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싶은 고구려 (5)召西奴소서노[1부]

두 나라의 왕조를 세운 여인

by 이 범

프롤로그 — 바람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바람은 늘 북쪽에서 불어왔다.
그리고 그 바람은, 그녀의 일생을 세 번이나 바꾸었다.
태어날 때, 영웅을 만났을 때, 그리고 나라를 떠날 때.사람들은 그녀를 여인이라 불렀지만,
역사는 그녀를 한나라의 어머니이자 또 한나라의 창건자라 기록했다.
그 이름, 소서노.
그녀의 인생은 바람처럼 흘렀지만,
흔적은 강처럼 깊고 나라처럼 넓었다.



푸른 별의 아이, 소서노 (召西奴)

북방의 거상(巨商), 그리고 기이한 밤
​바람은 언제나 북쪽, 동토의 땅 부여에서 시작되어 대지를 훑었다. 그 시린 바람이 가장 먼저 닿는 곳, 졸본(卒本) 지역에는 거상 연타발의 거대한 저택이 성채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중원과 북방을 오가는 수많은 상단이 반드시 거쳐 가는 곳, 연타발의 집은 낮에는 재물이 오가는 소리로 소란스러웠고, 밤에는 각지에서 모여든 무사들과 상인들의 열기로 뜨거웠다.
​연타발은 막대한 부를 가졌으나, 그의 눈빛은 늘 허기를 담고 있었다. 그는 단순히 재물을 모으는 장사치가 아니었다. 그는 세상의 흐름을 읽고, 사람을 모아 세력을 만드는 야심가였다. 그러나 그의 야심을 온전히 물려받을 핏줄은 아직 태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 겨울, 유난히 혹독한 추위가 졸본을 덮친 밤이었다. 하늘은 먹물처럼 검었고, 북풍은 성난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연타발의 안채에서는 산통이 시작된 부인의 신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밖을 서성였다. 난산이었다. 산파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오가고, 뜨거운 물동이가 쉴 새 없이 들어갔다.
​그때였다. 자정을 넘기자, 거짓말처럼 바람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먹구름이 갈라진 틈으로, 이제껏 본 적 없는 기이한 달빛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차가운 은색이 아니었다. 심연처럼 깊고, 보석처럼 영롱한 '푸른색' 달빛이었다. 그 푸른 광휘는 연타발의 지붕을 뚫고 산실(產室)로 곧장 내리꽂혔다.


하늘을 깨우는 울음소리
​"으아앙! 으아앙!"
​푸른 빛이 방안을 가득 채운 순간, 천지를 뒤흔드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갓 태어난 핏덩이의 연약한 울음이 아니었다. 마치 오랫동안 억눌려왔던 거대한 기운이 세상에 자신을 알리는 포효와도 같았다. 그 소리에 마당을 지키던 사냥개들이 깨갱거리며 꼬리를 말았고, 마구간의 말들이 앞발을 들어 올리며 히힝거렸다.



​산파가 떨리는 손으로 아이를 받아들였다. 아이의 몸은 달빛을 머금은 듯 은은한 광채를 띠고 있었고, 무엇보다 갓 태어난 아이의 눈이 감겨있지 않았다. 아이는 그 깊고 검은 눈동자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동자 깊은 곳에 푸른 달빛이 서려 있었다.



​연타발이 산실로 뛰어 들어왔다. 그는 강보에 싸인 아이를 안아 들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멈추고, 부녀의 눈이 마주쳤다. 수많은 전장을 누비고, 수천 명의 사람을 부려온 천하의 연타발이었지만, 그 순간 그는 설명할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그는 아이를 안고 마당으로 나가 푸른 달을 올려다보며 외쳤다.
​"보아라! 이 아이는 하늘이 내린 아이다. 이 울음소리가 잠든 하늘을 깨웠도다! 내 너를 '소서노'라 부르리라!"




​소서노는 성장할수록 그 비범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또래 아이들이 소꿉장난을 할 때, 아버지의 상단 행렬을 지켜보며 물건의 가치를 논했다. 그녀의 총명함은 칼날처럼 예리했고, 직관은 점술가보다 정확했다.




​대륙을 떠도는 거친 도자기 장수들도 어린 소서노 앞에서는 거짓을 고하지 못했다. 그녀의 깊은 눈동자가 자신들의 속내를 꿰뚫어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수십 명의 장정을 이끄는 거친 영수(領袖)들조차 열 살도 안 된 소녀의 단호한 명령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에게는 사람을 압도하는 태생적인 위엄이 있었다.





폭풍을 부르는 소녀
​열다섯이 되던 해, 소서노는 이미 졸본 지역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녀는 아버지 연타발을 대신해 상단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도 했고, 때로는 직접 말을 타고 국경 근처를 달리며 지형을 익혔다.




​어느 날, 북쪽 흉노의 땅에서 온 상인이 연타발에게 아주 귀한 선물을 바쳤다. 눈처럼 하얀 털을 가졌으나, 성질이 불 같아 아무도 등에 태우지 않은 야생마 '백룡(白龍)'이었다. 수많은 장사가 백룡을 길들이려다 나뒹굴었고, 심지어 뼈가 부러지기도 했다.



​연타발이 혀를 차며 말을 가두라 명했을 때, 소서노가 나섰다.
​"제가 해보겠습니다, 아버지."
​모두가 만류했지만,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날 밤, 소서노는 홀로 마구간으로 향했다. 보름달이 뜬 밤이었다. 그녀는 백룡의 우리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흥분하여 날뛰던 백룡이 그녀를 향해 돌진하려던 순간, 소서노는 멈춰 서서 말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태어날 때부터 지녔던 그 푸른 기운이 그녀의 눈동자에서 일렁였다. 짐승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자신의 앞에 선 존재가 자신보다 더 강하고 거대한 영혼을 지녔음을. 백룡의 거친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소서노는 천천히 다가가 말의 목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단 한 번의 도약으로 말의 등에 올랐다.



​백룡은 밤새 졸본의 들판을 질주했다. 소서노는 말갈기가 바람에 날리는 것을 느끼며, 달빛 아래 펼쳐진 광활한 대지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녀의 가슴 속에서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불씨가 거대한 불길로 타올랐다.



​'나는 상인의 딸로 생을 마감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연타발의 딸 소서노가 아니다. 나는 이 땅에 새로운 길을 열고, 사람들을 이끌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다짐이 아니었다. 훗날 두 개의 제국을 세우게 될 거대한 운명의 서막을 알리는 자각이었다.



운명의 바람을 기다리며
​백룡을 길들인 사건 이후, 사람들은 소서노를 단순한 '여인'으로 보지 않았다. 그녀는 연타발 가문의 실질적인 후계자이자, 졸본의 젊은 지도자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녀의 주변으로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지혜로운 자, 용맹한 자, 기술을 가진 자들이 그녀의 그늘 아래 모여 미래를 도모했다.
​어느 날 저녁, 소서노는 말을 타고 높은 언덕에 올랐다. 저 멀리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녀의 옷자락을 거세게 흔들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머지않아 이 북풍에 실려,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꿀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가 찾아오리라는 것을.




​그녀는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녀는 바람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불어라, 더 거세게 불어라. 내 기꺼이 너를 맞이하여, 이 땅에 새로운 역사를 새길 것이니."
​푸른 별 아래 태어난 아이, 소서노. 그녀의 눈은 이미 부여의 국경 너머, 아직 오지 않은 찬란한 제국의 미래를 응시하고 있었다



. 그녀 자체가 거대한 바람이 되어 세상을 뒤흔들 준비를 마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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