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의마음
책방 문을 열면 은은한 종소리가 울렸고,
발걸음에 따라 오래된 나무 마루가 낮게 삐걱였다.
햇살은 서가 틈으로 흘러 들어와 책들 위에 부드럽게 머물렀다.
그날, 바로 그 따사로운 오후.
문이 열리며 누군가의 조심스러운 발걸음이 들어섰다.
“소연 님, 최종 원고 넘겨주셔야 해요.”
출판사 편집자 지훈이었다.
그는 숨을 고르듯 말하며 책방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언제 와도 차분했다.
세상이 아무리 복잡해도 이 작은 서재만큼은
늘 고요라는 이름의 천장을 달고 있었다.
조용히 서가 사이에서 나오던 소연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오셨어요.”
소연은 손에 쥐고 있던 작은 USB를 지훈에게 내밀었다.
손끝이 아주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라
지훈은 허투루 받지 않았다.
“이 안에… 제 마음이 다 들어 있어요.”
지훈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 마음,
많은 사람에게 닿을 수 있도록
잘 담아보겠습니다.”
말이 끝났을 때,
책방 안의 공기가 아주 잠시 정지한 듯 느껴졌다.
몇 년 동안 쌓아온 작은 감정들,
밤마다 울면서도 써내려갔던 문장들,
책방을 지키며 사람들에게 건넸던 조용한 온기들이
저 USB 하나에 담겨 있었다.
소연은 깊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제 진짜 시작이네요.”
편집자가 돌아간 뒤,
소연은 책방 구석의 작은 테이블에 앉았다.
곁에는 준혁이 앉아 있었다.
아메리카노 향기가 퍼지고,
초가을 햇살이 유리창을 타고 내려와
두 사람의 손등 위에 부드럽게 걸렸다.
“준혁아.”
소연이 긴 호흡 끝에 입을 열었다.
“이 책이 나오면,
우리 이야기가 진짜로 세상에 나가는 거야.”
준혁은 커피잔을 내려놓고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 손은 예전에 비해 훨씬 따뜻해져 있었다.
“그 이야기는 이미 많은 사람에게 닿았어.”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단단했다.
“책은 그걸 조금 더 멀리 데려다줄 뿐이야.”
소연은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문 너머 은행나무 잎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 작은 흔들림에도 마음이 요동쳤다.
“책방을 시작할 때는,
그저 숨 쉴 공간이 필요했는데…”
그녀의 눈빛이 조용히 흔들렸다.
“이제는 누군가에게 숨을 건네는 사람이 된 것 같아.”
준혁은 미소 지었다.
말보다 먼저, 마음이 환하게 빛나는 미소였다.
“그게 너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
“조용하지만 단단한 사람.”
그 말에 소연의 눈가가 아주 가볍게 젖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누군가의 말에 울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눈물이 부끄럽지 않았다.
하지만 책이 세상에 나온다는 사실은
기쁨만 가져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날 밤, 책방이 문을 닫힌 뒤
소연은 홀로 서가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책들 사이로 어둠이 내려앉고,
달빛이 창으로 흐르며 바닥에 긴 그림자를 남겼다.
‘정말 괜찮을까…?’
그녀는 어느 순간 멈춰 섰다.
이 책은 단순한 에세이가 아니었다.
책방을 열게 된 이유,
상처받았던 시절,
다시 일어서기까지의 흔들림,
그리고 준혁과의 사랑.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문득 누군가 읽고
그녀의 연약함을 함부로 말할까 봐 두려웠다.
책방이라는 안전한 둥지 밖으로
알몸의 마음을 내보내는 것 같은 두려움.
그때 뒷문이 살짝 열렸다.
바람 소리 같았지만
익숙한 발자국이 묻어 있었다.
“여기 있었네.”
준혁이었다.
소연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읽고 있었다.
“무서워?”
그의 질문은 다정했지만 정확했다.
소연은 잠시 머뭇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이상하게 보면 어떡해…
나를 약한 사람이라고만 보면 어떡해…”
준혁은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두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약한 건 잘못이 아니야.
그리고 너는 약한 사람도 아니고.”
소연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달빛 속에서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했다.
“네가 쓴 건 상처가 아니라,
상처를 지나온 사람이 남긴 길이야.
그걸 따라올 사람이 분명히 있을 거야.”
그 말에
소연의 마음 깊은 곳에서
오래 잠들어 있던 불빛 하나가
작게 깨어났다.
며칠 뒤,
두 사람은 책방 한쪽 벽에
아주 작은 메모 하나를 붙였다.
“달빛 서재 — 한 권의 마음이 태어난 자리”
종이 한 장이었지만
책방의 공기가 따뜻하게 흔들렸다.
마치 오래된 나무가 새 잎을 틔우는 순간처럼.
책은 아직 인쇄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마음은 이미
이 조용한 책방 안에 퍼지고 있었다.
책을 기다리는 손님들이
그들의 눈빛을 통해,
그리고 책방 문을 열며 건네는 조용한 인사 속에서
그 마음의 온도가 보였다.
어느 늦은 오후,
두 사람은 서가 사이에 서 있었다.
창밖의 햇살은 점점 금빛에서 주황빛으로 변해 갔다.
“준혁아.”
소연이 조용히 말했다.
“고마워.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네가 내 옆에 있어줬기 때문이야.”
준혁은 잠시 말없이 바라보다
그녀의 손을 살짝 잡았다.
“우리가 같이 만든 이야기야.
네 책도, 이 책방도,
그리고 우리가 걸어온 길도.”
그 순간,
문 앞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손님 한 명이 들어오고,
책 냄새와 따끈한 온기가 다시 퍼져 나갔다.
소연은 천천히 미소 지었다.
이곳은 이제 더 이상
그녀만의 피난처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마음이 쉬어 가는 자리.
그리고 언젠가 다시
세상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는 자리.
달빛 서재는
그렇게 한 권의 마음이 태어나는
작은 세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