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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d 강상원 Nov 16. 2024

Ep12 낭만의 파편, 희망의 잔해

고립과 상실 속에서 짠 해

“잔인하리만치 이 세상은 내 감정 따위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바다를 달리는 기차


 번버리 남쪽 차로 한 시간 거리에 부셀톤(Busselton)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바다 위를 달리는 기차기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모험’에 주인공 치히로가 가오나시와 함께 바다열차를 타는 장면이 나온다. 바다열차는 호주의 부셀톤 제티를 모티브 한 것이다.


 타이거 스네이크에 물릴 뻔한 일이 있고 나서 며칠 후 주말을 이용해 여행을 갔다.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고 나니 마음이 요동 쳤다. 가뜩이나 고립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에 그런 일을 겪으니 생각이 복잡했다. 


 덜덜이와 함께 부셀톤으로 향했다. 마을은 한적하고 평화로웠다. 바다 열차를 탈 수 있는 곳에 가니 관광객들이 제법 있었다. 백사장 주변으로 공원이 이어져 있었고, 공원에는 바비큐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늘도 호주 사람들은 자연과 여유를 즐긴다’라는 문구가 잘 어울리는 한 폭이었다. 공원과 백사장 사이에 있는 도로를 따라 걷다 보니 작은 기차선로가 나왔다. 자갈길 위에 설치한 기차가 아닌 아스팔트 위 작은 홈을 파서 만든 선로였다. 그 선로의 한쪽 끝에는 기차를 정박하는 곳이 있었다. 다른 한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바다가 펼쳐졌고, 그 펼쳐진 푸른 들판을 가로지르는 길이 있었다. 바다로 향하는 잔교가 길게 뻗어 있었고, 그 위에 기차 길이 놓여 있었다. 곧 블루 하우스라는 이름의 매표소가 보였다. 표를 사고 기다리니 저 멀리서 바다열차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기차 양옆으로 사람들이 고개와 손을 내밀며 웃고 있었다. 이내 열차가 블루 하우스에서 멈췄고, 안내원 지시에 따라 사람들이 내렸다. 


 기차가 멈춰 섰을 때 궁금증이 들었다. 다시 바다로 나가려면 열차를 돌려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선로는 하나였다. 정박소로 들어가 고개를 돌려 나올 거라 생각했다. 한국 사람들이라면 답답함을 느꼈을 테지만 호주 사람들이라면 느긋하게 기다릴 테니. 그렇게 생각하던 와중 신기한 일이 펼쳐졌다. 기차의 맨 앞부분이 분리됐다. 기차 전체를 돌리는 것이 아닌, 머리칸만 분리해 반대편에 연결하는 것이었다.


 분리된 머리칸은 정말 아담하고 귀여웠다. 기관사가 그 귀여운 차량을 모는 모습은 마치 테마 마크에서나 볼 것 같은 장면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즐거워하며 사진을 찍으며 인사했고, 아이들은 기관사 뒤를 졸졸 따라갔다. 얼핏 장난감처럼 보였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에게 동심이란 즐거움을 선사했으니 장난감이 맞았다.


 기관사는 상상할 수 있는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수염 가득한 얼굴에 바다 빛에 그을린 피부와 인자한 눈 옆으로 퍼져있는 자글자글한 주름. 전형적인 마음씨 좋은 백인 할아버지 인상이었다. 기관사는 눈가의 자글자글한 주름을 한껏 진하게 만드며 사람들과 아이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기차 머리칸이 천천히 기차 옆을 지나 기차의 꼬리 부분에 붙었다. 기관사의 귀여운 도킹 작업이 마무리 됐다.


 기관사와 안내원의 지시에 따라 사람들은 자리를 차곡차곡 채웠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분 좋은 경적이 울리고 기차가 조금씩 나아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밝은 웃음소리를 내며 이 동화 같은 경험을 잔뜩 누리고 있었다. 아이들 몇몇은 들뜬 마음이 주체가 안 됐는지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의 행복한 웃음소리를 들으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서 낯선 생각이 피어났다.


 ‘기관사님은 매일 이런 행복을 선물해 주시는 건가? 매일 사람들의 밝은 미소와 행복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사시는 건가?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이렇게 매일 사람들에게 행복한 기억을 선사하는 삶도 좋겠다. 아니 어쩌면 이런 삶이 훨씬 행복하겠다. 한 번도 이런 삶이 좋겠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훗날 웃을 수 있기 위해 오늘 당장 웃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으락? 아니면 내가 여전히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일까?’


 한국이었으면 천대받았을 직업. 무시받았을 삶. 나 조차도 그저 추억을 즐길 뿐 이런 삶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전혀 안 했을 것 같았다. 늘 돈을 많이 벌거나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업만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런 삶을 동경했다. 하지만 그 순간은 외부가 정한 삶의 정답 같은 것들이 전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기관사님의 삶을 선망하고 있었다. 그저 매일매일 사람들 웃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보람차고 의미 있는 인생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달리는 열차 아래를 보면 나무로 만들어진 교각이 보였다. 바다 열차라기보다는 육지 열차에 가까웠다. 하지만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사방이 무한한 푸름으로 둘러 쌓여 있었다. 조금만 멍하니 그 경치를 즐기다 보면 정말 바다 위를 달리는 듯했다. 


 바다 열차는 어느새 선로 끝에 다다랐다. 선로 끝에는 해저 전망대(Underwater Observatory)가 있었다. 전망대 뒤로도 교각은 조금 더 이어져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그곳에서 바다를 실컷 관찰하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추억을 사진으로 남기고 있었다. 나도 교각 한쪽에 앉아 멍하니 바다를 감상했다.


 바다를 감상하면서 마음이 편안 지는 듯했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내 평온을 깨는 두 침투병이 있었다. 첫 째는 뱀에 물릴뻔한 사고가 일으킨 부정적인 감정들이었다. 그날 일이 마치 악몽처럼 지속적인 괴로움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꿈에 나타나는 등의 트라우마는 없었다. 그 일이 발생했던 날도 공포심은 찰나였다. 내 첫 번째 침투병은 죽음에서 오는 무서움 따위가 아니었다. 그 경험이 불러일으킨 울분, 억울함, 허무 등이었다.


 호주에 와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단 생각이 들었다. 돈도 많이 못 모았고, 영어도 그저 기초 회화만 가능한 수준이었다. 여행을 했든, 호주에서만 해 볼 수 있는 문화체험을 했든. 그랬다면 추억이라도 만들었을 텐데, 돈 아낀다고 아무것도 못 했다. 3마리 토끼 잡으려다 이도저도 아닌 꼴이 됐다. 지난 2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함께 깊은 성찰이나 고민 없이 맹목적으로 목표를 추구했음을 깨달았다.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한 채 나무의 열매만 열심히 맺으려 한 꼴이었다. 군대 2년, 호주 2년 도합 지난 4년간의 내 청춘이 무의미하게 흘러갔다 느꼈다.


 무언가 결단을 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디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정해진 선로로 왕복만 해도 박수와 미소를 받는 제티(Jetty)가 새삼 부러웠다.


 해안가로 돌아오는 길엔 기차를 타지 않았다. 길게 뻗은 교각 위를 천천히 걷고 싶었다. 바다 위를 달리는 열차에 타 봤으니 이젠 내 발로 바다 위를 걸어 보고 싶었다. 폭풍이 몰아치는 내 내면과 달리 지나치게 평화로운 바다와 햇살이 참 야속했다. 잔인하리 만치 이 세상은 내 감정 따위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자연이 만든 아름다움에 경이와 서운함을 느끼며 내 안의 이율배반을 삼켰다. 자연이 주는 경치가 한순간이나마 평온을 가져다주는 듯했지만 두 번째 침투병이 들이닥쳤다. 두 번째 침투병은 한국에서 마주하게 될 현실이었다.


 덜덜이를 타고 다시 집으로 향하는 길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그동안 내가 나의 시간을 헛되이 보냈다는 생각에 허무하고 우울했다. 아울러 곧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에 숨 막혔다. 늦은 나이에 복학, 도저히 적성에 안 맞는 전공, 이미 취업한 동기와 친구들, 어른들을 비롯한 주변의 눈치. 성공하기 전까지 절대 한국에 들어오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떠났는데, 성공은커녕 실패 꾸러미만 한 보따리였다. 마주할 미래를 생각할수록 가슴이 조여왔다. 덜덜이 핸들 위의 손이 덜덜 떨렸다.


#부서진 캐리어 


 오랜만에 어머니와 통화를 했다. 여전히 첫마디는 밥 잘 먹고 다니냐는 질문이었다. 이어서 아픈 데는 없냐고 물으셨다. 그 말을 듣자마자 무언가 용암처럼 목구멍에 뛰쳐나오려 했다. 애써 폭발할 듯한 욕구를 눌렀다.


 제대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교통사고가 났다. 길을 건너다 차와 부딪혔다.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그래도 확인 차 병원에 들러 엑스레이를 찍었다. 의사 선생님이 내 척추 사진을 보고는 디스크를 조심하라고 했다. 정확한 진단을 위해선 mri를 찍어봐야 하지만 현재 에스레이 사진상 몇 번, 몇 번 척추 사이의 간격이 좁아져 있음을 알려줬다. 여기서 더 악화되지 않게 잘 관리하라고 했다. 아직 창창한 20대에 벌써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억울했다. 2년간 나라에 몸 바친 대가는 좋아하는 축구, 농구 등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한편으론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허리가 아프지 않았다. 어쩌면 믿기 싫었던 것 같다.


 어학원에 다니면서 키친 핸드로 일할 때였다. 그때 3~4시간 동안 허리 한번 못 펴고 설거지를 해야 했다. 처음엔 괜찮더니 어느새 허리에 이상한 통증이 느껴졌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통증이었다. 하루는 일하는 도중 허리를 늘리는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내 척추를 따라 혈액을 비롯한 각종 액체들이 빠르게 이동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액체는 내 머리를 강타하면서 강한 현기증을 불러일으켰다. 잠시 비틀거렸지만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그때 의사 선생님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의사 선생님은 축구나 농구 같은 격한 운동을 삼가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쭉 농구를 즐겼다. 특히 어학원과 설거지일이 일상이던 때 농구를 많이 했다. 일이 끝나면 허리가 아팠지만 도서관에 가 오전에 배운 내용을 복습했다. 혹은 같이 수업 듣는 유타와 농구를 하러 다녔다. 유타는 농구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유타덕에 퍼스 일본인 커뮤니티에 참석해 농구를 하기도 했다. 쉬는 날이면 유타는 나에게 농구하자며 연락을 했다. 나는 쉬어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만큼 농구가 좋아서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영어 실력을 더 빨리 많이 늘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이를 위해선 개인 공부도 중요하지만 외국인 친구들과 많이 붙어 다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유타 무리에는 귀여운 친구가 있었다. 농구하러 가면 항상 그녀가 있었다. 이런 마음과 영어 실력을 늘리고 싶은 간절함은 허리 통증을 무마시켰다. 아니 애써 무시하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부터 허리가 아팠다. 여느 때처럼 자고 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던 통증이 더 거세져 있었다. 그날은 처음으로 어학원을 결석했다.


 배 타는 일을 할 때도 하루 만에 잘린 것이 어쩌면 다행일 거라 생각했다. 내 몸으로 해낼 수 없는 육체 강도였다. 겨우겨우 버텼다 해도 허리가 다 망가졌을 것 같았다. 이후 닭 농장에서 일할 때는 다행히 허리가 아프지 않았다. 퇴근하고 운동을 꾸준히 했고, 일터에서 허리에 안 좋은 자세를 취할 일이 없었다. 무거운 물건을 많이 날라야 할 일도 없었다. 하지만 허리 통증은 오래 안 가서 다시 찾아왔다. 만다린 농장에서 일할 때였다. 캥거루 백이 오렌지로 가득 차면 무게가 7~8kg 정도 했다. 캥거루 백에 오렌지를 채워 넣을수록 허리와 목에 감겨있는 천이 나를 아래로 당겼다. 그 상태로 사다리 위에서 균형을 잡아야 했다. 이는 전체적인 허리 라인에 무리를 주었다. 이후 가구 공장에서 하루 종일 사포질을 할 때도 통증이 찾아왔다. 중간중간 허리를 펴주며 일하니 482 비자를 소지한 대만 친구는 내 작업 속도를 못마땅 해 했다.


 엄마가 아픈 곳은 없냐고 물어본 그 순간 지난 호주에서의 삶이 편집된 채로 빠르게 스쳐갔다. 내 허리가 주인공인 짧은 영화였다. 엄마한테 사실 허리가 아프다고 말하고 싶었다. 걱정 끼치기 싫어서 애써 이를 눌렀다. 하지만 가족한테 응석 부리지 않으면 누구한테 응석을 부릴 수 있을까 하는 마음도 일었다. 태연함과 어리광 사이에서 망설이던 중 방 한쪽에 누워있는 캐리어가 보였다.


 손잡이며 바퀴며 구석구석 망가졌고, 가죽은 군데군데 찢겨 있었다. 바퀴 하나는 없어진 채 3개만 외로이 남아 있었다. 남은 세 바퀴도 표면이 닳고 닳아 거칠었다. 손으로 문질러 보니 사포 표면보다 까끌까끌했다.


 진진에 처음 도착한 날 캐리어의 손잡이가 부러 졌다. 상단 손잡이나 측면 손잡이가 아닌, 길게 늘였다 줄였다 할 수 있는 손잡이였다. 많은 짐을 잔뜩 욱여넣은 채로 그동안 이리저리 굴러 다녔다. 결국 늘었다 줄었다 할 수 있는 여의봉 같은 부분이 약화 돼 있었다.


 차가 없는 상태로 이사를 다니다 보니 캐리어를 질질 끌고 다녔다. 하루는 40도에 육박하는 날씨에 깜빡하고 선크림을 바르지 않은 채로 나왔다. 막상 길거리에서 캐리어를 다시 열어 선크림을 찾기가 귀찮아 그냥 걸었다. 햇살이 바늘처럼 피부를 찌르는 듯했다. 호주의 여름은 한국처럼 습하지 않아 견딜만하다. 하지만 햇볕의 직접적인 뜨거움은 한국보다 강하다. 그래서 호주의 차들은 칠이 잘 벗겨진다. 사람들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 차량용 보호필름을 필수로 입힌다. 사람용 보호필름을 바르지 않았던 그날은 온몸으로 따가운 가시를 느꼈다. 고개를 반쯤 늘여 뜨린 채 헉헉대며 걸었다. 땀이 온몸을 적신 상태였다. 고개 뒤 쪽에서 둔탁하게 굴러가는 캐리어 바퀴 소리가 났다.


 ‘나중에 결혼하게 되면 차보다 무조건 집부터 마련한다! 오갈 데 없이 나 혼자 돌아다니는 것도 서러운데, 온 가족이 이딴 경험을 하게 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도 이루지 못한 일(자가마련)을 그때는 그렇게 상상하며 돌아다녔다. 당시에는 이동해야 할 때마다 내 삶이 고작 이 가방 하나에 다 담기는 것 같아 허무하기도 했다.


 또 한 번은 캐리어를 들고 어딘가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갑자기 캐리어가 덜컥 소리를 내더니 균형이 무너졌다. 뒤틀린 균형은 내 손에도 전달 됐다. 살펴보니 바퀴 하나가 빠져 버렸다. 빠진 바퀴는 내가 걸어오던 길 위에 처연 남겨져 있었다. 바퀴를 주워 다시 끼워 보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바퀴가 빠진 것이 아니라 연결부가 부러져 있었다. 그날은 차라리 지나가는 술주정뱅이한테 심한 인종차별을 당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무시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부러진 바퀴는 속상하다 못해 화를 불러일으켰다. 


 순간 머릿속에서 캐리어를 주인공으로 한 짧은 영화가 빠르게 상영됐다. 2년간 동고동락한 캐리어에 연민이 갔다.


 ‘너도 나 따라다니느라 고생 많았겠다’


 계속 말이 없자 어머니가 돼 물으셨다.


 “왜 아무 말이 없어. 어디 진짜 아파?”

 “아니야. 아픈데 없어. 뭐 좀 생각하느라고. 다음에 또 통화해요” 


 봇물 터지듯 쏟아질 응석을 누르기 위해 얼른 전화를 끊었다.


 ‘엄마 나 허리 아파. 너무 아파서 10분도 못 앉아 있겠어. 그리고 얼마 전엔 죽을 뻔했어. 뱀한테 물릴 뻔했어. 나 힘들어. 그리고 여기 너무 외로워. 그런데도 한국에 가고 싶지가 않아. 한국에 가기 무서워’


#소원을 말해봐


 번버리에 지내는 동안 매일같이 마트에 들렀다. 할인 품목이 매일 달랐다. 당일 할인하는  식자재가 내 저녁거리였다. 돈을 아끼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어느덧 장 보는 것이 재밌어 매일 들렸다. 나름대로 파스타 레시피를 연구하고, 요리하는 것이 재밌었다. 


 마트가 있는 건물에는 마트 외에도 식당, 카페, 주류샵 등 다양한 가게가 있었다. 그중 복권 판매점이 가장 눈에 띄었다. 호주는 복권 당첨 금액이 어마어마하다. 복권 종류별로 다르지만 최소 300만 호주 달러 이상 최대 1억 호주 달러까지 받을 수 있다. 외국의 복권 당첨금이 한국보다 훨씬 많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았다고 해서 눈으로 직접 목격했을 때의 놀라움이 덜 한 것은 아니었다. 화려한 포스터들이 복권 판매점 앞에 줄 맞춰 붙어있었다. ‘Jack Pot’, ‘power ball’이라는 단어와 함께 폭죽이 터지는 그림이었다. 각각의 포스터들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는 듯이 보였다. 적혀있던 당첨금은 군대 있을 때 TV에서 본 걸그룹만큼 눈부셨다. 마치 소녀시대 같았다. 그중 호주에서 당첨금이 가장 큰 Power Ball 복권이 특히 눈에 띄었다.


 처음에는 재미로 샀다. 일주일에 한 번씩 들려 15불만큼의 복권을 구입했다. 최소 구매 금액이었다. 재미로 했지만 복권을 구매함과 동시에 펼쳐지는 상상의 나래를 막을 수는 없었다. 호주 생활이 지치고, 힘들수록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는 속도와 그 스케일이 커져갔다. 당시 외국인이 복권에 당첨되면 즉시 영주권을 발급해 준다는 소문이 있었다. 내수 진작을 위해 복권에 당첨된 외국인이 본국보다 호주에서 돈을 쓰도록 유도하기 위함이었다.(역시 소문이었다. 전혀 사실무근인 이야기다) 당시에 나는 그 말을 믿었다. 그래서 당첨 됐을 때 0이 여러 개 붙은 숫자와 “한국에 영원히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증서를 상상했다. 영주권을 받게 된다면 인쇄해서 방에 걸어둘 참이었다. 호주에 올 때만 해도 영주권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곳은 내가 미국의 영화학교를 가기 위한 통과점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나라는 이젠 나의 도피처가 돼 있었다. 한국에 돌아갈 생각만 하면 숨이 막혀왔고, 그럴수록 호주에 머무르고 싶은 마음이 강해졌다.


 어느새 복권을 재미로 사지 않았다. 불과 15불에 내 미래를 걸고 있었다. 매주 복권 판매점으로 잔뜩 부푼 기대를 않고 갔다. 그리고 엄청난 실망감과 함께 새 복권을 다시 샀다. 한 주 동안 심심할 때마다 복권을 꺼내 보며 온갖 망상을 펼쳤다.


 ‘이 돈이면 한국 따위 안 가도 돼. 아니 한국에 가서 실컷 놀다 와야지. 엄마 아빠도 호주에 모셔와야겠다. 이 돈이면 평생 돈걱정 없이 살 수 있어. 미국에 있는 영화 학교도 갈 수 있어. 안 가면 어때. 이 평화로운 나라에서 천천히 생각해 보면 되지. 돈만 있으면 못하는 게 없는 세상이잖아.’


 호기심과 재미로 시작한 취미 활동이 어느새 망상을 부추기는 일종의 도박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현실성이 없음을 어느 정도 알았을까? 다행히 복권 구매에 15불 이상 쓰지 않았다.


 그날도 습관처럼 복권 가게에 들렀다. 여느 때처럼 지난주 구매한 복권을 바코드를 리더기 밑으로 집어넣었다. 바코드 위로 불빛이 몇 번 반짝이더니 모니터 위로 문구가 하나 떠 올랐다.


 ‘Congratulation! You won!’


 그때만큼 심장이 요동친 적이 없었다. 그와 동시에 믿기지 않았다. 나한테 이런 행운이 찾아올 거라곤 전혀 생각 못했다. 수많은 상상과 다양한 상상을 했지만 실제로 당첨될 거라 믿지 않았다. 딱히 내 팔자가 기구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반대로 천운을 타고났다는 생각도 절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에 ‘나는 어쩌면 천운을 타고난 것은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소녀시대가 내게 지니를 데려왔다.


 이런 내 생각을 판매점 사장님이 읽었을까? 인상 좋은 호주 할아버지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이내 할아버지는 내게 말을 건넸다.


 “Would you like to exchange it for cash now?(현금으로 바꿔줘?)”

 “I’m sorry. I think I am supposed to go to bank. Plus, I don’t think this store has that much money in cash.(은행에 가서 받아야 하지 않아요? 이 가게에 그렇게 큰돈을 현찰로 갖고 있어요?)” 

 “Oh boy. This store does have that much money in cash.(오! 이 가게는 그만큼의 돈이 충분히 있어)”


 할아버지는 손가락으로 모니터를 가리켰다. ‘Congratulation’이라는 문구 옆에 당첨금이 쓰여 있었다. ‘12.5$’(당시 환율로 약 10,000원). 나는 그 금액을 보는 순간 민망해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께는 내가 착각해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할아버지는 그 상황이 즐거우셨는지 괜찮다고 말하셨다. 나는 그 돈으로 다시 복권을 샀다.


#내가 왜 이렇게 싫지?


 번버리 지역의 농장에서 일하는 첫 한두 달은 그럭저럭 잘 지냈다.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사 먹었고,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참지 않았다. 물론 과소비는 하지 않았다. 그렇게 적당히 삶의 여유를 느끼면서, 악착같이 돈만 바라본 지난날의 아쉬움을 달랬다. 호주 사람들처럼 저녁 있는 삶을 즐기기 시작했다. 무교임에도 불구하고 주말엔 교회에 나가 지역 커뮤니티와 어울렸다. 예전에는 무조건 영어 연습이 목표였지만 이제는 그저 사람과 어울리는 것 자체를 즐겼다. 처음에는 이렇게 내 안에 평화가 번지는 듯했다.


 어느덧 호주 생활에 많이 익숙해져 있었다. 그렇다고 한국에 갔을 때 적응하지 못할 거란 생각은 안 들었다. 한국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나라지만 호주는 기껏 2년 정도 머물렀을 뿐이니. 다만, 호주에서 사는 것이 점점 좋아졌다. 영화감독, 큰 명성, 거대한 부 따위는 마음속에서 사라졌다. 성공을 향한 나의 갈망이 결국 사회에서 주입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이곳의 여유와 평범한 하루하루가 좋았다. 유학을 포기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마음도 오래가지 못했다. 워킹홀리데이 비자가 곧 만료될 예정이었다. 이제 겨우 호주 라이프를 즐기기 시작했는데, 곧 끝나간다니 아쉬움이 몰려왔다. 처음부터 영주권을 목표로 삼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도 들었다. 어느새 호주에 왔을 때 품었던 목표들도 흐려져 있었다. 유학 자금을 마련하고, 영어 실력을 늘리겠다는 생각은 더 이상 현실적이지 않았다. 마치 잡으려 해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목표들이 흩어져 버린 느낌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적당히 열심히 일하고, 적당히 무기력하게 살아갔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지만, 그 일에 대한 열정은 이미 식어 있었다. 일은 하되, 마음은 멀리 떠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허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내 몸도 마음처럼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호주에서의 고된 노동이 쌓여서일까. 아니면 무기력함이 내 몸을 지배한 탓일까. 허리 통증이 점점 심해졌다. 꾸준히 헬스장에서 운동한 덕분에 나아지는 듯했다. 하지만 매일 파이프를 들었다 놨다 하며 데드리프트를 하다 보니 통증이 심해졌다. 몸이 아플수록 마음은 더 서러워졌다. 그 서러움에 죽을 고비를 겪으니 울분이 터졌다.


 한국에 돌아갈 날이 다가올수록 초조한 마음이 커져갔다. 한국에 돌아간다면 복학하는 것 외에 내가 내릴 수 있는 선택이 없었다. 29살에 복학한다는 사실이 창피했다. 게다가 31살에 대학 졸업을 할 생각 하니 막막했다. 호주라면 31살에 대학을 다니든, 대학원을 다니든, 아르바이트를 하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나이와 직책이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나라에서 정해진 레일이 어느 곳보다 뚜렷한 세상으로 다시 갈 생각을 하니 위축됐다. 이미 레이스에서 한참 뒤처진 채로 다시 레일에 몸을 실을 생각을 하니 내가 참 후져 보였다. 귀국한다면 여권에 ‘도태’라는 도장을 찍어줄 것 같았다. 누군가 직접적으로 비교하지 않아도 사회적 비교의 화살이 매일 나에게 쏟아질 거라 믿었다. 페이스북을 통해 동기들이 하나 둘 취업한 소식이 들려왔다. 몇몇은 벌써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각자의 삶이 있다지만, 내가 호주에서 보낸 2년은 한국에서 전혀 쓸모없는 경력이었다. 기계공학 관련 회사에 취업하는데 설거지하고, 닭 똥 치우고, 오렌지 따고, 감자 캐는 일 따위가 스펙이 될 리 없었다. 


 ‘어쩌면 나는 한국 사회로부터 이곳으로 도망친 것은 아닐까?’


 호주로 모험을 떠나겠다는 결심이 한국 사회로부터 도망친 행위에 불과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심장이 요동쳤다. 


 ‘만약 내 행동이 온전한 회피였다면 지난 2년 동안 내 삶은 무엇이었을까? 이국적인 라이프 스타일에 도취되어 현실을 외면한 것이었을까? 가끔은 도망치고, 외면할 수 있다지만 황금 같은 20대에 무려 2년이나 시간을 허비한 것일까?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는 꿈은 다 허상이었을까? 나는 그렇다면 무엇이 하고 싶은 거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자문이 하루 종일 나를 괴롭혔다. 일하는 도중에도 잠깐의 틈새를 파고드는 뛰어난 스파이 같았다. 그 첩보원은 게릴라전에 아주 능했다. 순식간에 나를 괴롭히고 금세 사라졌다. 가끔은 무한히 증식하는 바이러스 같았다. 나쁜 생각의 연쇄 고리가 빠르게 증식하면서 절망 이외에는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한국에 돌아간다면 희망이 없어 보였다. 어차피 도망쳐 온 곳이라면 이곳에 눌러사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당장 영주권을 목표로 해도 취득까지 최소 4년, 많게는 10년은 필요했다. 그 마저도 장담 할 수 없었다. 육신이 정착할 곳을 모르니 영혼도 함께 표류했다. 당시 내 영혼은 한국과 호주 사이의 바다 어딘가를 떠다니고 있었다.


 갈피를 못 잡은 채 방황하는 배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망각과 중독이었다. 퇴근 후 가볍게 즐기던 맥주 한 잔은 더 강한 관성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매일 취한 채로 잠들기 시작했다. 그 무렵부터 헬스장도 가지 않았다. 술에 조금씩 의존하기 시작했고, 술 없이는 불안한 마음을 달랠지 못했다. 집에서는 빨리 돌아와 복학하라는 압박이 들어왔다. 취기가 가져다주는 도피와 망각이 더 절실해졌다. 하루를 버티고 집에 돌아오면 걱정과 초조함이 밀려왔다. 심장이 뛰고 숨이 가빠왔다. "이대로 한국에 돌아가면 내게 뭐가 남을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결국 술을 마시는 것만이 그 스트레스를 잠시나마 잊게 해 주었다. 술잔을 기울일 때마다 조금씩 그 무게를 내려놓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여전히 나는 같은 자리, 같은 고민 속에 있었다. 방을 나가기 싫었다. “어쩌면 평생 이 방에서만 살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도 했다. 고립감과 외로움에 괴로워하면서도 밖으로 나갈 용기가 안 났다. 한국에 돌아가기 겁났다. 그렇게 한참을 술렁이는 마음으로 술독에 빠져 살던 때 접한 Graham 아저씨의 부고 소식은 더 아프게 다가왔다.

 베개를 힘껏 움켜쥐며 슬픔, 분노, 우울, 좌절을 토해냈다. 베개에 얼굴을 깊게 파묻어 혼자 울며 소리를 질렀다. 큰 낭만과 희망을 품고 호주에 왔던 때의 내가 떠올랐고, 이내 그때의 내가 원망스러웠다. 그 자식이 참 미웠다.


 ‘이게 아닌데, 이렇게 살고 싶지 않은데, 이게 아니었는데. 나 뭐 하지? 나 어쩌지? 왜 호주를 선택했을까? 왜 영화감독이라는 말도 안 되는 망상에 사로 잡혔을까? 결국 호주 와서 아무것도 못했잖아. 집에는 걱정만 끼치고, 내 커리어에 하나도 도움 안 되는 짓만 하고, 결국 친구들이랑도 멀어지고. 나는 왜 이리 시간을 헛되이 보냈지? 나는 왜 이리 못났지? 나는 왜 이렇게 한심하지? 왜 난 안되지? 난 왜 이러지?’


 ‘내가 왜 이렇게 싫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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