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햇살 아래
마당 한편에 펼쳐진 멍석 위로 가을 햇살이 부서진다. 고추들이 붉은 물결을 이루며 누워있고, 그 옆에는 허리 굽은 노인이 앉아 한 알 한 알 뒤집고 있다. 손등에 새겨진 검버섯과 굵어진 마디마디가 세월의 무게를 증언한다.
할머니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고추들이 바스락거린다. 그 소리는 마치 오래된 책장을 넘기는 소리 같다. 삶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그렇게 넘어갔을 것이다. 봄에 씨앗을 뿌리고, 여름 내내 물을 주고, 가을에 수확하는 일. 육십 년을 그렇게 반복해 온 손길이다.
햇볕은 노인의 등에도, 고추에도 공평하게 내려앉는다. 주름진 얼굴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고추는 조금씩 더 깊은 빛깔로 익어간다. 시간이 만드는 풍경이란 이런 것이리라. 서두르지 않고, 재촉하지 않고, 그저 제 리듬대로 흘러가는 것.
"올해는 가뭄이 심해서 고추가 작네."
할머니가 중얼거린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를 혼잣말. 하지만 그 말 속에는 땅을 일구며 살아온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슬픔과 체념이 담겨 있다. 하늘을 원망할 수도 없고,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농사꾼의 숙명. 그저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받아들이는 것.
멍석 너머로 감나무가 보인다. 까치밥으로 남겨둔 감 몇 개가 가지 끝에 매달려 햇빛을 받아 투명하게 빛난다. 할머니는 가끔 고개를 들어 그 감나무를 바라본다. 젊은 날, 남편과 함께 심었던 나무다. 이제 남편은 없고 나무만 남아 해마다 열매를 맺는다.
오후의 빛이 점점 부드러워진다. 할머니는 고추를 뒤집다가 잠시 허리를 펴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가을 하늘. 그 하늘 아래서 얼마나 많은 날들을 보냈을까. 기쁜 날도 있었고, 슬픈 날도 있었다. 아이들을 키우며 힘들었던 날들, 남편을 먼저 보내고 홀로 남은 날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모든 것이 평온하다. 따뜻한 햇살과 익어가는 고추의 향기, 어디선가 들려오는 새소리. 삶이란 결국 이런 소소한 순간들의 축적이 아닐까.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작은 일상들.
할머니의 손이 다시 움직인다. 멍석 한쪽 끝에서 다른 끝으로, 빠짐없이 모든 고추를 뒤집는다. 서두르지 않는 손길. 하나하나에 정성을 다하는 손길. 그것은 마치 기도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고추들이 잘 마르기를, 겨울 동안 먹을 김장이 잘 담가지기를, 자식들이 건강하기를.
멍석 모서리가 바람에 살짝 들썩인다. 할머니가 재빨리 돌멩이로 눌러놓는다. 오랜 경험이 만든 지혜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작은 바람도 놓치지 않는 섬세함. 그렇게 살아온 것이다. 작은 것 하나하나에 마음을 쓰며.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간다. 할머니는 천천히 일어선다. 무릎이 뻐근하다. 하지만 내일도 모레도 이 자리에 앉을 것이다. 고추가 다 마를 때까지. 그것이 할머니의 일이고, 할머니의 삶이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할머니의 뒷모습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 그림자 위로 가을 햇살이 황금빛으로 내려앉는다. 고추도, 노인도, 모두 그 빛 속에서 고요히 익어간다.
이것이 우리가 잊고 사는 풍경이다. 누군가는 오늘도 땅과 함께 호흡하며, 계절과 함께 늙어가고 있다. 그들의 손길이 있어 우리는 밥을 먹고, 김치를 먹는다. 그 수고로움 위에 우리의 일상이 서 있다.
할머니는 집으로 들어간다. 내일 아침이면 다시 멍석 옆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고추를 뒤집고, 햇볕을 쬐고, 세월을 묵묵히 견딜 것이다. 가을 햇살처럼 따뜻하게, 고추처럼 단단하게.
그것이 할머니가 살아온 방식이고, 앞으로도 살아갈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