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 군하리

만세 소리 울린 골목

by seungbum lee

경기 서쪽 끝의 발견
"김포 가본 적 있어?"
10월의 어느 주말, 지혜가 물었다. 가을이 깊어지고 있었다. 창밖으로 단풍이 물들기 시작했다.
"김포? 공항?"
준우가 즉답했다.
"공항만 있는 게 아니야. 군하리라고, 3.1운동 때 만세운동 했던 마을이 있대."
민수가 관심을 보이며 노트북을 열었다.
"군하리? 만세운동?"
"응. 만세로군하길이라고, 그때 만세 부르며 행진했던 길을 복원한 거래."
검색 결과가 나왔다. 조용한 시골 마을, 좁은 골목길, 그리고 '만세로' 표지판들.
"1919년 3월 29일, 김포 군하리에서 주민 2천여 명이 만세운동을 벌였습니다."
"2천 명이나?"
"작은 마을에서 2천 명이면 엄청난 거네."
서연이가 다가와 화면을 봤다.
"3.1운동은 서울에서만 한 줄 알았는데."
"아니야.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어. 김포도 그중 하나고."
"거기 가면 뭐가 있어?"
"만세 부르며 걸었던 길, 옛날 주막, 일제강점기 건물들. 그리고 마을 박물관도 있대."
"역사 공부되겠다."
"좋아. 가자!"
다음 주 토요일, 네 식구는 지하철 9호선을 탔다. 김포공항역까지 가서 버스로 갈아탔다.
"김포 생각보다 멀다."
"경기도 서쪽 끝이니까."
버스는 한강을 건너 김포 시내를 지나 더 외곽으로 향했다. 점점 풍경이 시골스러워졌다.
"논밭이 많네."
"여기가 원래 농촌 지역이래."
40분쯤 가니 '군하리' 정류장이 나왔다.
"여기서 내려요."
버스에서 내리니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조용한 시골 마을. 낮은 집들, 좁은 길, 텃밭.
"서울이랑 완전 다르다."
"춘천보다도 더 시골 같아."
마을 입구에 큰 안내판이 있었다.
"군하리 만세로군하길 안내."


104년 전 그날의 발자취
안내판을 자세히 읽었다.
"1919년 3월 29일, 군하리 주민들은 장날을 이용해 만세운동을 계획했습니다. 오후 2시, 장터에 모인 2천여 명의 주민들은 일제히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마을을 행진했습니다. 일본 헌병대의 무력 진압으로 14명이 부상당하고 37명이 체포되었습니다."
"많이 다쳤구나."
"독립운동이 쉬운 게 아니었지."
안내판 옆에 작은 비석이 있었다. '3.1운동 군하리 만세운동 기념비'.
"사진 찍자."
기념비 앞에서 가족 사진을 찍었다. 숙연한 마음으로.
"만세로는 어디서 시작해?"
안내판의 지도를 확인했다.
"저기, 옛날 주막 자리부터 시작해서 장터, 그리고 마을 한 바퀴."
"얼마나 걸려?"
"2km 정도래. 한 시간?"
"가자."
만세로 시작점으로 걸어갔다. 좁은 시골길이었다. 양쪽으로 낮은 담장과 텃밭이 이어졌다.
"여기가 옛날 주막 자리래."
지금은 빈 터였지만, 표지판이 서 있었다.
"군하리 주막. 1919년 3월 29일, 만세운동 지도자들이 이곳에서 모여 계획을 세웠습니다."
"여기서 모의한 거구나."
"용기가 대단하다. 들키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도 해야 했으니까. 나라를 되찾으려면."
주막 터에서 시작해 좁은 골목을 따라 걸었다. '만세로'라는 표지판이 곳곳에 있었다.
골목은 조용했다. 가끔 텃밭에서 일하는 어르신들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드리자 한 할아버지가 호미를 내려놓고 다가오셨다.
"어디서 왔어요?"
"서울이요. 만세로 보러 왔어요."
"아, 그래요? 고마워요. 요즘 가끔 오시더라고."
"여기서 오래 사셨어요?"
"태어나서 쭉. 80년 살았으니까."
"만세운동 이야기 들어보셨어요?"
"많이 들었지. 우리 할아버지가 참여하셨거든."
민수의 눈이 커졌다.
"정말요? 직접 참여하셨다고요?"
"그럼. 그때 스물다섯 살이셨대. 만세 부르다가 일본놈들한테 잡혀가서 고생하셨어."
"대단하시다."
"고생 많이 하셨지. 근데 후회는 안 하셨대. 독립을 위해서니까."
할아버지는 만세로를 가리켰다.
"이 길로 다들 행진했어요. 태극기 들고, 만세 부르면서. 우리 할아버지 말씀으론 그날이 가장 자유로웠던 날이었대요."
"자유..."
"일본 지배 받던 시절이니까. 그날만큼은 조선 사람이라고 큰소리칠 수 있었던 거지."
할아버지와 헤어지고 다시 걸었다. 이번에는 다른 마음으로. 104년 전 이 길을 걸었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2천 명이 이 길로 걸었다는 게 상상이 안 돼."
"지금은 이렇게 조용한데."
골목을 따라 걷다 보니 작은 광장이 나왔다.
"여기가 옛날 장터래."
지금은 그냥 빈 공터였지만, 안내판이 있었다.
"군하리 장터. 만세운동이 시작된 곳. 1919년 3월 29일 오후 2시, 2천여 명의 주민들이 이곳에 모여 일제히 만세를 불렀습니다."
광장 한가운데 작은 동상이 있었다. 태극기를 든 사람의 모습이었다.
"사진 찍자."
동상 앞에서 가족 사진을 찍었다. 준우는 동상처럼 팔을 들어 올렸다.
"대한독립만세!"
준우가 외쳤다. 장난스러웠지만, 그 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너도 만세 불러봐."
"대한독립만세!"
이번에는 네 명이 함께 외쳤다. 조용한 시골 마을에 만세 소리가 울렸다.
그 순간, 104년 전 그날이 떠올랐다. 이곳에서 2천 명이 함께 외친 만세 소리가.

기억의 공간들
광장을 지나 계속 걸으니 오래된 한옥이 나타났다.
"저게 뭐야?"
'군하리 역사관'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박물관인가 봐."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전시 공간이었지만 알차게 꾸며져 있었다.
전시실에는 1919년 당시 자료들이 있었다. 사진, 신문 기사, 일본 경찰 보고서.
"이거 봐. 일본 경찰이 쓴 보고서."
"'군하리에서 폭도 2천여 명이 소요를 일으켰다'고 썼네."
"폭도라니. 독립운동을 폭도라고 부르다니."
"일본 입장에서는 그렇게 보였겠지. 하지만 우리는 독립운동가였어."
한 코너에는 당시 참여자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김성삼, 당시 24세, 만세운동 주동자. 2년 징역."
"이순옥, 당시 19세, 태극기 제작. 1년 징역."
"박진호, 당시 32세, 만세 선창. 3년 징역."
젊은 얼굴들이었다. 20대, 30대.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감옥에서 보낸 사람들.
"어린 나이에..."
서연이가 19세 이순옥의 사진을 보며 말했다.
"나랑 한 살밖에 차이 안 나."
"그래. 너랑 같은 나이에 독립운동을 한 거야."
"대단하다. 나는 그럴 수 있을까."
"그 시대였다면 너도 했을 거야."
영상 코너에서는 증언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참여자의 후손이 증언하는 모습이었다.
"우리 할아버지는 평생 그날을 자랑스럽게 여기셨어요. 목숨 걸고 만세 불렀던 날. 그게 할아버지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다고 하셨어요."
민수는 영상을 보며 가슴이 뭉클했다.
역사관을 나와 다시 만세로를 걸었다. 골목 끝에 작은 공원이 있었다.
"군하리 평화공원."
공원 안에는 커다란 태극기 조형물이 서 있었다.
"여기서 만세로가 끝나는 거네."
벤치에 앉아 쉬었다. 가을 햇살이 따뜻했다.
"여보."
지혜가 조용히 말했다.
"응?"
"여기는 다른 곳들이랑 느낌이 다르네."
"어떻게?"
"을지로는 산업의 역사, 해방촌은 전쟁의 상처, 망대골목은 피난민의 삶이었잖아. 근데 여기는..."
"저항의 역사?"
"응. 그리고 자유를 향한 열망."
"맞아. 여기 사람들은 목숨 걸고 자유를 외쳤어."
준우가 끼어들었다.
"아빠, 지금 우리는 자유로워?"
민수는 잠시 생각했다.
"그래. 우리는 자유로워. 104년 전 여기 사람들이 싸워서 얻은 자유 속에 살고 있어."
"그럼 고마워해야 되는 거네."
"맞아. 그래서 기억해야 하는 거야."
점심 때가 되어 마을 안의 작은 식당에 들어갔다. '군하식당'이라는 소박한 간판이었다.
"여기요, 제육볶음 두 개, 된장찌개 두 개요."
식당 주인은 60대 할머니였다.
"어디서 오셨어요?"
"서울이요. 만세로 보러 왔어요."
"고마워요. 우리 마을 찾아와주셔서."
"여기서 오래 사셨어요?"
"시집와서 40년 살았어요."
"만세운동 이야기 많이 들으셨겠네요."
"많이 들었죠. 시아버님이 참여하셨거든요."
또 참여자의 후손이었다.
"대단하시네요."
"자랑스러워요. 우리 시아버님이 독립운동 하셨다는 게. 가문의 영광이죠."
음식이 나왔다. 소박하지만 정갈했다.
"맛있어요."
"많이 드세요. 만세로 걸으면 배고프죠."
식사를 하며 할머니와 더 이야기를 나눴다.
"요즘 마을이 어때요?"
"예전보단 나아졌어요. 만세로 만들고 나서 사람들이 찾아오니까. 우리 마을 역사를 알아주는 사람들이 생겨서 좋아요."
"발전하고 있네요."
"천천히요. 우리는 큰 욕심 없어요. 그냥 우리 할아버지들이 했던 일을 사람들이 기억해주면 그걸로 됐어요."

만세가 울린 시간
오후에는 마을을 천천히 둘러봤다. 만세로 주변에는 옛날 건물들이 몇 채 남아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적산가옥, 해방 후 세워진 한옥, 1960년대 시멘트 건물.
"건물들이 다 시대가 다르네."
"응. 마을의 역사가 건물에 새겨진 거지."
한 오래된 한옥 앞에서 멈췄다. '김성삼 가옥'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김성삼... 역사관에서 본 이름이다."
"만세운동 주동자."
대문이 잠겨 있었지만, 담장 너머로 마당이 보였다. 오래됐지만 잘 보존된 한옥이었다.
"여기서 만세운동을 계획했을까?"
"그랬겠지."
해가 기울 무렵, 다시 만세로 시작점으로 돌아왔다.
"한 바퀴 다 돌았네."
"2km인데 두 시간 걸렸어."
"천천히 보느라."
주막 터 옆 벤치에 앉아 오늘 하루를 정리했다.
"군하리 어땠어?"
민수가 아이들에게 물었다.
"의미 있었어."
서연이가 먼저 대답했다.
"어떻게?"
"역사가 교과서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어. 여기 이 마을에,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 게."
"준우는?"
"나는 만세 부른 게 재미있었어. '대한독립만세!' 크게 외칠 수 있어서."
민수가 웃으며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그게 자유야. 원하는 대로 외칠 수 있는 것."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며 지혜가 말했다.
"여기 또 와야겠어."
"왜?"
"제대로 기록하고 싶어. 참여자 후손들 인터뷰하고, 마을 역사 정리하고."
"아카이빙 프로젝트?"
"응. 김포시에 제안해볼까?"
"좋은 생각이야."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민수와 지혜는 조용히 대화를 나눴다.
"우리 아카이빙도 진화하고 있네."
"어떻게?"
"처음엔 을지로 같은 산업 유산이었고, 그다음엔 해방촌 같은 전쟁의 상처였고, 이제는 군하리 같은 독립운동 역사까지."
"범위가 넓어지고 있어."
"응. 그리고 깊어지고 있어."
집에 도착해서 사진을 정리했다. 만세로 표지판, 장터 광장, 역사관, 그리고 태극기 조형물.
"사진이 숙연해."
"역사의 무게가 느껴져서 그런가 봐."
민수는 노트를 펼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제목은 '김포 군하리, 만세 소리 울린 골목'.
"1919년 3월 29일, 김포 군하리에서 2천 명이 만세를 불렀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 2천 명이라는 숫자는 기적에 가까웠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 목숨을 걸었을까?"
"자유.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외침. 그날 군하리는 대한민국이었다. 일본 제국이 아니라, 조선도 아니라, 자유로운 대한민국."
"104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 자유 속에 살고 있다. 너무 당연해서 잊고 살지만, 누군가 목숨 걸고 싸워서 얻은 것이다. 19세 소녀가, 24세 청년이, 32세 가장이 감옥에 갔다. 우리의 자유를 위해."
"만세로를 걸으며 생각했다. 기억의 의무를. 자유의 값을.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전해야 할 이야기를."
글을 다 쓰고 지혜에게 보여줬다.
"좋아. 진심이 느껴져."
"군하리가 그랬어."
며칠 후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 반응은 뜨거웠다.
"김포에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다음 주말에 가족들과 가보겠습니다. 아이들 교육에 좋을 것 같아요."
"만세운동이 서울에만 있었던 게 아니었네요. 전국 곳곳의 이야기를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특별한 댓글이 달렸다.
"저는 김성삼 선생의 증손녀입니다. 증조할아버지 이야기를 이렇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께 들었던 이야기인데, 이렇게 많은 분들이 알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민수는 즉시 답글을 달았다.
"댓글 감사합니다. 김성삼 선생님의 용기는 오늘날 우리의 자유를 만들었습니다. 혹시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제대로 기록하고 싶습니다."
일주일 후, 민수는 김성삼 선생의 증손녀를 만났다. 김포의 한 카페에서였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50대 여성이었다.
"저야말로요. 증조할아버지 이야기를 이렇게 관심 가져주시는 분이 계셔서 감사해요."
두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김성삼 선생의 생애, 만세운동 당시 상황, 2년 옥살이, 그리고 해방 후의 삶.
"증조할아버지는 평생 그날을 자랑스럽게 여기셨대요. 비록 독립은 이루지 못했지만, 최선을 다했다고."
"대단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후손들에게 항상 말씀하셨대요.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누군가 싸워서 얻은 것이다'라고."
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날 민수는 귀한 자료를 받았다. 김성삼 선생의 사진, 옥중 편지 사본, 그리고 가족이 보관해온 태극기.
"이 태극기... 진짜인가요?"
"네. 증조할머니가 직접 만드신 거예요. 만세운동 때 사용했던."
민수는 조심스럽게 태극기를 펼쳐봤다. 손으로 그린 태극 문양, 불균일한 바느질. 104년 전 그날의 흔적이었다.
"이건... 국가에 기증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생각은 있는데, 어디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김포시나 독립기념관에 문의해보겠습니다."
3개월 후, 김성삼 선생의 태극기는 독립기념관에 기증됐다. 기증식이 열렸고, 많은 언론이 보도했다.
"104년 만에 빛을 본 태극기"
"김포 군하리 만세운동의 증거"
민수 가족도 기증식에 참석했다.
"이게 다 선생님 덕분이에요."
증손녀가 고마워했다.
"아니에요. 제가 감사하죠. 이런 귀한 자료를 찾게 해주셔서."
그리고 6개월 후, 김포시로부터 연락이 왔다.
"군하리 만세운동 아카이빙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선생님께서 총괄 책임을 맡아주시면 좋겠습니다."
민수는 수원, 춘천에 이어 김포에서도 공식 프로젝트를 맡게 됐다.
1년 동안 군하리를 수없이 찾아갔다. 참여자 후손들을 인터뷰하고, 일제 자료를 발굴하고, 마을 역사를 정리했다.
특히 의미 있었던 것은 참여자 37명 모두의 이름을 찾아낸 것이었다. 일본 경찰 기록, 재판 기록, 구술 증언을 종합해서.
"37명 모두 찾았어."
지혜에게 자료를 보여줬다.
"대단해. 이름 하나하나가 다 한 사람의 인생이잖아."
"그래. 그래서 한 명도 빠뜨리고 싶지 않았어."
1년 후, 『김포 군하리 만세운동 완전 기록』이 출간됐다. 7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기록이었다.
참여자 37명의 이름과 생애, 만세운동 당일 시간대별 상황, 일제의 탄압, 그리고 후손들의 증언까지.
책 출간 기념식이 군하리 평화공원에서 열렸다. 참여자 후손 20여 명이 모였다.
"우리 조상들의 이름이 책에 남았습니다."
민수가 인사말을 했다.
"104년 전 이곳에서 자유를 외친 37명. 그분들의 용기를 잊지 않겠습니다."
식이 끝난 후, 모두 함께 만세로를 걸었다. 37명의 후손들이 104년 전 조상들이 걸었던 길을 다시 걸었다.
그리고 장터 광장에서 함께 외쳤다.
"대한독립만세!"
민수 가족도 함께 외쳤다. 서연이와 준우도 목청껏 외쳤다.
만세 소리가 군하리에 울려 퍼졌다. 104년 전 그날처럼.
그날 밤, 민수는 혼자 만세로를 걸었다. 조용한 밤, 가로등 아래.
104년 전 이곳을 걸었던 사람들을 생각했다. 19세 소녀, 24세 청년, 32세 가장.
그들은 무엇을 생각하며 걸었을까. 두려웠을까, 설레었을까, 아니면 각오했을까.
그리고 깨달았다. 역사는 큰 사건만이 아니라는 것을. 이름 없는 사람들의 작은 용기가 모여 큰 흐름을 만든다는 것을.
부부의 골목 아카이빙은 이제 독립운동사 기록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산업유산에서 시작해, 전쟁의 상처를 거쳐, 독립운동의 역사로.
군하리는 그 여정의 중요한 이정표였다. 작은 시골 마을이지만, 거대한 역사가 숨 쉬는 곳.
오늘도 만세로는 그 자리에 있다. 104년 전 만세 소리가 울렸던 그 길.
그리고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다. 역사를 기억하고, 자유를 감사하며.
민수는 가끔 군하리를 찾는다. 조용한 평일 오후, 혼자.
만세로를 걸으며 생각한다. 기록의 의미를, 기억의 책임을,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전할 이야기를.
골목은 역사를 품는다. 그리고 역사는 사람을 만든다.
군하리의 만세로처럼, 영원히.
끝나지 않는 여정. 이어지는 기록. 남겨지는 자유.
대한독립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