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퍼의 ‘열린 사회’가 한국에 던지는 질문
칼 포퍼가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겠다는 시도는 늘 지옥을 만들어낸다”라고 말한 지 80년이 지났지만, 이 경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20세기가 전체주의라는 극단의 실험을 통해 ‘완전한 사회’의 불가능성을 확인했다면, 21세기의 한국은 보다 은밀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그 유혹을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완벽한 정의, 완전한 애국, 완전한 개혁, 완전한 평등을 약속하는 목소리들은 시대의 파고 속에서 다시금 힘을 얻고 있다.
그 목소리들은 언뜻 보면 선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대의를 품은 듯 보인다. 그러나 포퍼가 강조했듯, 정치가 ‘완전함’을 약속하는 순간 인간은 뒷자리로 밀려난다. 우리는 이미 수차례 경험했다. 한국 사회는 대의를 앞세우는 순간, 실제 인간의 삶은 쉽게 지워지고, 타인을 적으로 규정하는 언어는 너무도 손쉽게 발화된다.
한국 사회의 “천국 건설” 욕망 ― 정의의 과잉, 애국의 과잉, 개혁의 과잉
한국의 민주주의는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그 속도 속에서 우리는 ‘과잉된 대의’를 경험했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국가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어느새 “절대 옳음”을 주장하는 구호에 익숙해져 왔다.
한때 광장을 가득 메웠던 촛불과 태극기는 서로 완전히 다른 색채를 띠었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공통된 심리를 드러낸다. “옳은 편”에 서고 싶다는 갈망, “완전한 진실”을 붙들고 싶다는 안도감, 그리고 “내가 속한 집단은 틀릴 수 없다”는 도덕적 우월감이다.
이 감정들은 인간적이다. 그러나 정치가 이 감정을 이용해 “우리만의 천국”을 약속하는 순간, 사회는 균열을 향해 빠르게 기울기 시작한다.
한국 정치의 새로운 전체주의 ― 제도적 폭력이 아니라, ‘정서적 전체주의’
오늘의 한국은 포퍼가 비판했던 고전적 전체주의와는 다르다. 지도자가 전면에 나서 ‘하나의 진리’를 강요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대신 우리는 정서적 전체주의라는 새로운 형태를 목격하고 있다.
다른 의견을 말하면 ‘적폐’, ‘토착왜구’, ‘종북’ 등의 낙인이 찍히고 SNS에서는 서로를 ‘진영의 배신자’로 몰아붙이며 정치적 소속은 개인의 인격보다 앞서 평가되고 도덕적 우월감을 무기 삼아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는 언어가 난무한다
이때 정치는 더 이상 의견의 경쟁이 아니라, 도덕적 심판의 장으로 변한다. 포퍼가 말한 “닫힌 사회”는 바로 이렇게 온다. 제도적 폭력보다 훨씬 은밀한 방식으로, 시민들의 마음속에서부터.
한국의 역사주의 ― “문제의 원인은 이미 정해져 있다”
포퍼가 비판한 역사주의는 한국 사회에도 깊게 스며 있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말한다.
“대한민국의 모든 문제는 ○○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결국 ○○ 세력이 망쳤다.”
“역사의 흐름은 결국 우리 편의 승리로 간다.”
좌우를 막론하고 동일한 패턴이다. 특정 집단을 악의 근원으로 단정하고, 특정 이념을 역사적 필연으로 믿는 태도—이것은 우리 스스로 열린 사회를 포기하는 방식이다.
한국 사회는 유난히 ‘설명해 주는 이야기’를 원한다. 복잡한 현실보다는 단순하고 명확한 원인과 영웅‧악당의 구조를 선호한다. 그러나 포퍼는 말한다. 역사는 예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택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만큼, 잘못된 선택을 고칠 수 있는 만큼 열린 것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과제 ― “틀릴 수 있는 용기”를 회복하라
포퍼적 관점에서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의견의 차이가 아니라,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다. 우리는 상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나는 잘 모르겠다.”
“내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다.”
“다른 길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저 한 문장을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어떤 진영은 그것을 ‘배신’이라고 부르고, 어떤 진영은 그것을 ‘정신 승리의 포기’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퍼는 ‘틀릴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회만이 열린 사회라고 했다. 열린 사회란 완전함을 추구하지 않는 사회, 스스로를 고칠 수 있는 사회다.
그곳에서는 정책은 ‘성역’이 아니라 토론의 대상이고, 시민은 ‘전사’가 아니라 비판적 이성의 주체이다. 한국이 성숙한 민주주의로 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새로운 이념이 아니라, 스스로 수정할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이다.
한국 사회에 던지는 포퍼의 마지막 질문
포퍼의 말은 한국 사회의 오늘을 향한 질문처럼 들린다.
●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해 서로를 적이라고 부르는가?
● 우리는 왜 “옳음”을 독점하려 하는가?
● 우리는 과연 ‘정의를 실현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정의를 독점하려는 것’인지 자신에게 물은 적이 있는가?
● 우리는 자유를 말하지만, 정작 타인의 자유는 존중하고 있는가?
●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열린 사회의 시민인가, 닫힌 사회의 신도인가?
포퍼의 경고는 화려하지도, 극단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조용하고, 인간적이며, 깊은 회복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는 우리에게 완전한 천국을 약속하지 않는다. 대신 아주 적은 가능성을 제시한다.
천국은 완성된 체제가 아니라, 서로를 지옥으로 몰아넣지 않으려는 우리의 태도 속에서만 피어난다.
이 한 문장은 오늘의 한국 사회에 대단히 절실하다. 완전한 정의나 완전한 민족, 완전한 개혁을 약속하는 정치보다, ‘틀릴 수 있는 우리들’이 서로의 공간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사회—그것이야말로 열린 사회이자,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민주주의의 미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