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배신자인가

배신의 정치, 그리고 국가를 소모시키는 충성의 윤리

by 엠에스

<누가 배신자인가>

— 배신의 정치, 그리고 국가를 소모시키는 충성의 윤리


정치에서 ‘배신자’라는 낙인은 언제나 사고의 종결을 의미한다. 그 말이 등장하는 순간, 토론은 사라지고 충성 경쟁만 남는다. 한국 정치에서 이 단어는 너무 자주, 너무 쉽게 사용되어 왔다. 그리고 그때마다 손해를 본 것은 특정 정당이 아니라 국가 전체였다.


국민의힘 3선 의원 출신 이혜훈의 기획예산처 장관 지명을 둘러싼 최근의 소동은 이 오래된 병리의 최신 사례다. 국민의 힘은 그를 즉각 배신자로 규정하고 제명했다. 반면 민주당 강성 지지층은 “왜 보수 인사를 중용하느냐”며 이재명 정부를 압박한다. 양쪽 모두 분노하지만, 정작 분노의 대상은 명확하지 않다.


이 장면은 한 인물의 선택이 아니라, 한국 정치가 ‘국가’보다 ‘진영’을 앞세우는 구조에 깊이 중독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진영 정치의 현주소: 충성 경쟁으로 전락한 이념


오늘날 한국의 진보·보수는 더 이상 정책이나 철학의 경쟁이 아니다. 대신 “누가 우리 편인가”, “누가 끝까지 남았는가”라는 충성도 시험으로 변질되었다. 그곳에는 동지는 있되 국민은 없다.


국민의힘 내부를 보자. 극우 성향에 가까운 강경 세력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 결과 지지율은 20%대 중반에서 고착화되어 있다. 이는 ‘결집’이지 ‘확장’이 아니다. 정당이 생존하려면 외연을 넓혀야 하지만, 이들은 스스로를 좁은 울타리 안에 가두고 그 안에서만 순도를 재단한다. 미래가 아닌 과거에 머물며 닫힌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민주당 역시 다르지 않다. 집권 이후 ‘중도 확장’과 ‘실용 경제’를 말하지만, 강성 지지층은 여전히 인사 하나하나를 이념 검증의 잣대로 재단하며 압박한다. 이는 정부가 정책 연합(coalition of policy)이 아니라 지지층 관리 조직으로 전락할 위험을 내포한다.


배신이라는 말이 등장할 때, 정치는 왜 퇴행하는가


역사적으로 ‘배신자’라는 언어가 빈번해질수록 정치 공동체는 약해졌다. 전체주의 체제에서 충성은 최고의 미덕이었고, 이동은 곧 범죄였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그 반대다. 민주주의는 이동 가능성, 즉 생각을 바꾸고 연합을 재구성할 수 있는 자유를 전제로 작동한다.


그럼에도 한국 정치는 여전히 전근대적 충성 윤리에 머물러 있다. 정당을 국가 운영 조직이 아니라 ‘정체성 공동체’로 인식하고, 그 울타리를 넘는 행위를 도덕적 타락으로 규정한다. 이때 정치인은 정책으로 평가받지 않고, 소속과 과거 이력으로만 재단된다.


이혜훈 사태에서 국민의 힘이 보여준 태도는 이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들은 왜 그가 그 선택을 했는지, 그 선택이 국가 운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묻지 않았다. 대신 “우리 편이 아니다”라는 이유만으로 정치적 사형을 선고했다.


이는 정당이 더 이상 국민과 국가를 위한 정책 플랫폼이 아니라, 진영 충성 클럽으로 전락했음을 보여주는 신호다.


왜 지금 ‘중도 확장’과 ‘합리 보수’가 중요한가


이재명 정부의 이번 인사는 우연이 아니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그리고 무엇보다 구조적 저성장 국면에 진입한 한국 경제의 현실 앞에서, 정부는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분배 중심 정책만으로는 더 이상 경제의 외연을 넓힐 수 없다는 사실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는 지금 세 가지 한계에 동시에 직면해 있다.

성장률 둔화,

재정 여력의 감소,

글로벌 산업 재편 속에서의 경쟁력 약화.


이 상황에서 합리적 보수의 재정 감각, 예산 통제 경험, 제도 설계 능력은 이념을 떠나 실용적 자산이다. 이혜훈의 기용은 진보의 후퇴가 아니라, 진보가 현실과 타협하는 지점에 가깝다.


다시 말해 이는 이념 연합이 아니라 정책 연합이다. 그만큼 확장되고 열려 있다는 의미이다. 진영을 떠나 국가를 위해 다행인 것이다.


이 선택이 갖는 구조적 효과


① 경제의 ‘분배 독주’를 막는 제도적 균형

기획예산처는 상징적 자리가 아니다. 국가의 방향을 숫자로 고정시키는 곳이다. 합리적 보수 인사의 참여는 복지 확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속 가능성을 점검하는 역할을 한다. 이는 장기적으로 재정 파탄을 막고, 결국 복지 자체를 지키는 일이다. 성장은 분배의 반대가 아니고 조건이다.


② 보수의 미래를 위한 역설적 기회

지금 보수가 잃어버린 것은 권력이 아니라 신뢰다. 극단적 언어와 과거 집착, 음모론에 가까운 세계관은 중도층을 멀어지게 만들었다. 이 상황에서 보수 인사가 실용적 국정 운영에 기여하는 모습은, 보수가 극우와 동일어가 아님을 증명하는 드문 장면이 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국민의 힘이 ‘배신자’라 낙인찍은 바로 그 선택이, 장기적으로는 보수 이미지 회복의 단초가 될 가능성도 있다.


③ 권력의 독재화를 막는 내부 제동장치

정권이 한 진영의 논리로만 작동할 때, 국정은 쉽게 경직된다. 합리적 이질성이 내부에 존재할 때, 정책은 조정되고 권력은 스스로를 견제한다. 민주주의는 반대파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내부의 다른 목소리가 있을 때 더 건강해진다. 왜 협력하지 않아야 하는가?


물론 존재하는 위험과 한계


이 선택이 성공하려면 전제가 있다.

첫째, 이것이 단순한 ‘인사 이벤트’에 그쳐서는 안 된다. 실제 정책 반영과 제도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이는 정치적 계산으로 소모될 것이다.


둘째, 정부는 강성 지지층의 반발을 관리하되, 끌려가서는 안 된다. 지지층은 정치의 주인이지만, 정책의 설계자는 아니다.


다시 묻는다, 누가 배신자인가


진영의 순혈성을 지키기 위해 국가의 성장 동력을 포기하는 것이 충성이라면, 그 충성은 국가에 대한 배신이며 국민을 무시하는 태도이다.


정치의 목적은 진영의 승리가 아니라 공동체의 지속이다. 그 목적을 잊고, '자신'과 ‘우리 편’만을 위해 사고를 멈추는 순간 정치인은 국가와 국민에 대한 배신자가 된다.


이혜훈의 선택이 옳았는지는 지금은 아니다 시간이 증명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한국 정치에서 가장 위험한 배신은 특정 진영을 떠나는 행위가 아니라, 국가보다 진영을 먼저 생각하는 집단적 사고 정지다. 이것이야말로 집권 권력을 더 독단으로 만든다.


국민이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누가 배신했는가?”가 아니라, “누가 이 나라를 앞으로 움직이게 하는가?”


그 질문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모두 진영의 충실한 신도가 되고, 국민과 국가는 다시 한번 희생양이 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성장은 더디고 원점에서 엄청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