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홀러도 급이 있다?
#아픈 손가락
늦은 밤 퍼스에 도착했다. 공항 모든 상점은 닫혀 있었고, 공항 자체도 문을 닫으려 했다. 퍼스 공항은 항시 24시간 운영되지 않았다. 내가 짐을 찾고 공항을 빠져나가는 공항 내 조명이 하나 둘 꺼지기 시작했다. 공항을 나오니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픽업 차량의 운전자 분께 연락을 하려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길가에 대기하는 차량이 한 대뿐이어서 바로 알 수 있었다. 그 분과 약간의 통성명을 하고 차에 탑승했다. 차를 타고 공항을 빠져나오는데 공항의 모든 불이 다 꺼져있었다. 오늘 영업을 마친 공항이 무척 신기했다.
이동하면서 집주인과 연락을 했다. 집주인 친구분 차량을 무사히 탑승해 지금 집으로 가고 있다고 했다. 집에 도착하니 이미 12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전화로 목소리만 듣던 아저씨(이하 라비)가 나와 나를 반겨 주었다. 라비는 키가 작고, 까무잡잡한 피부에 강렬한 눈빛을 갖고 있었다. 무서운 눈빛과 달리 라비는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고, 웃으며 내 방을 안내해 주었다. 잠자리가 바뀐 첫날이었음에도 나는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이튿날 정오까지 푹 자고 일어났다. 거실에 나오니 라비가 있었다. 라비와 나는 함께 마당으로 가 대화를 시작했다. 보증금을 비롯한 집세와 관련된 이야기를 했고, 라비는 지켜줘야 할 집의 규칙 등을 알려줬다.
라비는 베테랑 호스터였다. 이미 라비의 집을 거쳐간 워홀러들이 많았다. 라비는 그들에게 일자리 소개를 비롯해 처음 호주에 온 친구들이 잘 적응하게끔 도와줬었다. 내게도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적극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와 동시에 집 주변에 워홀러들이 일할 수 있는 공장들을 알려주었다.
라비는 그동안 자신의 집에서 머물다 간 사람들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몇몇 친구들과는 사이가 돈독 해져서 그 친구들의 나라에 놀러 갔던 사진들도 보여 주었다. 핸드폰의 사진을 하나하나 넘기던 와중 아시아사람만 나오는 것에 궁금증이 생겨 물어봤다. 라비는 오로지 아시아 사람한테만 방을 내준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라비가 처음 호주에 왔을 때부터 지금의 일본인 아내를 만나 정착하게 된 이야기를 들려줬다.(라비의 아내도 일본에서 이혼 후 호주에 오게 됐다고 했다)
라비는 20년 전에 호주에 왔다. 그때 수중에 들고 온 현금이 고작 100불도 안 됐다. 물가를 감안하더라도 턱없이 적은 돈이었다. 라비는 호주에 왔던 초창기에 길거리에서 자면서 쓰레기를 뒤져가며 끼니를 해결했다. 그때 호주는 키와 덩치가 작은 동양인에게 친절하지 않은 나라였다. 라비는 길을 가다가 이유 없이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겨우 일자리를 구해도 임금도 제대로 안주는 경우도 있었다. 일자리에서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해야 했다.
라비는 자신이 그간 고생했던 이야기를 하면서 손가락을 보여줬다. 라비는 자신의 손가락 중 몇 개는 감각이 없다고 했다. 라비의 손을 자세히 보니 관절 몇 개가 뒤틀려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친절한 백인들도 있었지만 인종차별 트라우마 때문에 아시아 세입자만 받는다고 했다. 유럽 출신 세입자도 한 번 받아본 적이 있었는데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닌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아시아에서 온 젊은 친구들이 예의도 바르다는 등의 말을 했다. 특히 한국, 일본, 대만, 홍콩 등에서 온 친구들이 어른을 공경할 줄 안다며 칭찬했다. 말레이시아 아저씨가 한국 아저씨 같은 말을 하는 점이 재밌고, 신기했다.
라비의 사연을 듣고 나니 왜 라비의 눈 빛이 그렇게 매서웠는지 알 수 있었다. 다행히 지금의 아내를 만나 행복하게 사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나는 라비의 이야기를 들으며 궁금한 점을 물어봤다. 대화가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라비가 곧 룸메이트가 생길 것이라 했다.
#Club 백정
닭고기 공장에 이력서를 넣자마자 연락이 왔다. 바로 다음 날부터 출근을 하게 되었다. 그 닭고기 공장은 워홀러들 사이에서 '대박 공장'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러나 내가 맡은 일은 거의 '쪽박'에 가까웠다.
공장은 마트에 닭고기를 납품하는 회사였다. 워홀러들이 주로 하는 일은 청소, 닭고기 포장, 상품 출하, 그리고 닭고기 해체였다. 이 중에서 닭고기 해체 작업은 성과급제였고, 나머지 일들은 시급제로 운영됐다. 시급은 서호주 법정 최저임금보다 적었지만, 그 공장이 대박 공장으로 불린 이유는 해체 작업이 꽤나 돈이 되기 때문이었다.
첫 출근 날, 나는 전화로만 통화했던 공장의 인사 담당자를 찾아갔다. 그녀는 중년의 호주인이었다. 그녀는 한 중국 직원을 내게 소개해 줬다. 그 중국 직원의 안내에 따라 공장을 둘러봤다. 공장 근로자들은 대부분 아시아인이었다. 특히 중화권 사람들이 많았고, 해체 작업을 맡은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인이었다.
나는 닭고기 해체 작업을 하고 싶다고 했지만, 그 포지션은 이미 자리가 다 찼다고 했다. 대신 내가 맡게 된 일은 청소와 닭고기 포장이었다. 포장 작업은 닭가슴살 4개씩을 한 봉지에 담아 포장하는 것이었는데, 포장 기계가 있어서 일이 비교적 수월했다. 하지만 그만큼 하루 종일 서서 단순한 노동을 해야 했다. 대략 7~8시간 동안 계속해서 닭가슴살 4개를 봉지에 넣고 기계에 투입하는 일을 반복했다.
저녁이 되면 청소 담당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직원들이 퇴근했다. 호주는 '저녁이 있는 삶'을 중시하는 나라라 퇴근 시간이 확실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세척이 끝난 닭고기가 가득 담긴 상자들이 공장 한쪽에 쌓여 있었다. 상자에 빼곡히 담긴 닭들을 보니 백숙이 떠올랐다. 해체 작업을 맡은 사람들은 상자에서 닭을 꺼내 부위별로 해체하는 작업을 하루 종일 했다. 상자 하나를 해체할 때마다 성과급이 지불됐고, 그들은 상자 하나를 마칠 때마다 화이트보드에 자신의 이름 옆에 획을 그었다. 능숙한 사람은 하루에 4~5 상자씩 처리했다.
공장 안에서는 클럽에서 틀 법한 신나는 음악이 울려 퍼졌다. 작업장 곳곳에 강렬한 비트가 가득 찼고, 그 안에서 닭고기 해체 작업이 한창이었다. 작업자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닭을 들었다가 칼을 내려쳤다. 칼이 닭의 뼈와 살을 가르고, 도마 위에 쌓인 부스러기들이 흩어졌다. 그들의 손놀림은 지극히 반복적이었고, 동작 하나하나에는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도마는 닭에서 떨어져 나간 뼈와 살로 가득 찼고, 그 위에는 어느덧 피가 흥건하게 고였다. 그 피는 도마 가장자리를 넘나들며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바닥 역시 닭의 핏물이 스며들며 끈적거렸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들은 마치 이 모든 혼란이 익숙한 것처럼 묵묵히 작업을 이어갔다. 도마 위에 닭 피를 비롯한 찌꺼기가 너무 많아질 때면 호스로 물을 한 번 뿌렸다. 그와 동시에 그중 한 명이 크게 소리를 외쳤다. 잇따라 옆에 있는 사람들도 함께 환호성을 했다. 마치 콘서트나 페스티벌 현장에서 내뱉을 법한 소리였다. 그들은 그 단순하면서도 잔인한 작업의 노고를 환호성으로 달래며 일을 했다. 노동요는 닭고기 해체 작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무척 중요해 보였다.
그 장면이 나에게는 너무나도 기이하게 느껴졌다. 신나는 음악, 둔탁한 칼질, 그리고 피가 흥건하게 고인 도마 위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이는 그들의 손놀림, 작업대에서 미끄러지는 닭고기, 화이트보드에 늘어가는 획수, 작업의 마디마디에서 울려 퍼지는 환호성. 찰리 채플린 영화인 모던 타임스의 한 장면 같았다.
해체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퇴근한 후에도 나는 3~4시간 더 일해야 했다. 육가공 업체인 만큼 위생이 중요해서 청소하는 데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문제는 내가 이렇게 10~12시간을 일해도 임금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해체 라인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닭고기 두 상자만 처리해도 내 하루 임금보다 더 많이 벌었다. 그들은 오전에만 두 상자를 끝낼 정도였다.
라비의 집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홍콩 출신의 룸메이트가 생겼다. 그는 라비와 이미 친분이 있던 친구였다. 내가 라비 집에 들어갔을 때 라비가 미리 언질 해 준 그 친구였다. 때 마침 닭 공장에서 일할 사람을 찾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 친구에게 일을 제안했다. 홍콩 친구는 흔쾌히 승낙했고, 다음 날부터 나와 함께 출근했다.
홍콩 룸메이트와 어울리다 보니 공장 내에서도 주로 중화권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그 때문인지 공장 내 일부 한국인들이 내가 한국인이 아니라고 생각한 듯했다. 나도 몇몇 직원들은 그들이 말하기 전까지 국적을 알기 힘든 사람들도 있었다. 내가 중화권 사람으로 오해 받든 말든 별로 상관없었다. 그리고 호주에 있는 만큼은 웬만하면 주로 외국인들과 어울려 지내려고 했으므로 내 국적의 오해는 적절한 방패 막이였다.
하지만 해체 라인에서 일을 하려면 그들과 친해져야 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해체 라인을 한국 사람들이 다 잡고 있었다. 그들은 빈자리가 날 때쯤이면 미리미리 자신들의 지인들을 그 자리에 꽂아 줬다. 그렇게 그곳도 카르텔이 단단히 형성된 듯 보였다. 나도 그 사람들과 친해져서 빈자리를 노려야 했다. 하지만 친해져야 할 과정을 생각하니 조금 망설여졌다.
해체 라인에서 일하는 한국인 대부분들이 담배를 피웠다. 그날도 ‘시발’이라는 익숙하고, 친숙한 욕이 휴게실을 메우고 있었다. 그중 덩치가 크고 유독 욕을 자주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 덕분에 공장에 일하는 모든 직원들이 ‘시발’이라는 한국 욕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그는 K-Slang의 선도자였다. 큰 덩치에 팔에는 문신이 가득했다. 담배를 피울 때마다 시발이라는 욕설과 니코틴 연기와 자신의 체액을 적절히 섞어 바닥에 뱉어댔다.
하루는 여느 때처럼 홍콩 룸메이트와 같이 휴게실에서 쉬고 있었다. 쉬는 시간에 맞춰 공장 근로자들은 나와 간식을 먹거나 담배를 폈다. 먼발치 해체 라인에서 일하는 한국 사람들이 보였다. 저마다 엄청난 작업량과 반나절만에 벌어들인 수입에 대해 기염을 토해내기 바빴다.
쉬는 시간 종료를 알리는 벨이 울리고, 직원들은 하나 둘 휴게실을 나갔다. 나도 다시 작업복의 매무새를 다듬고 공장으로 휴게실을 나서려 했다. 휴게실을 빠져나가는 길목에 K-Slang 선도자가 아직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내 홍콩 룸메이트가 다른 홍콩 친구와 이야기를 하며 먼저 그 앞을 지나갔다. 나는 뒤따라 가는 도중 그와 눈이 마주쳤다. K-Slang 선도자는 내가 한국인인 줄 모르는 듯했다. 한국 사람끼리는 서로 알아본다고 하지만 사실 이렇게 많은 아시아인이 섞인 곳에서는 헷갈릴 법도 하다. 1초도 안 되는 눈 마주침을 무시하고 나는 공장으로 들어갔다. 그때 내 뒤통수를 강타하는 말이 들려왔다.
"이 병신 짱깨 새끼들 좆뱅이 쳐봤자 얼마 못 벌어."
그곳에도 계급은 존재했다. 다만 그 계급은 공장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스스로 만들어 내고 있었다. 해체라인에 강력한 카르텔을 형성한 한국인들은 그들이 공장 내에서 상위 계급을 차지한다고 착각했나 보다.
돈을 더 번다고 한들 닭을 도륙하는 일에 무슨 자부심을 느낀단 말인가? 옛날이었으면 그냥 백정 아닌가? 타지에서 같이 고생하는 처지에 그딴 말을 내뱉는 게 이해 안 됐다.
나는 애써 못 알아들은 척하며 작업장으로 들어갔다.
#가구 공장
홍콩 룸메이트와 같이 밥을 먹고 있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지원서를 넣었던 가구 공장이었다. 호주에서 1년 넘게 일했고, 진진에서 일을 마칠 때 받은 레퍼런스 덕에 일자리 구하기가 수월했다. 통화하며 출근 날짜를 맞췄다. 홍콩 룸메이트에겐 이번주까지만 이곳으로 출근한다고 했다. 일을 못 구했을 때 누군가 날 꽂아주길 바랐는데 어느새 내가 홍콩 룸메이트를 닭고기 공장에 꽂아준 샘이 됐다.
가구 공장에 출근하는 첫날이었다. 공장은 외관상으로 그저 커다란 창고 같았다. 공장 안으로 들어서자, 허리 높이의 선반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선반 위에는 다양한 형태의 나무판자가 놓여 있었다. 직원들은 나무판자를 가공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공장 내부는 각종 기계가 내는 소음으로 가득했다. 윙하며 울리는 각종의 기계들은 나무를 깎고, 다듬으며 다량의 먼지를 뿜었다. 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톱밥들이 공중에 나풀거렸다. 나풀거리던 톱밥들은 작업대와 바닥을 가득 채웠다. 작업자들의 옷과 머리에도 톱밥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첫날인 만큼 나는 기계를 다루지 않았다. 주로 나무 원판을 작업자들한테 날라주거나 기타 가구 부품을 옮겼다. 작업이 끝난 나무 들을 다시 조립라인이나 도색라인으로 옮겼다.
정신없이 물건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퇴근할 때가 되었다. 퇴근 준비를 하던 중, 벽면 너머 다른 공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엔 한국인 특유의 영어 억양이 묻어 있었다.
벽을 돌아가니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진진의 닭농장에서 일할 때 나와 함께 방을 썼던 동생이었다. 둘 다 반가워하며 인사를 나눴다. 동생은 나보다 일주일 먼저 와서 일하고 있었다. 우리는 반가운 마음에 같이 저녁을 먹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안부를 주고받았다.
그 후로도 가구 공장 일은 특별히 힘들지 않았다. 하루 종일 톱밥 속에서 일하다 보니 기관지가 걱정 됐지만, 마스크를 쓰고 며칠 일 해보니 생각만큼 나쁘지 않았다.
공장에서 맡은 내 주된 일은 가구 부품의 마무리 작업이었다. 직사각형 나무 패널을 대만 선배들이 잘 다듬고 나면 나는 마무리 작업을 했다. 주로 사포질이었다. 사포질을 하며 가구 부품의 표면을 매끄럽게 만들어야 했다. 나무 결이 거친 곳이 없도록 꼼꼼하게 다듬어야 했다. 선반에 1차 가공이 끝난 나무판자를 올려놓고 열심히 문질렀다. 30분만 지나도 머리와 작업복은 톱밥 범벅이 됐다.
물건을 옮기거나 간단한 조립도 했다. 일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작업복과 머리카락은 톱밥으로 가득했다. 그럼에도 일은 재밌었다. 어렸을 때부터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내 손으로 나무를 다듬어 가구를 만드는 일은 제법 적성에 맞았다. 더욱이 시급도 높은 편이었다.
가구를 만드는 일은 세심함을 요구했다. 그래서 섬세한 작업은 주로 숙련된 작업자들이 맡았다. 공장에는 대만 출신 노동자들이 2~3명 있었다. 그들 모두 나처럼 워킹홀리데이로 호주에 왔다가 스폰서 비자를 받아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성실했다. 일하는 모습을 보면 마치 이곳에 뼈를 묻을 작정인 듯했다.
그들 중 한 명이 특히 인상이 좋았다. 그는 내게 일하는 요령과 기술을 친절하게 알려주곤 했다. 덕분에 일하는 법을 빠르게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나를 유독 괴롭히는 대만 친구도 있었다.
그는 내 사포질이 끝나면 검사를 했다. 사포질이 덜 된 곳, 과하게 된 곳 등을 내게 일러주었다. 그 일러주는 과정에서 그의 짜증과 불평이 가득했다. 처음에는 나도 배우는 입장이니 불만 없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의 짜증은 날이 갈수록 커져갔다.
하루는 공장 사장한테 내 작업을 컨펌받았다. 사장은 내 작업물을 마음에 들어 했다. 어느새 일이 제법 손에 익었다. 그때 나를 괴롭히던 대만 친구가 나타나 내 작업물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어김없이 그는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친구의 말이 끝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이미 사장한테 확인받았고, 사장이 마음에 들어 했다고 말했다. 그의 얼굴이 벌게 지면서 말이 빨라졌다. 나는 그의 영어를 알아들을 수 없어서 다시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내 그 친구가 중국어로 말을 했다.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정확히 들려오는 한 단어가 있었다. 중국 욕이었다. 진진에서 살 때 대만친구들과 홍콩 친구들로부터 배운 단어였다. 사실 그 단어를 몰라도 중국어로 나를 욕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누구라도 알아챘을 만한 상황이었다. 나도 욕의 다양성으로는 부족하지 않은 우리 고유 언어로 되받아 쳤다. 문제는 그도 한국의 가장 흔한 욕 중 하나인 ‘시발’을 잘 알고 있었다.
모국어로 욕을 한 마디씩 주고받은 두 아시아인은 곧이어 영어로 설전을 시작했다. 나도 화가 났지만 한편으론 이 상황이 조금 웃겨 보였다. 설전이 오갈수록 그는 점점 더 흥분하며 말을 더듬었다. 원어민 수준은 아니었지만 나는 이미 내 생각과 감정을 영어로 전달하는데 큰 무리가 없었다. 반면에 그 친구의 영어는 나보다 한참 서툴렀다. 고조된 감정이 언어로 배설되지 않으면 사람이 어떤 얼굴이 되는지 그때 알 수 있었다. 결국 그는 나한테 이상한 말을 외치곤 돌아서 갔다.
“You know what? I have a 482 visa. Your visa is just working holiday.”
(이봐! 나는 482 비자야. 너는 고작 워킹홀리데이 비자고)
482 비자가 뭔지 몰랐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482 비자가 흔히 말하는 스폰서 비자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왜 그 말을 내뱉었는지도 금방 이해했다. 그의 말은 워홀 비자보다 계급이 높은 스폰서 비자 앞에서 까불지 말라는 뜻이었다. ‘나는 고작 워홀러인 너 따위 와는 다르다’는 경고이자 협박이었다.
호주에 온 한국 사람들끼리도 급을 나눈 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영주권자를 비롯한 교민 - 유학생 - 워홀러 순으로 계급이 나뉜다. 자신의 불안을 감추기 위해 유독 타인을 괴롭히는 사회에서 온 한국인들이야 그러려니 했다. 나도 그 저주에서 자유롭지는 못할 테니. 하지만 대만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유교의 영향일지, 한자의 영향일지, 불교의 영향일지. 아시아의 치열한 경쟁문화는 사람들에게 잘못된 계급 상승의 욕구 부추겼고, 이는 조금이라도 계급을 나눠 상대를 누루고 싶은 욕구를 낙인처럼 남겼다.
그 대만 친구가 왜 나를 싫어했는지는 나중에야 알았다. 원래 내 자리에 자신이 데려오려고 했던 친구가 있었다. 그런데 친구가 사정상 한 달 늦게 오게 되어 내가 대신 그 자리에 들어간 것이었다. 그러니 내가 눈엣가시였던 것이다. 그는 나를 내보내고, 자신의 친구를 이 공장에 데려오고 싶었다.
그가 친구를 꼭 이 공장에 데려오고 싶은 이유가 있었다. 가구 공장 사장은 열심히 일하는 직원에게 482 비자를 지원해 줬다. 흔히 워홀러들 사이에서 스폰서십 비자라고 부르는 이 비자는 영주권을 딸 수 있는 비자다. 이 비자로 3년 이상 일을 하고, 영어 시험 및 몇몇 행정 요건을 맞추면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다.
가구 공장 사장은 정치를 아는 사람이었다. 호주 영주권을 취득하고 싶어 하는 아시아계 이방인들의 욕망을 잘 이용했다. 열심히 일한 직원에게 482 비자를 주며 당사자를 비롯한 주변 근로자들의 근로 의욕을 고취시켰다. 하지만 동시에 비자를 주고도 중간에 철회하기도 했다.(직접 보진 못했지만 오래 일한 대만친구가 알려주었다) 물론 해당 직원의 근로 태도가 불성실해서였을 수 있다. 하지만 어제까지 함께 482 비자로 일하던 친구가 하루아침에 해고당하는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충성을 맹세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일하는 공간은 사장을 제외하면 모두 아시아계 근로자였다. 전부 482 비자 아니면 워홀러들이었다. 호주 현지인이 일하는 작업장은 다른 곳에 있었다.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원자재를 들여오거나 완성된 가구를 출하하는 일 같았다. 확실한 것은 점심시간 때 만난 호주 백인들의 옷에 톱밥 따위는 묻어 있지 않았다.
하루는 사장이 호주 직원들과 하는 이야기를 엿들었다.
“They are just working machine. They would die for permanant residency”
(제네들 그냥 일하는 기계야. 영주권 준다면 죽는시늉이라도 할걸)
교민, 유학생, 워홀러 말고 계급이 하나 더 있었어. 흰 피부의 호주 사람.
#한국이 싫어서? 한국인이 싫어서!
가구 공장을 나왔다. 표면적인 이유는 ‘이곳은 영어를 사용하기 좋은 일터가 아니야’였다. 사실은 그 가구공장에서 부품 취급당하는 것 같아 관뒀다. 더욱이 그날 이후로 나를 괴롭히던 대만 직원의 잔소리와 핀잔이 점점 더 심해졌다.
그 후 약 한 달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밤새 게임만 했다. 게임하다 새벽에 잠들어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일어났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다시 게임만 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와서 뭘 하든 무슨 소용이 있나 싶었다. 어차피 지금부터 돈을 아무리 많이 모아도 유학은 물 건너갔다. 그렇다고 당장 한국에 가기는 싫었다. 호주에 1년 넘게 있었는데 모은 돈이 남들보다 적어서 창피했다. 이렇게 이도 저도 아닌 채로 게임이 주는 당장의 도파민에 나를 맡겼다.
그러면서도 외로움은 점점 커져갔다. 호주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향수병 따위는 안 걸릴 것이라 호언 장담했다. 심지어 향수병 걸리는 사람들이 이해가 않됐다. 여전히 한국이 많이 그립지는 않았다. 음식을 생각하면 향수의 감정이 조금 올라왔지만, 그것이 내 마음을 짓누를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친구가 보고 싶었다. 단순히 친구들이 보고 싶은 게 아니라 우정이라는 감정 자체가 그리웠다. 호주에 와서 많은 외국인 친구들 사귀었고, 그들과 우정을 나눈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한국인과 한국어로 소통하고, 한국의 정서를 나누는 것이 고팠다.
호주에 오고 나서 한국 사람들을 무조건적으로 피하지는 않았다. 유학원이나 일터에서 만난 한국인들과 친하게 지냈다. 하지만 한인들만 가득한 집의 방을 구하거나, 한국인들의 술자리, 한인 교회, 한국인들의 취미 모임 등에 먼저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좋은 사람을 만나고 좋은 추억도 쌓았을 수 있다. 하지만 영어 실력은 전혀 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과 영어에 방해될 만큼은 아니게 적당히 거리를 두며 지냈다.
하지만 호주에 온 지 약 1년 반이 흐른 시점에서 나는 내 원칙을 깨고 한국인들의 모임에 참여하기로 했다. 길어진 타지 생활에 몸도 마음도 지쳐 친구가 필요했다. 온라인 한인 커뮤니티 ‘퍼참(퍼스 참을 수 없는 그리움)’에 접속했다. 친목 게시판에 들어갔다. ‘00년 생 00 띠 모임’이 눈에 띄었다.
모임에 나가 보니 워홀러뿐만 아니라 영주권자, 영주권자와 결혼한 사람, 유학생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대부분은 나와 같은 워홀러였다. 같은 나이 모임인 만큼 처음부터 서로 반말을 했다. 처음의 어색함이 사라지고 편하게 술잔을 부딪쳤다.
각자 타국에 와서 고생했던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워홀 와서 누가 더 고생했는지 겨루는 것 같았다. 처음엔 각자의 이야기에 공감과 응원이 오갔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말 틈 사이로 불쾌한 언행들이 점점 커져갔다.
"내 친구들 아직도 공무원 준비 중이야. 난 그냥 여기서 일하면서 자유롭게 사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해."
"대기업 다니는 친구가 야근이 힘들다더라. 여기선 적당히 일하고 퇴근하면 내 시간인데, 그게 더 좋은 거 아니야?"
"맞아, 한국에서 남들 눈치 보며 사느니, 여기서 내 방식대로 사는 게 훨씬 나아."
"명문대 나온 내 친구도 맨날 죽는소리해. 난 차라리 호주에서 일하면서 내 삶 즐기는 게 더 현명한 것 같아."
"한국에서는 정해진 대로만 살아야 하잖아. 난 여기서 내 마음대로 사는 게 더 나아."
다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의 삶을 폄하하는 말을 쏟아냈다. 동시에 자신이 호주에서 얼마나 돈을 많이 벌었는지 자랑하기 바빴다. 정해진 길로만 달려야 하는 한국과 비교하며, 이곳 호주의 자유를 찬양했다. 자유의 땅에 발을 내디딘 자신을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정작 한국에 돌아가면 무엇을 할지 막막해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의 말에는 한국에서 받은 상처와 한국에 대한 미움, 그리고 한국에 있는 친구들의 삶을 깎아내리는 감정이 섞여 있었다. 그와 동시에, 호주에서 고생한 모험담에 대한 자부심과 여기서 모은 자산을 자랑하는 마음도 어우러져 있었다.
‘근데 영주권 없으면 다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나?’
나는 그들이 대부분 결국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처지라는 생각을 혼자 골똘히 했다. 그러던 중 한 친구가 내 워킹홀리데이 이야기를 물어봤다. 자연스럽게 진진의 닭농장 이야기로 대화가 이어졌다. 그런데 내 말을 끊고, 그 친구가 말했다. 그의 말에는 약간의 역정이 담겨 있었다.
“야, 그 돈도 안 되는 데서 왜 그렇게 오래 일했어? 세컨드 비자 돈 주고 사면 되잖아. 남들 다 그렇게 하는데, 뭣하러 농장에서 쓸데없이 시간 버려. 돈 많이 벌 수 있는 농장도 아니고. 여기 와서 돈만 벌어가면 되지, 무슨 외국인 친구야. 어차피 말도 잘 안 통하는데. 워홀 성공 여부는 결국 돈이야.”
나도 돈 때문에 이곳에 왔다. 가고 싶었던 영화 학교는 너무 비쌌고, 부모님은 내 꿈을 반대했으며, 우리 집은 넉넉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벌어서 가겠다는 생각으로 호주에 왔다. 구구절절 거창하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결국 나도 돈 때문이었다. 물론 다른 목표들도 있었지만, 솔직히 돈이 충분히 있었다면 굳이 호주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오더라도 1년 이상 머물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돈에 관심이 있고, 돈 이야기를 하는 게 뭐가 잘못됐겠는가. 그러나 오로지 돈만 이야기하는 또래들을 보니 왠지 서글퍼졌다. 그리고 나도 원했던 그 돈을 목표만큼 못 모았기에 더 뼈아팠다.
그날 나는 또 하나를 깨달았다. 계급은 단지 영주권자, 시민권자, 계급은 영주권 및 시민권자-유학생-현지인으로만 분류되지 않았다. 돈을 많이 번 워홀러와 많이 못 번 워홀러로 나누어졌다. 같은 계급 사이에서도 철저히 급을 나누길 바쁜 사람들이 있었다.
그날의 술자리는 결국 워홀러들의 싸움으로 마무리 됐다. 나의 경험을 옹호하는 친구와 자신의 경험을 숭배하기 바쁜 친구가 다투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욕설이 오고 갔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들어 본 적이 없던 맞짱 뜨자는 말이 오갔다. 둘 다 밖으로 나가 맞짱을 뜨지는 않았다. 아니 아무도 밖으로 먼저 나가지 않았다.
나를 옹호했다고 해서 그 친구에게 딱히 더 고맙진 않았다. 그 친구가 내 입장을 지지해 준다기보다는 자신을 지키기 바빠 보였다. 돈이 최고라며 워홀 와서 번 돈을 자랑하는 친구도 처음에는 부러웠지만 나중엔 안쓰러웠다. 그도 호주에서의 생활은 돈 번 것 이외에는 할 말이 없는 것 같았다. 결국 둘 다 안쓰러웠다. 정확히는 호주에 와서까지 무한경쟁으로 인해 불안에 시달리는 우리 세대가 애처로웠다. 조국의 저주는 먼 이국땅에서도 그 힘을 발휘했다. 나는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