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년기’ 남성과 젠더 질서의 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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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괜찮은 남자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이 한 문장은 단순한 연애담의 푸념이 아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수많은 여성들의 공통된 의문이자, 현대 사회가 맞이한 젠더 질서의 급격한 변화에 대한 물음이다. 교육 수준도, 경제력도, 삶에 대한 주도권도 이전 세대보다 월등해진 여성들은 이제 더 이상 생존을 위한 결혼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선택의 자유 앞에서 묻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할 만한 남성은 왜 이렇게 보기 힘든 걸까?”
‘괜찮음’의 기준은 왜 달라졌는가?
먼저 우리는 ‘괜찮다’는 말의 의미를 새롭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과거, 괜찮은 남성이란 주로 '경제적 능력'과 '가장의 책임감'으로 정의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여성들은 더 이상 생계를 이유로 누군가의 아내가 되지 않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순히 ‘돈 잘 버는 사람’이 아니라, 정서적으로 성숙하고, 관계 안에서의 평등과 존중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다.
여성의 기대치가 높아졌다고 비판할 것이 아니라, 시대가 요구하는 '좋은 인간됨'의 기준이 달라졌음을 이해해야 한다. 이제 괜찮은 남성이란, 공감 능력과 자율성, 가사·육아에 대한 태도, 심리적 안정성을 갖춘 '동반자'여야 한다. 이 변화는 여성의 욕심이 아니라, 사회 구조의 진화가 낳은 자연스러운 결과다.
미디어와 문화가 만든 ‘미성년기’ 남성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일부 남성들은 여전히 ‘소년의 세계’에 머무르고 있다. 감정 표현에 서툴고, 자기 관리에 무심하며,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은 종종 미디어에서 ‘유쾌한 캐릭터’로 소비되곤 한다. 자취방에 찌그러진 맥주 캔을 방치한 채 게임에 몰두하는 모습은 웃음의 코드가 되었고, 성숙하지 못한 남성성은 하나의 트렌드처럼 소비된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는 관계의 붕괴로 이어진다. 여성들은 더 이상 ‘이해해 주고 참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성숙하지 못한 남성과 평생을 함께하는 선택 대신, 혼자 사는 삶, 또는 대안 가족 형태를 택한다. 정자은행, 비혼모, 동거와 파트너십 등 새로운 가족 모델이 확산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괜찮은 남자'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게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착시가 하나 있다. 정말 괜찮은 남자들이 ‘사라진 것’일까? 아니면 그들을 찾는 방식이 낡았기 때문에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일까?
실제로 한국과 미국 모두 남성 대졸 비율은 여전히 50%를 넘으며, 청년 세대 다수는 전문직 종사자이거나 삶에 진지한 태도를 지닌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대기업이나 고연봉 직군에만 몰려 있지 않다. 창업, 프리랜서, 예술, 비영리, 지역 공동체 등 다양한 영역에서 '자기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여전히 '괜찮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연봉, 학벌, 직장 명성에 머무른다면, 이러한 변화는 쉽게 포착되지 않는다. 괜찮은 남성은 단지 ‘전통적 성공의 틀’ 바깥으로 이동했을 뿐이다.
남성의 침묵과 고립, 그리고 정서의 억압
남성들이 감정 표현에 서툰 것은 생물학적 특성이라기보다는 문화적 학습의 결과다. “남자는 울면 안 된다.” “남자는 약하면 안 된다.” 이런 메시지를 들으며 자란 남성들은 자신의 감정을 말로 표현하거나 타인에게 의지하는 훈련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관계란 결국 감정의 교환으로 이루어진다. 감정 언어를 익히지 못한 남성들은 관계에서 소외되기 쉽고, 점차 고립된다. 실제로 OECD 국가 중 한국은 자살률 1위이며, 그중에서도 중년 남성의 비율이 가장 높다. 그들은 사회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홀로 버티는 중이다.
이제 우리는 남성에게도 ‘감정의 언어’를 가르쳐야 한다. 정서 표현은 약함의 표시가 아니라, 성숙한 인간의 기본 소양임을 사회가 함께 배워야 한다.
새로운 젠더 사회계약: 경쟁 아닌 공존으로
지금까지의 사회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역할을 ‘분리’하고, 때로는 ‘경쟁’의 관계로 구획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사회계약이 필요하다. 그것은 남성과 여성이 고정된 역할에서 벗어나, 공존과 협력의 파트너십을 이루는 새로운 공동체 계약이다.
여성의 사회 진출은 남성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남성도 가정 안에서 의미 있는 존재로 자리할 수 있으며, 여성도 일터에서 동등한 주체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성 역할은 유동적이어야 하며, 서로의 삶을 존중하는 문화가 사회 전반에 뿌리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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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으며: ‘괜찮은 남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괜찮은 남자는 어디로 갔을까?’라는 질문은 결국 다음의 질문으로 이어져야 한다.
"우리 사회는 좋은 인간이 자라기에 적합한 환경인가?"
이 질문에 진지하게 답하기 시작할 때, 남성과 여성 모두는 더 나은 관계를 만들 수 있다. 좋은 남성은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그들이 성숙해질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사회적 기회, 문화적 격려, 제도적 기반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여성 역시 변화된 시대에 맞게 관계의 기준을 다시 설계해야 한다.
결국 '괜찮은 남자'의 재등장은 단지 남성의 문제가 아니다. 이 시대가 ‘괜찮은 사람’이 자라나기 좋은 사회가 되는가의 문제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는 남성과 여성 모두가 성숙한 개인으로 성장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요약 포인트:
여성의 기대치는 사회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다.
남성은 성인식 없이 '미성년기'에 머무르고 있으며, 이는 사회적 구조 탓이다.
괜찮은 남성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게 되었고, 판단 기준이 낡았다.
남성에게도 감정 표현과 정서적 교육이 필요하다.
남성과 여성은 경쟁이 아닌 공존의 사회계약을 새롭게 맺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