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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d 강상원 Oct 18. 2024

Ep8 Gold Rush? Orange Rush!

하루 일당이 300 ~ 400불!?

#금광(金鑛) 대신 귤광(橘鑛)


 프랑스에서 온 커플이 있었다. 남자는 줄리앙(가명), 여자는 마리(가명)였다. 그들은 나와 같은 집에서 머물렀다. 어느 날 줄리앙이 캥거루 고기를 가져왔다. (호주에서는 캥거루 고기를 흔하게 구할 수 있다. 마트에서도 쉽게 살 수 있다.) 하지만 그날 줄리앙이 가져온 고기는 마트에서 산 것이 아니었다. 그가 직접 사냥한 캥거루였다.


 호주에서는 캥거루 개체수를 조절하기 위해 캥거루 사냥이 합법이다. 라이센스만 취득하면 누구든지 사냥할 수 있다. 줄리앙이 일하던 농장 주인도 그 라이센스를 가지고 있었다. 캥거루 사냥에 관심이 있던 줄리앙은 결국 라이센스를 취득하고, 직접 캥거루를 잡아 왔다. 그가 잡은 캥거루는 농장 주인이 손질해 주었다.


 마리는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가 해주던 요리가 있다고 말했다. 레드와인과 초콜릿으로 고기를 푹 끓이는 요리였다. 마리는 줄리앙이 잡아온 캥거루 고기를 "할머니의 특별한 레시피"로 요리해 주겠다고 했다. 초콜릿과 레드와인으로 고기를 익히면 어떤 맛일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프랑스 요리라는 것만으로도 기대가 됐다. 미식의 나라라고 불리는 곳 아닌가.


 기대가 더해지면서 배고픔이 커졌다. 커진 허기와 별개로 아주 오래 기다려야 했다. 마리는 캥거루 고기를 아주 오래 끓였다. 캥거루 고기가 원래 질기고, 잡내가 심한 만큼 어쩔 수 없었다.(마트에서 파는 캥거루 고기는 먹을 만하다. 질김과 잡내가 불편한 정도는 아니다.) 마리의 고생 끝에 마침내 요리가 완성되었다. 하우스 메이트들이 긴 테이블에 앉아 마리의 요리를 나눠 받았다. 모두 함께 "본아뻬띠(Bon appétit!)"를 외치며 식사를 시작했다.


 고기는 정말 질겼다. 씹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날 줄리앙이 사냥해 마리가 요리한 캥거루 고기는 정말 질겼다. 내가 먹어본 고기 중 가장 질긴 고기였다. 아마도 마리 할머니의 특급 레시피는 캥거루 고기에는 맞지 않았던 것 같다. 마리가 오랜 시간 고생했으니, 누구도 마리에게 뭐라 할 수 없었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캥거루 고기 특유의 잡내는 전혀 나지 않았다.


 비록 고기는 먹기 어려웠지만, 소스의 향과 맛은 인상 깊었다. 레드와인과 초콜릿 덕분에 음식의 향은 달콤하면서도 독특했다. 한국에서는 접하기 힘든 맛이었다. 다행히 그 소스는 밥과 잘 어울렸다. 결국 그 소스를 밥에 비벼 먹으며 식사를 이어 갈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친구들과 저녁을 즐기던 중 전화가 울렸다. 사촌 형이었다. 내가 호주에 왔을 때, 나 말고도 호주에 올 계획을 가진 혈육이 있었다. 바로 한 살 많은 사촌 형이었다. 당시 형은 브리즈번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나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처음에는 서로 안부를 주고받았다. 각자의 안부를 묻던 대화는 자연스럽게 현재의 상황과 심정을 토로하게끔 이어졌다. 나는 모였던 돈이 갑작스레 두 번이나 사라지게 되어 막막한 심정을 이야기했다. 계획에 차질이 생기면서 계속 호주에 있는 것이 맞을지 고민이 듣다고 했다.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형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 마을은 만다린((Mandarin, 운향과 관목 또는 관목에 딸린 귤 종류를 통틀어 이르는 말)으로 유명한 곳이야. 곧 수확철이 다가와. 시간당으로 돈을 받는 게 아니고, 네가 채운 상자만큼 돈을 받는 거지. 큰 상자 하나 꽉 채우면 대충 150달러 정도 준대. 보통 남자들은 하루에 두 상자 정도 채운다는데, 잘하는 사람들은 3~4 상자씩도 한대. 나 조만간 그곳으로 갈 생각인데 너도 같이 가자"


 ‘하루에 못해도 300달러 이상을 번다고!?’


 며칠 전, '시간 낭비'라는 말에 찔린 그날 밤 친구들이 있는 단톡방을 나갔다. 너무 화가 나서 친구들을 모두 차단했다. 내 선택을 존중하고 응원해 준 친구도 있었지만, 그때는 너무 화가 났다. 이후로 친구들의 연락을 모두 무시했다. 연속적인 두 번의 큰 지출에 좌절감을 느끼고 있던 차에, 그 말은 나를 더 심리적으로 힘들게 했다. 그 후로 며칠간 나는 시체처럼 일했다.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반복하던 중, 사촌 형의 전화는 나에게 한 줄기 희망이었다.


 19세기 중반, 뉴사우스 웨일스(Newsouth Wales) 지역에서 누군가 금을 발견하면서 본격적인 골드러시가 시작되었다. 이후 빅토리아(Victoria), 퀸즐랜드(Queensland),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Western Australia) 등 호주 전역에서 금광이 발견되었다. 그 시기에 영국, 아일랜드, 중국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이민자들이 일확천금을 꿈꾸며 미지의 땅으로 몰려왔다.


 나 또한 주황빛의 금들을 캐기 위해 새로운 땅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귤과 오렌지가 내는 색깔이 마치 황금빛 같았다.


 ‘이거 완전 노다지 땅이잖아. 금광이 따로 없네’


 나는 진진(Gingin)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Good bye Gingin


 닭농장에 언제까지 일할지 알렸다. 그리고 진진(Gingin)이라는 지역을 떠날 준비를 했다. 막상 떠날 때가 되니 그동안 닭농장에서 겪었던 일들이 다 추억처럼 느껴졌다.(물론 바퀴벌레가 바글바글 했던 경험은 추억처럼 안 느껴졌다) 일하는 도중 함께 일했던 친구들과 사진도 몇 장 찍었다. 그때쯤 일하다 발견한 블루 텅 도마뱀도 귀여워 보였다.


 내가 마지막으로 출근한 날, 닭농장에서는 작은 송별회를 열어주었다. 원래 닭농장에서 한 달에 한 번 점심 회식을 했는데, 그날은 회식과 내 송별회를 겸한 자리였다. 나는 음식을 준비해 준 커스티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커스티는 케이크를 정말 잘 만들었다. 케이크 같은 디저트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커스티가 만든 케이크는 예외였다. 그녀가 케이크를 만들어 올 때마다 나는 농담으로 "지금이라도 닭농장 일을 그만두고 케이크 가게를 차려야겠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날 송별회에서도 커스티는 맛있는 케이크를 만들어 왔다. 나는 진지하게 "케이크 가게를 차려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동안의 고마움과 아쉬움을 담은 작별 인사였다.


 떠나기 하루나 이틀 전쯤 집에서 나를 위한 송별회(Farewell Party)가 열렸다. 1부는 축구였다. 평소 축구할 때마다 인원이 부족해 늘 아쉬웠지만, 그날만큼은 축구를 좋아하지 않았던 대만 친구들까지 참여해 주었다. 경기가 한창일 때 나와 같은 팀 친구들이 계속 앞으로 나가라고 했다. 수비하지 말고 골대 앞에만 있으라는 것이었다. 마지막인 만큼 내가 골을 넣을 수 있게 배려해 준 것이다. 마치 군대에서 경험했던 '병장 축구'를 다시 하는 기분이었다. 한국 특유의 서열문화를 모르는 서양 친구들이 먼저 이런 배려를 해주었다는 것이 고마우면서도 재미있었다.(이후 한국의 병장축구에 대해 알려줬다)


 경기가 한창 진행되던 중 해가 지기 시작했고, 우리는 골든 골(Golden goal)로 경기를 끝내기로 했다. 이탈리아 친구들이 뛰어난 실력으로 공을 몰고 오더니 골대 앞에 있던 나에게 공을 연결해 줬다. 내가 찬 공이 홍콩 친구의 발에 맞아 살짝 굴절되더니 골대 오른쪽으로 천천히 굴러 들어갔다. 축구 실력이 형편없는 나에게 평생 잊지 못할 득점이었다. 축구와 관련된 기억 중 가장 선물 같은 추억이 됐다.


 2부는 밤새 술을 마시며 파티를 했다. 2부가 시작되기 전에 나는 삭발을 했다.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결의를 다지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파티의 주인공답게 파격적인 모습을 하고 싶었다. 머리 한쪽에 두 줄 스크래치도 넣었다.


 파티는 밤새 진행됐다. 그동안 친해진 모든 친구들과 하나씩 인사를 나눴다. 사진도 찍고, 건배도 하며 잘 지내라는 말을 주고받았다. 1년 전만 해도 서양식 파티가 어색했지만, 어느덧 그 문화에도 익숙해져 있었다.


 내 룸메이트였던 대만 친구 숀, 나의 첫 레즈비언 친구 케이, 새해 불꽃놀이를 함께 본 이탈리아 커플, 늘 아재 개그를 던지던 독일 형, 욕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늘 책을 읽던 프랑스 친구, 기타를 항상 들고 다녔던 일본인 마사, 나에게 늘 "You are the best"라고 말해주던 프랑스 커플, 한국에서 온 귀여운 동생 커플, 나와 동갑이었던 이탈리아 출신의 알베르토, 알렉산드로, 마띠에... (몇 년 뒤 알베르토는 내게 결혼 소식을 알렸다. 곧 결혼한다며 나를 이탈리아로 초대했지만,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아쉽게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리고 나의 호주 삼촌 그레이엄까지.


 호주에 온 뒤로 많은 고민과 걱정 속에서 지냈다. 물론 즐겁고 행복한 날도 있었지만, 마음 한편에는 늘 작은 불안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만큼은 모든 근심을 덜어내고 순간을 즐길 수 있었다. 진진에서 사귄 모든 친구들과 건배를 하고,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만들었다.


 시간이 제법 지나 피곤해서 내 방으로 가고 싶었지만, 친구들이 놔주지 않았다. 결국 더 이상 졸음을 참지 못하고 친구들 몰래 방으로 들어갔다. 10분 후, 친구들이 전부 내 방으로 몰려왔다. 단체로 침대 위로 뛰어들며 "Ted!"를 외쳤다. 나는 너무 피곤했지만, 그 상황이 웃겨서 눈을 감은 채로 계속 웃었다. 친구들은 "잘 자"라는 말과 "잘 가"라는 말을 하며 방을 떠났다.


 ‘Gingin에 오게 돼서 참 다행이다’


#Orange Rush


 퀸즈랜드(Queensland) 주에 있는 분다버그(Bundaberg)라는 도시로 향했다. 퍼스에서 브리즈번을 경유해 분다버그 공항에 도착했다. 브리즈번과 분다버그를 오가는 비행기에 손님이 거의 없었다. 탑승객 수와 승무원 수가 비슷했다. 그러다 보니 마치 내가 비행기를 전세한 것 같았다. 분다버그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창 밖을 바라보니 구름이 조각난 채로 하늘을 메우고 있었다. 작은 파편처럼 흩어진 구름들이 하늘을 메꿨고 구름과 구름 사이에 광활한 땅이 펼쳐져 있었다. 사선으로 떨어지는 햇빛을 따라가 보니 창공에서 황금빛 가루를 뿌려대고 있었고, 이 가루들이 구름의 파편 사이에서 튕겨지고 있었다.


 호주에서 만끽하는 자연의 아름다움은 항상 경이로웠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았다. 말 그대로 대자연이 숨 쉬는 곳이었다. 조각 난 구름 위를 미끄러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비행을 즐겼다. 그리고 승무원에게 맥주 한 잔과 견과류를 부탁해 풍류에 맛을 더했다. 구름과 대지가 황금빛으로 물든 모습을 보며 마음속에 경이와 열정이 솟아 올랐다.


 ‘그래. 할 수 있어. 내가 그 동네 있는 오랜지랑 귤 다 따야지’


 공항에 도착하니 사촌형이 여자친구와 함께 마중 나와 있었다. 분다버그에서 차로 2 ~ 3시간을 이동했다. 이동하는 중간에 진진(Gingin)이라는 지역이 있어서 반가웠다. 바로 어제 서호주의 진진에 있었는데 이제 퀸즈랜드의 진진을 지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형은 이미 그곳에 집 하나를 통째로 렌트해 지내고 있었다. 나는 그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 도착 한 당일 형과 고기에 술 한잔 하며 앞으로의 계획과 포부를 서로 다졌다.


 마치 골드러쉬가 한창이던 시절 금광으로 뛰어든 이민자들이 그랬을까? 새로 도착한 지역은 내게 소위 대박을 칠 수 있는 새로운 기회의 땅이었다. 앞으로 수확이 한창일 2 ~ 3개월 간 크게 한 몫 당길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기대가 부풀었다.


 내가 도착하고 일주일도 안 돼서 한국 사람 3명이 더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정확히는 한국인(여) 제일교포 4세(남) 커플과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가 있는 한국인이었다. 그렇게 한국인 6명(나, 사촌 형, 사촌형 여자친구, 커플, 아기 아빠)이 함께 살게 됐다.


 만약 1년 전이었다면 한국인과 같이 살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을 거였다. 영어를 생활화하고 싶은 마음이 당시에 무척 컸기 때문이었다. 물론 영어 실력을 더 늘리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다. 하지만 이미 우선순위에서 돈이 강력하게 자리 잡은 뒤였다. 그래서 한국인과의 동거는 더 이상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같이 산다고 해도 농번기인 2~3개월 정도일 뿐이었다. 그 뒤 계획은 아직 없었지만 일단 당장은 눈앞의 황금을 캐는 일이 더 중요했다.


 마을에는 각각의 농장에 일자리를 연결해 주는 에이전시가 하나 있었다. 아침부터 그 에이전시는 문전성시를 이뤘다. 에이전시에 처음 간 날 이미 한국인을 비롯한 외국인들이 문 앞에서 줄을 서고 있었다. 우리는 그 농장에 연락처를 남겼다. 그리고 몇몇 농장 정보를 얻은 뒤 직접 방문하기로 했다.


 농장으로 향하는 길 목에서 만다린 나무가 즐비한 것을 봤다. 이미 수확이 한창인 농장들도 많았다. 길 위에서 농장을 바라보니 많은 사람들이 이미 사다리에 올라타 귤과 오렌지를 따고 있었다. 나무 사이사이에 성인 남자 10명은 채울 만한 큰 상자에 황금빛 과일이 가득했다.


 우리는 농장을 돌며 농장 주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연락처와 이력서를 남기고 갔다. 소위 대박 농장이라는 곳만 돌아다니며 접촉했다. 이제 그 대박 농장이라는 곳에서 연락만 오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만다린 농장을 돌아다니던 와중 의아한 점이 있었다.


 ‘근데 농장 주변에 저 텐트들은 뭐지?’


#쪽박 농장


 작은 마을이었지만 스포츠 센터 시설이 제법 좋았다. 선진국답게 국민들의 생활 스포츠 시설이 잘 갖춰져 있었다. 특히 스포츠 센터에 실내 농구장이 잘 갖춰져 있었다. 호주에서는 여자들이 주로 즐기는 운동 중 하나가 있다. ‘넷볼(Netball)’ 하여 농구와 유사한 스포츠다. 아마 그 스포츠 센터 또한 요일별로 넷볼, 농구 등의 운동을 할 수 있게 운영되는 것 같았다.


 매주 수요일 밤마다 그곳에서 농구를 할 수 있었다. 처음 농구장에 도착했을 때 남녀노소가 다 모여 있었다. 처음에는 팀원의 다양성이 ‘농구의 재미를 반감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한국에선 늘 또래와 축구, 농구를 즐겼기 때문에 스포츠는 항상 비슷한 연령대의 남자들끼리 하는 취미였다. 하지만 그곳은 나이와 성별 관계없이 함께 즐기는 것이 중요했다. 나도 어느새 다양한 구성원들과 함께 땀 흘리는 것 자체에 재미를 느꼈다. 반면에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재밌던 포인트가 있었다. 농구하러 온 호주 사람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본인들 하고 싶은 대로 플레이했다. 말도 안 되는 패스, 드리블, 슛이 난무했다. 아니 패스는 난무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그렇게 농구했다가는 처음 본 사람들도 욕했을 플레이들이었다. 한 번이라도 그런 플레이를 보이면 코트에 있는 누구도 그 사람과 편을 하지 않을 플레이 었다. 남자든 여자든 나이 든 사람이든 젊은 사람이든 다들 중2병 걸린 듯한 기가 막힌 폼을 취하며 농구를 했다. 재밌는 점은 각자가 하고 싶은 대로 슛을 던지든 드리블을 하든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눈치를 주는 사람도 없었다. 한 사람의 이기적인 플레이로 공격이 무산돼도 불평하거나 잔소리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같이 땀 흘리고 각자 즐기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나도 길바닥에서 배운 근본 없는 플레이를 하는 사람이었지만 이곳은 차원이 달랐다. 하지만 그 덕분에 호주라는 곳이 한국보다 자유, 관용, 친절이 더 풍부한 나라임을 느낄 수 있었다. 나도 어느새 녹아들어 재밌게 즐겼다. 하지만 개인 보다 집단이 중요한 사회에서 자라온 나는 여전히 팀 플레이에 대한 갈증이 정말 사라질 수는 없었다. 결국 개인을 더 우선시하는 정서와 집단을 더 우선시하는 정서를 적절히 오가며 게임을 즐겼다.


 그런 와중 내게 먼저 말 걸어 준 호주 아저씨가 있었다. 그날 이후 농구장에서 만날 때마다 서로 반갑게 인사하곤 했다. 한 번은 일요일에 오로지 마을 사람들만 체육관을 이용할 수 있는 날이었다. 그 아저씨와 친해진 덕분에 그날 나도 체육관을 쓸 수 있었다.


 Gingin 못지않게 이 작은 마을에서도 잘 적응해 나갈 자신이 있었다. 어느덧 호주에 온 지도 1년이 넘었으니 생활적인 측면은 모르는 부분도 없었다. 이제 농장에서 연락만 오면 될 일이었다.


 아쉽게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계속 농장 문을 두드렸지만 결국 연락이 온 곳은 하나도 없었다. 마을에는 점점 한국인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이들도 귤빛 금광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온 나 같은 이방인들이었다. 결국 에이전시로 다시 향했다. 에이전시에서는 지난번에 추천해줬던 한 농장을 다시 추천해 줬다. 그 농장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박 농장의 목록에 속해 있지 않았다. 농장의 부지 자체가 작아서 딸 수 있는 과일의 수가 적었기 때문이었다. 하는 수 없이 나와 사촌 형은 그곳에서 일하기로 했다. 일단 다른 곳에서 연락이 올 때까지 한 푼이라도 벌고 있어야 했다.


농장에 도착하니 만다린 나무들이 줄을 맞춰 서 있었다. 마치 가로수길 같았다. 영국 근위대처럼 사열을 마친 듯한 나무들 사이로 트랙터 한 대가 여유롭게 지나갈 공간이 있었다. 농장주는 그 자리에 성인 남성 10명 정도가 들어갈 크기의 상자를 놓아두었고, 우리는 그 상자를 만다린으로 가득 채워야 했다. 채운 상자 수에 따라 그날의 임금이 결정되었다. 


 형과 내가 임시로 일하기로 한 농장은 대박 농장이 아니었다. 우리도 이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위 쪽박 농장일 줄은 몰랐다. 에이전시에 워홀러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음에도 이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왜 없는지 알 수 있었다. 농장의 상태는 생각 보다 더 안 좋았다. 단순히 농장의 부지가 작아서만은 아니었다.  농장의 부지가 작은 것보다 나무에 열린 과일 자체가 적었다. 보통 2~3시간에 상자 하나를 채운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곳은 형과 내가 하루 종일 일해도 상자 2개를 겨우 채웠다. 처음에는 형과 내가 일을 잘 못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 농장에서 우리가 제일 상자를 빠르게 채웠다. 그렇게 상자를 가득 채워도 받는 임금 자체도 다른 농장에 비해 적었다. 보통 못해도 150불, 많이 주는 곳은 상자 하나당 200불씩 줬다. 하지만 그곳은 한 상자에 100불이었다.


 만다린을 따기 위한 장비는 3가지가 필요했다. 장갑, 니퍼, 캥거루 백. 캥거루 백은 큰 주머니가 달린 앞치마였다. 이를 두르고 사다리에 오른 뒤 니퍼로 만다린의 꼭지를 잘라냈다. 그렇게 딴 과일을 캥거루 백 주머니에 가득 채웠다. 가득 채운 만다린을 다시 상자에 옮겼다. 이를 몇 번이고 반복해 상자가 가득 차면  농장주가 다시 빈 상자를 갔다 주었다.


 노동 강도는 닭농장 보다 훨씬 고단했다. 만다린은 하나하나가 성인 남성의 주먹보다 컸고, 무게도 묵직했다. 캥거루백의 주머니에 과일이 어느 정도 차면 그 무게가 목을 강하게 당겼다.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잠깐만 해야 할 것 같았다. 이 일을 오래 하다간 허리랑 목이 다 망가질 것이 분명했다. 하루 종일 니퍼를 움직이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하루의 노동이 끝날 때쯤이면 엄지 손가락과 주변 근육이 욱신 거렸다.


 육체적인 피로와 별개로 위험한 요소도 있었다. 만다린 나무는 그 높이가 제법 높았다. 나무 위쪽의 과육을 따기 위해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일해야 했다. 사다리를 타는 것이야 어려울 것은 없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나무 위에서 가끔씩 독사가 발견되곤 했다. 다행히 먼저 사람을 공격하는 류의 독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사다리 위에서 뱀을 눈앞에서 발견하면 누구나 놀라기 마련 아닌가. 농장주도 뱀에 물리는 일은 그동안 없었지만 뱀에 놀라 사다리에서 떨어진 사람은 있었다고 했다. 독사보다 낙상사를 더 조심해야 했다.


 하는 수 없이 그곳에서 계속 일하면서 시간 날 때마다 대박 농장의 문을 두드렸다. 어느덧 며칠이 흘렀고, 농장에 있는 오렌지를 전부 수확했다. 더 이상 농장에 딸 오렌지가 없었다. 농장주는 내일부터 레몬을 딸 거라 했다. 레몬을 수확하는 일도 오렌지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급여였다. 레몬은 그 크기가 만다린의 절반 내지 3분의 1 크기였다. 그 작은 과일로 같은 규모의 상자를 가득 채우려니 시간이 더 많이 걸렸다. 게다가 그 농장주는 농사에 정말 열을 기울지 않았는지 만다린에 이어 레몬도 그 수가 적었다. 더 최악은 줄어든 임금이었다. 열심히 상자 하나를 채워도 80불이었다. 레몬이 단가가 더 낮았다. 할당량을 채우기 위한 난이도는 더 높은데 임금은 더 낮았다. 결국 그날 이후 그 농장을 관뒀다. 그 시간에 다른 농장의 문이라도 한 번 더 두드리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 농장에서 일하면서 유일하게 좋았던 점이 있다. 만다린을 실컷 먹을 수 있었다.(사실 호주 어느 농장에서 일해도 해당 작물을 실컷 취득할 수 있다) 농장주는 일하면서 먹고 싶으면 마음껏 먹으라고 했다. 할 수 있으면 이 농장에 있는 열매를 다 먹어도 된다 했다. 하나를 먹고 나니 왜 ‘다 먹어도 된다’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만다린은 1~2개만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로 크고 과즙이 풍부했다. 더 이상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던 귤과는 맛이 조금 달랐다. 몇 배는 더 맛있었다. 귤처럼 신맛 나는 과일을 좋아하지 않던 내가 ‘이렇게 맛있는 신 맛도 존재하는구나’라고 느꼈다.


#무한 경쟁 사회? 무한 경쟁 개인!


 그곳에서 일을 관두고 나니 오히려 홀가분하고 상쾌했다. 한 푼이라도 버는 것이 현명한 처사였을 테지만 노동 강도에 비해 임금이 너무 열약했다. 그리고 이는 스트레스로 직결 됐다. 레몬을 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농장주에게 일을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그 마을에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시기가 고작 2~3개월뿐이었다. 그 기간이 점점 줄어들면서 불안감이 커져왔다. 잠시 바람이나 쐴 겸 같이 사는 사람들과 여행을 다녀왔다. 예쁜 경치를 바라보며 고기를 먹는 행위는 역시 즐거웠다. 하지만 그 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매번 농장으로부터 연락이 오기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은 초조함을 부추겼다.


 하루는 대박 농장 중 한 곳을 다시 들렀다. 농장에 사람이 없어서 계속해서 “Excuse me”를 외쳤다. 그렇게 농장 직원을 찾다가 안에 있는 사무실까지 들어갔다. 사무실에도 아무 사람이 없었다. 사무실 책상에 여러 서류가 보였다. 대부분이 워홀러들의 이력서였다. 우리 이력서도 저 중에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던 와중 화이트보드가 눈에 띄었다. 화이트보드에 무언가 익숙한 것이 쓰여 있었다. 나와 형의 영어이름과 연락처였다. 그리고 화이트보드에는 큰 글씨로 ‘Contact list’라고 적혀 있었다. 다른 지원자들의 것은 없고, 오로지 형과 내 이름만 있었다. 우리는 곧 이 농장에서 연락이 오겠다는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여전히 연락은 없었다. 다시 그 농장을 찾아갔지만 ‘곧 연락을 줄게’라는 말만 들을 뿐이었다. 다른 농장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마을에는 워홀러들이 정말 많았다. 워홀러들이 현지 사람들보다 많은 듯했다. 그리고 그 대다수는 한국인이었다. 마을에는 한국사람들이 정말 넘쳐났다. 확실한 통계는 아니겠지만 내가 체감한 바로는 그 마을 현지인보다 한국 워홀러가 더 많았다. 그 마을은 호주의 대표적인 식료품 마트인 울 월쓰(Woolworths)와 콜스(Coles)도 없었다. 말 그대로 시골이었다. 그럼에도 한인 마트가 있을 정도로 한국인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이었다. 심지어 그 한인 마트에서 한국 스타일의 프라이드치킨도 팔았다. 그리고 한국인 맞춤 상품인 1시간 와이파이 사용료도 받았다. 아마 그 지역만 관리하는 대통령과 여당이 있었다면 오로지 한국인만 위하는 정책을 펼쳤을 것 같았다. 일을 못 구한 초조함 때문이었는지 한국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나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미국에서 골드러쉬가 한창이던 시절에도 소문은 삽시간에 번졌다. A라는 지역에서 황금이 발견 됐다는 소문이 들리면 순식간에 사람들은 몰려들었다. 티브이, 인터넷, 스마트폰이 없어도 사람들은 돈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았다. 이미 정보가 넘칠 대로 넘치는 시대에 귤밭이 금밭이라는 정보를 나만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하루는 한국사람들이 축구하는 곳에 참여했다. 오랜만에 축구가 하고 싶었고, 그들로부터 일자리 정보도 얻을 목적이었다.


 축구를 마치고 앉아서 쉬고 있었다. 이미 친해진 한국인들은 수다를 떨면서 휴식을 취했다. 대부분 하루에 얼마를 벌었고, 만다린 몇 상자를 채웠다는 등의 이야기였다. 그 수다 너머로 익숙한 농장 이름이 들렸다. 이 동네 최고의 대박 농장 중 하나였다. 그리고 나와 형의 이름이 화이트보드에 적혀 있던 그 농장이었다. 나는 그 사람에게 정보를 얻고자 말을 걸었다. 


 그분은 그 마을에 온 지 얼마 안 됐었다. 나보다 늦게 왔다. 그럼에도 그 대박 농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일을 언제 시작했는지 물어봤더니 그 또한 얼마 안 됐었다. 심지어 나와 형의 이름이 화이트보드에 적혀있는 것을 확인한 날보다 늦었다. 


 “그 농장 직원 뽑아요? 안 뽑는 것 아니었어요?”

 “뽑더라고요” 

 “뭐 이력서나 연락처 남기고 갔더니 연락이 왔나요?”

 “아니요. 농장 앞에서 텐트 치면서 죽치고 있었어요” 


 그 사람은 마을에 오자 마자 그 농장 입구에 텐트를 치며 지냈다. 그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몇몇 한국 사람들은 대박 농장이라는 곳의 입구에 텐트를 치며 지냈다. 그중 무리를 이룬 채로 그 마을에 온 뒤 각자 뿔뿔이 흩어져 대박농장의 입구에서 ‘죽치며’ 앉아 있었다. 텐트를 설치해 그곳에서 자는 것도 불사했다. 그러다가 농장주가 채용을 하면 무리에게 연락을 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지인들을 계속 연결하며 대박 농장 내 나름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었다. 농장주 입장에선 한, 두 명만 채용하면 그 후의 직원은 알아서 데려오니 편했을 터였다. 따로 이력서 관리를 할 필요도 없고, 면접을 볼 필요도 없고, 일일이 연락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한국 워홀러들은 단순히 근로자일 뿐만 아니라 인사관리까지 해 주었다. 게다가 어차피 단순 노동인데 그 사람의 이력이나 면접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몸만 튼튼하면 될 터였다. 설사 그 단순노동을 못하는 직원이 들어와도 상관없었다. 일한 만큼 받아가는 곳이니 농장의 스케줄에 크게 영향이 없는 이상 일 못하는 직원 하나의 무능력함은 큰 문제가 안 됐다.


 다른 대박 농장에서 이미 일하고 있는 사람들한테도 말을 걸어 물어봤다. 그들도 방법만 다르지 농장 앞에서 눌러앉은 사람들이었다. 혹은 지인을 통해 들어간 사람들이었다. 농장 앞에 차를 대고 하루 종일 기다린 사람도 있었다. 새벽부터 에이전시에 가서 하루 종일 기다렸다 온 사람들도 있었다. 텐트를 치고, 그곳에서 라면을 끓여 먹으며 살기도 했다. ‘어차피 돈만 벌어 가면 된다’라는 태도로 그들은 채용을 위한 온갖 기발한 생각을 해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들의 간절함과 열정이 나보다 훨씬 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당시 나는 한국 사람들의 행동에 조금의 염증을 느꼈다. 남의 농장 앞에 텐트를 치고 생활하는 모습이 무책임해 보였다. 나 역시 한국을 대표한다는 마음 따위는 없었다. 다만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국격을 떨어뜨리고 싶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해 들은 일련의 모습들을 상상하니 징글징글하게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배가 아팠다. 눈앞에서 내 황금이 뺏긴 것 같았다.


 그날 축구장에서 들은 소식을 사촌 형에게 이야기했다. 형도 한국인들의 징글징글한 열정에 혀를 내둘렀다. 형과 대화를 하고 나니 불쾌함과 질투보다는 다른 감정이 올라왔다.


 “형, 나 다시 퍼스(Pearth)로 갈래”


 결단처럼 내뱉는 말에는 사실 체념이 담겨 있었다.


 ‘어쩌면 '대박 농장'의 일자리를 얻기엔 나의 간절함은 부족했던 것 아닐까? 개뿔도 없으면서 자존심만 뻣뻣했던 것 아닐까? 나도 한몫 단단히 챙기고 싶은 욕심에 이 마을에 왔으면서 누굴 욕할 수 있겠어. 골드러쉬 때 이민자들이 금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우고 죽이는 것에 비하면야. 텐트 치는 것 따위는 양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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