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Rose of Sharon천년의 수호자

꽃말=;일편단심, 끈기

by 이 범


시간을 넘어선 만남
2024년 서울 경복궁, 늦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광화문 앞 석판을 달구고 있었다.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분주한 그 순간, 시공간의 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갑자기 나타난 한복 차림의 여인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이름은 무궁(無窮), 삼국시대부터 이 땅을 지켜온 무궁화의 정령이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 연보랏빛과 붉은빛이 어우러진 우아한 한복, 그리고 가슴 중앙에 선명한 붉은 심지처럼 빛나는 루비 브로치가 그녀의 정체를 암시했다.



"1500년을 지켜왔건만, 이 시대는 또 어찌 이리 낯선가."



무궁의 눈에 비친 현대 서울은 경이로웠다. 하늘을 찌를 듯한 빌딩들, 쉼 없이 달리는 자동차들, 손안의 작은 기계를 들여다보며 걷는 사람들. 그녀는 천천히 경복궁 담장을 따라 걸었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궁궐 한편에 자신의 후손들이 피어있었다. 여전히 아침마다 새로운 꽃을 피우고 저녁이면 스러지는, 끝없는 순환의 아름다움.




"누님! 여기 계셨습니까!"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것은 젊은 남성이었다. 하얀 도포 같은 옷에 청록색 띠를 두른 그는 맥문동(麥門冬), 약초의 정령이었다. 그의 손에는 오래된 두루마리가 들려 있었다.
"무슨 일이냐, 맥문동?"
"큰일났습니다. 서양의 독초 정령들이 이 땅에 침입했습니다. 그들은 우리 토종 식물들을 몰아내고 자신들의 영역을 넓히려 합니다."
무궁의 표정이 굳어졌다.
"독초라니?"
"예, 투구꽃을 흉내낸 아코니툼의 서양 변종들과 미국자리공의 무리들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약초인 척 접근해 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약초와 독초의 경계
다음날 새벽, 북한산 자락의 약초밭.
무궁은 이곳에 모인 토종 식물 정령들과 마주했다. 인삼(人蔘), 도라지(桔梗), 당귀(當歸), 황기(黃芪)... 수백 년, 수천 년을 이 땅의 사람들을 치유해온 약초들의 정령들이었다.
"저희 인삼 가문은 이미 영역의 30%를 빼앗겼습니다."
흰 수염을 기른 노인의 모습을 한 인삼이 침통하게 말했다.
"서양에서 건너온 서양삼(西洋蔘)들이 '우리가 더 재배하기 쉽다'며 농부들을 현혹하고 있습니다."
젊은 여성의 모습을 한 도라지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더 심각한 건 독초들입니다. 백부자(白附子)를 사칭한 서양 아코니툼이 한약재 시장에 섞여 들어와 사람들에게 중독 사고를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제 우리 토종 약초들까지 의심의 눈초리로 봅니다!"
무궁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기억 속으로 천 년의 역사가 흘러갔다.
신라 시대, 화랑들은 무궁화를 '근화(槿花)'라 부르며 불사(不死)의 상징으로 여겼다. 아침마다 새로 피어나는 그 생명력을 본받고자 했다. 고려 시대에는 이규보가 무궁화를 노래했다. 조선 시대에는 궁궐마다 무궁화를 심어 나라의 무궁한 번영을 기원했다.
"그래서 내가 존재한다."
무궁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눈동자가 붉은 빛으로 빛났다.
"나는 무궁화, 이 땅의 첫 번째 수호자. 약초와 독초를 구분하는 지혜를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우리 토종의 가치를 증명해 보이겠다."


생사의 경계에서
그날 밤, 서울대학교병원 응급실.
"급성 아코니틴 중독 환자입니다!"
들것에 실려온 50대 남성은 심한 경련과 함께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는 산행 중 약초로 착각하고 야생 식물의 뿌리를 캐어 먹었다가 쓰러진 것이다.
"혈압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부정맥이 심각합니다!"
의료진이 급히 해독제를 투여했지만 환자의 상태는 악화일로였다.
그때, 응급실 창문 밖에서 무궁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붉은 도포를 입은 위협적인 남성이 서 있었다. 서양 아코니툼의 정령, 독침(毒針)이었다.
"보았느냐, 무궁화여. 우리의 힘을. 단 3그램으로 성인 남성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
"비겁한 짓이다. 약초를 사칭하여 사람을 해치다니."
"사칭?" 독침이 비웃었다. "우리 역시 서양에서는 약으로 쓰인다. 통증 완화, 진통 효과. 다만 용량과 사용법을 모를 뿐이지."
"그것이 바로 문제다!"
무궁이 손을 들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붉은 빛이 흘러나와 응급실 안으로 스며들었다. 동시에 밖에서 누군가가 급히 달려왔다.
"한의사입니다! 저 환자, 제가 알아요!"
70대 노한의사가 헐떡이며 응급실로 들어왔다. 그는 손에 작은 약초 다발을 들고 있었다.
"저 사람이 캐어 먹은 건 서양 투구꽃입니다. 우리 토종 투구꽃과 비슷하지만 독성이 훨씬 강하죠. 그러나 감초(甘草), 생강(生薑), 그리고..."
노한의사가 마지막 약초를 꺼내들었다.
"우리 무궁화 뿌리의 해독 성분이 필요합니다."
의료진이 놀란 표情으로 그를 바라봤다.
"무궁화에 해독 성분이 있습니까?"
"있고말고요. 예로부터 무궁화는 단순히 관상용이 아니었습니다. 꽃은 적리(赤痢)와 설사를 치료하고, 뿌리껍질은 해독과 이뇨 작용이 있으며, 잎은 피부병에 썼습니다. 특히 알칼로이드 중독에 대항하는 성분이 있어요."
의료진과 한의사의 협력으로 환자에게 긴급 처방이 투여되었다. 무궁이 흘려보낸 기운이 한의사를 이끌어 온 것이었다.
30분 후, 환자의 맥박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경련이 멈추고 호흡이 고르게 돌아왔다.
창밖에서 지켜보던 독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운이 좋았을 뿐이다."
"아니다." 무궁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 토종의 힘이다. 수천 년간 이 땅의 사람들과 함께하며 쌓아온 지혜와 조화. 너희 외래종은 흉내낼 수 없는 것이지."
결(結



천년의 지혜
일주일 후, 경복궁 향원정.
무궁은 회복된 환자와 그를 살린 노한의사를 불렀다. 시간의 틈을 통해 그들은 무궁을 볼 수 있었다.
"당신들 덕분에 귀한 생명을 구했습니다." 환자가 깊이 절을 했다.
"아닙니다." 노한의사가 무궁에게 공손히 고개 숙이며 말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선조들이 물려준 지혜이고, 무궁화님께서 지켜오신 것이지요."
무궁이 미소지었다.
"이제 알겠습니까? 약초와 독초의 차이는 종종 한 끝 차이입니다."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원 곳곳에 피어있는 토종 꽃들이 빛을 발했다.
"인삼, 당귀, 황기, 도라지... 우리 약초들은 단순히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의 기운을 받아 이곳 사람들의 체질에 맞게 진화해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토종의 힘입니다."
"반면 독초들도 쓰임이 있습니다. 투구꽃의 오두(烏頭)는 제대로 포제(炮製)하면 풍습(風濕)을 다스리는 명약이 됩니다. 미국자리공도 소량은 이뇨와 해독에 쓰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궁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지식과 분별력입니다. 독초와 약초를 구분하는 지혜, 올바른 용법을 아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것의 가치를 아는 것."
노한의사가 물었다.
"그런데 왜 무궁화이십니까? 왜 당신이 우리 토종 식물들의 대표이신지요?"
무궁의 눈에 천 년의 세월이 담겼다.
"나는 매일 아침 새로 태어납니다. 전날의 꽃이 지고 새 꽃이 피어납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재생과 부활의 상징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그것을 보며 깨달았습니다. 시련이 와도, 외세가 침입해도, 우리는 다시 일어선다고. 무궁화의 '무궁(無窮)'은 단순히 끝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련을 이겨내는 생명력, 끝없이 다시 피어나는 희망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기 있습니다. 1500년 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이 땅의 모든 생명을 지키는 수호자로서."
환자가 감동에 겨워 눈물을 닦았다.
"감사합니다. 이제 알겠습니다. 제가 산에서 함부로 풀을 캐먹은 것은 조상들의 지혜를 무시한 오만이었습니다."
"앞으로는 제대로 배우겠습니다. 우리 약초를 구분하는 법, 독초를 조심하는 법, 그리고 우리 것의 소중함을."
무궁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당신의 경험이 다른 이들에게 교훈이 될 것입니다. 이제 가서 전하십시오. 우리 토종 식물의 가치를, 약초와 독초를 구분하는 지혜를."
그날 이후, 노한의사와 회복한 환자는 함께 '토종 약초 바로 알기' 캠페인을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무궁화의 약용 가치를 알리고, 토종 약초와 외래 독초를 구분하는 법을 교육했다.
독침과 서양 독초 정령들은 물러났다. 그들도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천 년을 이어온 토종의 뿌리, 그 깊이를.
무궁은 다시 시간의 틈 사이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녀의 후손들은 여전히 매일 아침 새로 피어난다. 경복궁에서, 남산에서, 전국 방방곡곡에서.
사람들은 이제 무궁화를 볼 때마다 기억한다.



이 꽃이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지키는 수호자였음을. 약이 되고 독을 해독하는 지혜를 담고 있었음을.
그리고 무엇보다, 끝없이 다시 피어나는 희망의 상징임을.



21세기의 아침 햇살 아래, 무궁화는 오늘도 붉은 심지를 당당히 드러내며 피어난다. 천 년의 수호자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나는 여기 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무궁(無窮)하게."




무궁화찬가(無窮花讚歌)
朝開暮落槿花紅(조개모락근화홍)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지는 붉은 무궁화여
不死之心繼萬代(불사지심계만대)
죽지 않는 마음으로 만대를 잇는구나



日日新生展本色(일일신생전본색)
날마다 새로 태어나 본색을 펼치니
無窮生命護邦疆(무궁생명호방강)
무궁한 생명으로 나라의 강토를 지키네



紅心一點藥中王(홍심일점약중왕)
붉은 심지 한 점, 약 중의 왕이로다
解毒扶正萬民康(해독부정만민강)
독을 풀고 바름을 도와 만백성 강건하게 하네



槿域千年不變志(근역천년불변지)
근역의 천 년, 변치 않는 뜻이여
花開花落永無疆(화개화락영무강)
꽃 피고 지되 영원히 끝이 없도다




근역(槿域): 무궁화의 땅, 즉 우리나라를 일컫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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