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속의 신의흔적 (25)

꽃집 할머니의 꽃말

by seungbum lee



작은 골목에 있는 꽃집. 70대 할머니 순자가 40년 동안 운영하고 있었다. 요즘은 대형 꽃집이나 인터넷 주문이 많아져서 손님이 줄었지만, 순자는 가게를 닫지 않았다.

"꽃은 말을 할 수 있어요. 사람들이 전하지 못하는 마음을 꽃이 대신 전하죠."

순자는 늘 그렇게 말했다.

아침 9시, 가게 문을 여는데 20대 청년이 들어왔다. 얼굴이 창백하고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밤을 샌 것 같았다.

"어떤 꽃 찾으세요?"

청년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아버지... 산소에 놓을 꽃이요."

목소리가 떨렸다.


순자는 조용히 국화를 골랐다. 하얀 국화와 노란 국화. 청년은 가만히 지켜보다가 물었다.

"할머니, 왜 하필 국화예요? 그것도 두 가지 색으로요?"

순자는 청년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얀 국화는 '진실'이라는 꽃말이 있어요. 돌아가신 분께 진심을 전하는 거죠. 노란 국화는 '슬픈 사랑'이에요. 떠나보낸 슬픔을 표현하는 거예요."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눈물이 흘렀다.

"할머니... 저 아버지한테 잘못했어요. 마지막에 크게 싸웠거든요. '나는 아버지 인생대로 살지 않을 거예요'라고 소리쳤어요. 그게... 마지막 말이었어요. 3일 후에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어요."

순자는 청년의 손을 잡았다.

"얼마나 힘들었니. 후회되겠구나."

"이제 사과도 못해요. 용서를 빌 수도 없어요. 제가... 제가 아버지를 죽인 거예요."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

순자는 꽃다발에 노란 장미 한 송이를 더했다.

"노란 장미는 뭐예요?"

"'우정'이에요. 아버지와 아들은 가족이기 전에 친구가 될 수도 있어요. 아버지도 젊었을 때 자기 아버지와 싸웠을 거야. 다 그래. 그래도 사랑은 변하지 않아."

순자는 마지막으로 작은 안개꽃을 추가했다.

"안개꽃은 '감사'예요. 비록 마지막에 싸웠어도, 네가 아버지께 감사한 순간들이 있었을 거야. 그걸 기억해. 그게 진짜 너의 마음이야."


청년은 꽃을 받아 들고 한참을 서 있었다. 순자는 뒤로 돌아가 차를 준비했다.

"앉아. 잠깐 차 마시고 가."

"저... 다른 일정이 있어서요."

"5분만. 할멈 부탁이야."

청년은 할 수 없이 앉았다. 순자는 따뜻한 대추차를 건넸다.

"밤 샜지? 얼굴에 다 써 있어."

"네... 산소 앞에서 밤새 울었어요."

순자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도 아들을 잃었어. 30년 전에. 교통사고였지. 그것도 싸우고 나간 날이었어."

청년은 놀라서 순자를 바라봤다.

"마지막 말이 뭔지 알아? '엄마는 날 이해 못 해'였어. 아들은 화가 나서 집을 나갔고, 그날 밤 사고가 났지. 그게 마지막이었어."

"할머니..."

"그 후로 30년 동안 매주 아들 산소에 꽃을 가져가. 처음엔 사과하려고 갔어. '미안해, 엄마가 이해 못 해줘서.' 근데 어느 날 깨달았어. 아들은 이미 날 용서했을 거라는 걸. 아니, 용서할 필요도 없었던 거야. 엄마와 아들 사이에 용서가 필요해? 사랑으로 다 덮이는 거지."

청년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순자는 계속 말했다.

"네 아버지도 마찬가지야. 이미 다 이해하고 계셔. 아들이 자기 길을 가려는 거, 당연한 거잖아. 화내셨어도, 속으로는 자랑스러웠을 거야."

"정말... 그럴까요?"

"그럼. 내가 엄마니까 알아. 부모는 다 그래. 겉으로는 화내도, 속으로는 항상 응원해."

순자는 청년에게 작은 쪽지를 건넸다.

"이거 산소에 놓고 와. 내가 써줄게."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서 행복했습니다."


청년은 쪽지를 꼭 쥐고 일어났다.

"할머니, 정말 감사합니다. 할머니를 만난 게 기적 같아요."

"기적이 아니야. 하나님이 너를 여기로 보내신 거지. 나를 통해 위로하시려고."

"할머니... 저 다시 와도 될까요?"

"그럼. 언제든지 와. 할멈이 차 대접할게."

청년이 떠난 후, 순자는 꽃을 정리하며 기도했다.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상처 입은 영혼을 만나게 하시고, 위로할 수 있게 하시니."

일주일 후, 청년이 다시 왔다. 이번에는 표정이 밝았다.

"할머니!"

"어, 왔구나. 어때, 좀 나아졌어?"

"네. 할머니 말씀대로 산소에 다녀왔어요. 쪽지도 놓고, 한참 이야기했어요. 그랬더니... 마음이 편해졌어요."

"다행이다."

"그리고요, 이거 드릴게요."

청년은 봉투를 건넸다. 순자가 열어보니 편지였다.

"할머니, 저는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있어요. 원래는 아버지가 원하는 의대에 가려고 했는데, 제가 하고 싶은 공부를 선택했어요. 그게 싸움의 원인이었죠. 근데 이제 알았어요. 아버지도 제가 행복하기를 바라셨다는 걸. 할머니 덕분에 깨달았어요. 저 열심히 공부해서 할머니처럼 사람들을 위로하는 사람이 될게요. 감사합니다. - 준혁"

순자는 편지를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날 이후, 준혁은 자주 꽃집을 찾았다. 순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꽃말을 배우고, 인생에 대해 배웠다.

2년 후, 준혁은 대학원에 진학했다. 상담심리학 전공이었다. 그리고 졸업 논문 주제는 '꽃을 통한 치유 - 원예치료의 가능성'이었다.

순자는 준혁의 연구를 도왔다. 꽃집 한쪽을 연구 공간으로 내줬고, 손님들에게 꽃말을 설명할 때의 반응을 함께 관찰했다.

연구 결과는 놀라웠다. 적절한 꽃말과 함께 꽃을 선물받은 사람들은 심리적 안정감이 크게 향상됐다.

3년 후, 준혁은 심리상담센터를 열었다. 센터 이름은 '꽃말 치유센터'. 상담실마다 꽃이 놓여 있었고, 상담이 끝나면 내담자에게 꽃과 함께 꽃말을 적은 카드를 선물했다.

개원식 날, 준혁은 순자를 초대했다.

"할머니, 여기 주인은 할머니예요. 할머니가 없었으면 저도, 이 센터도 없었을 거예요."

순자는 센터를 둘러보며 눈물을 흘렸다.

"내가 평생 꽃을 팔면서 전하고 싶었던 게 이거였어. 꽃은 단순히 예쁜 게 아니라, 마음을 전하는 거라는 걸."

"할머니가 가르쳐주셨어요. 그리고 이제 저를 통해 더 많은 사람에게 전해질 거예요."

준혁의 센터는 유명해졌다. 사람들은 상담도 받고, 꽃의 의미도 배웠다. 한 여성은 남편과의 갈등을 풀기 위해 왔다가, 빨간 장미(사랑)와 백합(순수)을 선물받고 눈물을 흘렸다.

"제가 잊고 있었던 거네요. 우리가 처음 사랑했을 때의 마음을요."

한 아버지는 딸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왔다가, 거베라(희망)와 프리지아(우정)를 받았다.

"딸한테 이걸 주면서 이야기해 볼게요. 아빠가 항상 널 응원한다고."

어느 날, 준혁이 순자에게 전화했다.

"할머니, 큰 병원에서 제안이 들어왔어요. 암 병동에 원예치료 프로그램을 만들어달래요. 할머니, 같이 해주시겠어요?"

"그럼! 내 평생 소원이야. 꽃으로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는 거."

순자는 75세의 나이에 병원 원예치료사가 됐다. 매주 암 병동을 찾아가 환자들과 함께 꽃을 심고, 꽃말을 나눴다.

말기 암 환자인 한 할아버지가 물었다.

"할머니, 죽음을 앞둔 사람한테는 어떤 꽃을 주나요?"

순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미소 지었다.

"보라색 히아신스요. 꽃말은 '슬픔을 넘어선 사랑'이에요. 죽음도 사랑을 끝낼 수 없다는 뜻이죠."

할아버지는 눈물을 흘렸다.

"아름답군요. 그 꽃을 우리 아내에게 주고 싶어요."

순자는 직접 보라색 히아신스를 키워서 할아버지에게 선물했다. 할아버지는 그 꽃을 안고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에서 할아버지의 아내가 순자에게 말했다.

"할머니, 남편이 마지막에 웃으면서 떠났어요. 꽃을 안고서요. 할머니가 주신 위로 덕분이에요."

순자는 그날 밤, 꽃집으로 돌아와 기도했다.

"주님, 40년 동안 이 작은 꽃집을 지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꽃을 통해 사람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전할 수 있게 하시니 영광입니다."

꽃집 창문으로 달빛이 들어왔다. 가게 안의 꽃들은 조용히 빛났다. 장미, 백합, 국화, 프리지아. 각각의 꽃말을 품고.

순자는 꽃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하나님은 왜 세상에 이렇게 많은 꽃을 만드셨을까? 아마도 우리에게 말하고 싶으셨던 거야. 말로 하기 어려운 것들을. 사랑, 용서, 희망, 위로. 그 모든 것을 꽃에 담으신 거야.'

준혁은 지금도 매주 순자의 꽃집을 찾는다. 센터에 필요한 꽃을 사러 오는 게 아니라, 순자를 만나러 온다.

"할머니, 오늘 어떤 꽃말 배울까요?"

"오늘은 은방울꽃 알려줄게. '다시 찾아온 행복'이라는 뜻이야."

"할머니를 만난 게 저한테는 '다시 찾아온 행복'이에요."

순자는 손자처럼 여기는 준혁의 손을 잡았다.

"너도 나한테 그래. 아들을 잃은 내게 하나님이 다시 보내주신 선물이야."

40년 된 작은 꽃집. 세월이 흘러도 그곳에는 항상 꽃이 피어 있다. 그리고 그 꽃들은 오늘도 말한다.

"당신은 사랑받고 있습니다."

"당신은 소중합니다."

"포기하지 마세요."

신은 꽃잎 하나에도 계시고, 꽃말 속에도 계신다.

그리고 40년 동안 작은 꽃집을 지키며 사람들의 마음을 이어준 할머니의 손길 속에도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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