤재의 가슴 한가운데에 예리하게 꽂혔다.
그는 시선을 내렸다.
“나… 지금 쉬면 안 될 것 같아서.
남들은 다 열심히 하잖아.
쉬면… 나만 뒤처지는 것 같아.”
서현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아니야, 윤재야.
지금 너한테 제일 필요한 건 쉬어도 된다는 ‘허락’이야.
그거 네가 스스로에게 한 번도 준 적 없잖아.”
그 말에 윤재는 눈을 감았다.
서현의 말은 맞았다.
그는 자신을 한 번도 챙긴 적 없고, 자신에게 쉬어도 좋다는 허락조차 내려주지 않았다.
그날, 서현은 그를 도시 외곽의 숲길로 데려갔다.
그곳은 바람이 느리게 움직이는 곳이었다.
오랜만에 맡는 나무 냄새.
바람이 귓가에서 부드럽게 파도치는 소리.
윤재는 자연이 이렇게 멋진 소리를 낸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한 번… 눈 감아봐.”
서현은 말했다.
윤재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심장은 여전히 약간 빠르게 뛰었지만, 조금씩 속도가 늦춰졌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목 깊숙이 차가운 공기가 스며들었다.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얕은 호흡으로 버텼는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는 속으로 아주 조용히 중얼거렸다.
쉬는 게… 이렇게 큰 일이었나.
서현은 미소를 지었다.
“휴식은 생산성의 일부야, 윤재야.
쉴 수 없으면, 일도 못 해.”
그 말은 마치 오래 굳어 있던 혀가 처음 물을 마시는 순간 같았다.
점점 윤재의 표정이 풀렸다.
그날 저녁, 윤재는 바닷가로 걸어갔다.
조용히 파도가 발목에 스치는 감각이 무척 새로웠다.
그는 신기하게도 그 순간에 일을 떠올리지 않았다.
머릿속이 드디어 공간을 갖기 시작했다.



휴식을 허락하는 법
며칠 뒤, 윤재는 처음으로 회사의 눈치를 보지 않고 조퇴를 냈다.
큰 용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 용기는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엄청난 반란이 아니었다.
단지 자신에게 조용한 허락을 내리는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창가에 앉아 따뜻한 차를 끓였다.
향이 코끝에 닿자 마음 깊숙한 곳에서 실타래처럼 얽혀 있던 긴장이 조금씩 풀렸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노트를 펼쳐 새로운 페이지를 열었다.
흰 페이지가 유난히 밝게 느껴졌다.
그는 천천히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오늘 쉬었다.
그리고 그게… 생각보다 훨씬 괜찮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휴식을 ‘낭비’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생존’이었다.”
그는 펜을 내려놓으며 미묘하게 웃었다.
그 순간, 창밖에서 도시의 소음이 들려왔지만, 그 소음이 더 이상 자신을 재촉하는 소리처럼 들리지 않았다.
도시의 빠른 속도는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그는 그 속도에 맞추지 않아도 되었다.
윤재는 창을 활짝 열고 공기를 들이마셨다.
햇빛은 노란빛을 띠고 그의 얼굴을 감싸며 따뜻하게 내려앉았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쉬어도 괜찮다.
멈춰도 괜찮다.
내가 멈춘다고 해서 세상은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멈추지 않으면, 나는 무너진다.
그는 마침내 자신에게 속삭일 수 있었다.
“괜찮다, 윤재야. 쉬어도 된다.”
그 작은 문장이 그의 마음속에서 용수철처럼 퍼져 나갔다.




오랫동안 누적되었던 죄책감의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윤재는 조금씩 달라졌다.
아침의 햇빛을 눈으로 느끼는 시간을 만들었고,
점심에는 진짜 밥을 먹었으며,
일요일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정식으로 일정표에 기록했다.
놀랍게도, 그의 업무 능력은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집중력과 정확성이 좋아졌다.
서현이 말했던 것처럼, 휴식은 생산성을 먹고 자라는 토양 같은 것이었다.
윤재는 어느 날 노트의 첫 페이지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이제 내가 나를 지키는 사람이 되겠다.”
그 문장을 적자 가슴 깊이 환한 불빛이 켜지는 듯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는 도시의 황금빛이 번지는 거리에서 천천히 걸었다.
걸음이 가벼웠다.
발이 땅을 딛는 감각이 새로웠다.
잠시 멈춘다고 해서
내 삶이 멈추는 것은 아니다.
잠시 쉬는 일이
나를 약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휴식은
나를 다시 시작하게 만드는
가장 조용한 용기였다.
윤재는 오늘도 그 사실을 배워 가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배워 갈 것이다.
쉬어도 되는 사람으로,
쉬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으로,
그리고 마침내,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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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화, 목,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