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문장들의 탄생
책이 도착한 날
“소연 씨, 책 도착했어요.”
문을 열고 들어온 보현출판사 직원의 목소리는
책방의 조용한 공기를 가볍게 흔들었다.
늦은 오후의 빛은 책방 안에 길고 부드러운 금색 선을 드리우고 있었고,
‘달빛 서재’라 불리는 이 작은 서점 한쪽에는
아직 뜯지 않은 종이박스 하나가 놓여 있었다.
직원이 나가자, 소연은 잠시 그 박스 앞에서 멈춰 섰다.
마치 오래전 헤어졌던 누군가를 다시 만나는 것처럼
숨이 조금 빠르게 뛰었다.
박스를 열자 고운 크림색 표지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달빛 서재: 조용한 문장들’
제목 아래 놓인 작디작은 자신의 이름.
손끝으로 살짝 문지르자
먹빛 글자는 낮은 숨결처럼 촉촉하게 느껴졌다.
소연은 책을 품에 안듯 천천히 들어 올렸다.
바스락—
첫 페이지를 넘길 때 울리는 아주 작은 소리.
그 소리는 그녀의 심장 속 어떤 오래된 방을
천천히 열어젖히는 키처럼 느껴졌다.
“이게… 진짜로 세상에 나왔네요.”
그녀의 목소리는 들릴락 말락한 속삭임이었다.
준혁이 커피 두 잔을 들고 다가왔다.
“축하해.”
그의 눈빛은 그 어떤 문장보다 따뜻했다.
“이제 너의 글이…
정말로 누군가의 하루에 닿을 수 있어.”
첫 독자
그날 오후,
책방 문이 조용히 열렸다.
종이 풍경이 달린 문고리가 작은 소리를 냈다.
한 남자가 조심스레 책을 들고 다가왔다.
손에 들린 것은 바로
‘달빛 서재: 조용한 문장들’ 첫 인쇄본.
“소연 님이 쓰신… 이 책 맞죠?”
그의 목소리는 떨렸고,
표지를 어루만지는 손끝 역시 조심스러웠다.
“네.”
소연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표지부터 마음이 따뜻해져요.
아직 읽지도 않았는데…
왠지 위로받는 기분이에요.”
그 순간,
소연의 심장 한가운데서
아주 작은 빛이 피어 오르는 듯했다.
“그 문장들이…”
소연은 천천히 말했다.
“당신의 하루에
조용히 스며들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 남자는 책을 꼭 끌어안듯 품고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서점 문을 나섰다.
그 짧은 발걸음 속에서
소연은 이상하게도
자신의 이야기가
누군가의 세계로 아주 조용히 스며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그녀의 문장들이
읽히기 전부터
이미 누군가의 마음을 향해
그림자처럼 걸어가고 있는 듯했다.
마지막 페이지의 의미
손님이 떠난 뒤,
책방에는 기타 선율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초가을 바람이 살짝 들어와
바싹 마른 책갈피처럼 가볍게 흔들렸다.
소연은 창가 자리에 앉아
첫 출판본을 다시 펼쳤다.
마지막 페이지로 천천히 넘기자
자신이 썼지만
마치 누가 대신 적어둔 듯한 문장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나 자신에게도 조용한 위로를 건넬 수 있다.
그게 이 책방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이다.”
소연은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 글은 어느 맑은 새벽,
숨이 막히도록 벅차던 고독을 견디던 어느 순간에
조용히 떨어졌던 눈물 한 방울처럼
아직도 생생했다.
준혁이 그녀 옆에 앉아 조용히 말했다.
“그 선물… 이제 많은 사람들과 나눌 수 있게 됐네.”
그 말은
이 책방의 공기와 함께
부드럽게 퍼져 나갔다.
소연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햇살은 나뭇잎을 비추며
작은 금빛 먼지들을 서성이게 만들었다.
사람들이 지나가며 남기는 그림자,
길 위에 반짝이며 떨어지는 나뭇잎들.
그 모든것이 하나의 문장처럼 느껴졌다.
“준혁아.”
소연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내가 이곳에서 얼마나 숨을 배우고
얼마나 살아냈는지를 말하고 싶었어.”
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걸 느끼는 거겠지.”
새로운 시작
해가 기울고
책방 안 조명이 따스한 빛으로 깊어질 무렵,
소연은 책 한 권을 조용히 정리대 위에 올려두었다.
첫 판매 기록.
첫 독자의 손길.
첫 책의 탄생.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에게 건네는 온전한 위로.
창밖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유난히 가볍게 들렸다.
햇살은 점점 저물어가며
책방 안의 크림색 표지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준혁이 잠시 책장을 훑으며 말했다.
“이제 시작이네.”
소연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책 향기와 커피 향,
살아있는 종이의 바스락거림…
그 모든 것이 그녀에게 말하는 듯했다.
‘그래, 이제 시작이야.’
그날,
두 사람은
첫 독자의 발걸음 속에서
자신들의 이야기가 세상에 닿았음을 실감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새로운 문장을 향해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걸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