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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병철 Aug 29. 2024

마스터즈 오브 로마 4.

제 4 부 카이사르의 여자들

제 4 부 카이사르의 여자들     


동 시리즈 제4부는 기원전 68년에서 기원전 58년까지 약 10년간의 시기를 다루고 있다. 즉 카이사르 나이 32세~42세까지 당시의 로마의 시대적 상황과 카이사르 개인의 용트림을 위한 준비 과정을 세세히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카이사르가 왜 희대의 영웅이며 불세출의 인물인지 제대로 알기 위한 수순이기도 하거니와 말기에 이르는 로마공화정의 모습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내용들이다.


제목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카이사르 주변의 여인들을 중심으로 하나씩 얘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제4부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카이사르가 결혼한 첫 번째 여인은 킨나의 딸 킨닐라였다. 카이사르가 평생토록 잊지 못한 여인이었고 순수한 청년시절의 애틋했던 감정과 열정을 떠올리게 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여인이었으리라. . .

당시 집정관이었던 킨나는 민중파의 두였던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심복이었고 마리우스는 카이사르로 하여금 유피테르 대제관이라는 굴레와 함께 킨나의 딸 킨닐라와 혼인을 맺게 하였다. 그러다가 술라의 반란이 일어나게 되고 원로원파를 중심으로 민중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진다. 이에 따라 킨나는 공권박탈자의 명단에 오르게 되고 그의 딸 킨닐라 역시 유피테르 대제관의 아내가 될 수 없다는 술라의 판단으로 카이사르는 킨닐라와의 이혼을 강요받게 된다. 이를 거부하는 카이사르에게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었기에 그는 혈혈단신 로마를 탈출하여 방랑의 시절을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카이사르는 술라로부터 면죄부를 받게 되고 유피테르 대제관이라는 굴레에서도 벗어나게 된다(제3부 참조).

킨닐라와의 사이에서 율리아라는 딸이 태어나게 되고 카이사르의 유일한 핏줄이자 그의 삶에 위안을 가져다준다. 후에 율리아는 30살 차이가 나는 폼페이우스와 정략결혼을 하게 되는데 율리아는 아버지 카이사르의 뜻에 따라 충실히 그 역할을 수행하고 카이사르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는 데 큰 기여를 하게 된다.     


킨닐라의 급작스런 사망 이후 카이사르의 여성 편력이 시작된다.  

20세 초반의 나이에 시민관을 수여받은 카이사르는 나이에 걸맞지않게 원로원에 입성하게되고 그의 총명함과 잘 생긴 외모에 힘입어 모든 로마 여성의 로망의 대상이 된다.

게다가 로마 고위공직에 있던 관료들은 장기간 해외속주의  총독이나 법무관의 자격으로 소위 임페리움(법적으로 인정되는 자치적 권한)을 부여받아 파견되어 나가는 일이 개인의 영광이자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이었기에 이는 카이사르의 여성편력에 불을 댕기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고 생각된다.

카이사르가 맞은 두 번째 결혼 상대는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조카인 폼페이아 술라였다. 체제 개혁을 추구하는 카이사르의 기질 상 보수집단인 원로파들의 견제를 받고 있었는데 술라의 조카와의 결혼으로 이를 다소 무마코자 했던 것이다.

폼페이아 술라와 결혼이후, 카이사르는 수도담당 법무관으로서 최고의 명예직일 수 있는 최고신관 자리에 출마한다. 유피테르 대제관은 유피테르(제우스)신을 모시는 신관인 반면, 최고신관은 종신직인데다가 겸직이 가능하였기에 정치적 야망이 있는 자는 누구나 희망하는 선출직 종교지도자 자리였다.

선거 결과는 보니파(귀족파)라 불리는 쪽에서 수의 후보자가 출마하는 바람에 아주 운 좋게도 카이사르가 당선이 되었다.     


어느 날 최고신관 관저에서 개최된 보나 데아라는 여성의 수호신을 기리는 축제가 성대하게 진행되었는데, 아주 불미스런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다.

보나 데아 축제에는 남성의 출입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고 최고신관인 카이사르조차도 외부로 나가 저녁을 먹어야할 정도로 여성만을 위한 자리였다. 당시 망나니 같은 장난으로 유명했던 클로디우스라는 자가 엉뚱하게도 감쪽같이 여장(女裝)을 하고 관저로 잠입을 한다. 물론 그는 폼페이아 술라의 하녀에게 두둑한 뒷돈을 주어 그의 잠입을 도와주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축제 동안 그의 어설픈 행적으로 들통이 나고 그 하녀는 심한 추궁을 받게 된다. 배후에 누가 있었는지 캐묻는 닦달에 하녀는 앞으로 자신에게 가해질 심한 매질과 노예로 팔려갈 신세로 전락할 상황에 겁을 먹고 엉겁결에 폼페이아 술라를 들먹인다. 평소 인자하기 짝이 없던 폼페이아에게 한 가닥 구원의 희망을 걸었던 것이다. 당혹스런 것은 바로 폼페이아 술라였다.  

결국 동 사건은 클로디우스가 귀족 계급에서 평민으로 강등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지만, 재판 과정에서 키케로의 신랄(辛辣)한 비난에 클로디우스는 앙심을 품고 훗날 키케로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게 된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카이사르는 폼페이아 술라에게 서면으로 이혼을 통보하게 된다. 이때 남긴 카이사르의 유명한 말이 있다.

“카이사르의 아내에게는 한 점의 의혹도 있어서는 안 된다.”

천하의 바람둥이로서 할 수 있는 말인지 현대적 상식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지만 당시의 시대상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카이사르는 수도담당 법무관 직을 수행하면서 자신의 비용으로 도로 정비, 검투사들을 동원한 축제들을 수시로 개최하여 지명도를 한껏 올리게 된다. 이로 인해 그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빚더미에 앉게 되는데, 카이사르는 먼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가서 이를 해결하고자 한다. 총독으로 파견 나가는 것이 한 몫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기 때문이었다. 이때 있었던 일화로서 카이사르의 채권자들은 카이사르에게 부여되는 총독에 대한 교부금을 차압하고자 하였으나 카이사르에 대한 믿음이 굳건했던 마르쿠스 크라수스(로마 최고의 재벌)가 보증을 서줌으로써 그는 또 다른 고비를 넘기게 된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행운의 여신은 카이사르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히스파니아 총독의 임무를 성공리에 수행한 카이사르는 최고 관직인 원로원의 집정관 선거에 도전하고자 한다.

자신의 정치적 명망과 인기라면 당선이 당연하겠으나 보니파(귀족파)들의 방해 공작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보니라는 말은 좋은 사람들이라는 뜻인데 귀족파 혹은 원로원파를 부르는 별칭이었음). 게다가 당시 로마공화정은 정해진 임기와 선거에 의해 관료가 새로이 선출되는 통치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나 돈으로 유권자를 매수하는 금권선거로 얼룩지는 일이 부지기수였고 때로는 폭력이 난무하기도 했다. 현재 사회에서도 그러하지만 당시에도 힘과 자본이 선거를 위한 필요조건이라 하겠다.

이에, 카이사르는 자신의 기지를 발휘하여 마르쿠스 크라수스의 자본력과 폼페이우스의 병력을 활용코자 삼두체제를 공히 두 사람에게 제안한다.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는 한때 수석과 차석 집정관으로서 로마를 함께 통치한 경력이 있지만 서로 극심한 라이벌 의식으로 앙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자신을 통해 서로의 이익을 도모하는 전략적인 제안을 제시하는데, 크라수스에게는 그의 지지층인 기사계급(징세청부업자)에게 속주로부터 거둬들이는 세금 경감을 약속하고, 폼페이우스에게는 동방에서 돌아온 그의 병사들에게 공유지를 분할하여 배분할 것과 폼페이우스가 동방 국가들로부터 이룬 전과(戰果)에 대해서 원로원의 승인을 추진할 것을 약조한다. 특히, 폼페이우스에게는 전언한 바와 같이  자신의 외동딸인 율리아를 아내로 맞을 것을 허락하게 된다. 자신보다 6살이 많은 사위를 맞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세계사 시간에 배운 삼두체제가 이렇게 탄생을 한다.

서로의 이해득실에 따른 야합이라해도 무방하리라.

 

이렇게 돈과 완력을 두 손에 거머쥔 카이사르는 수석 집정관으로 무난히 당선이 된다. 집정관으로서 카이사르는 큰 업적을 남기는데,

1. 속주에 대한 부당한 착취와 수탈을 금지하는 법(이는 징세청부업자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다).

2. 공유지 혹은 귀족들의 라티푼디움을 국가에서 수용하여 퇴역 군인과 평민들에게 배분함으로써 그들의 삶의 터전을 마련코자 한다. 이에 필요한 자금은 국고에 부담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동방 속주들과 맺은 약조 실행과 함께 새로운 속주에 대한 개척으로 충당한다는 것이었다.     

집정관직을 성공리에 마무리한 카이사르는 갈리아(이탈리아 북부와 프랑스에 이르는 지역)총독으로서 새로운 꿈을 향해 도전한다.

그에게는 히스파니아의 경우처럼 갈리아라는 드넓은 지역의 정복지가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중해를 둘러싼 모든 영토를 로마를 위한 이탈리아를 위한 제국으로 만들겠다는 그의 야망이 본격적으로 닻을 올리게 되는 것이다.     



*P/S

1. 카이사르의 여자라면 세르빌리아를 절대 빼놓을 수 없다. 세르빌리아는 카이사르와 20년간 연인 관계를 유지하며 카이사르의 삶의 궤적과 함께 한 여인이라고 할 수 있다. 세르빌리아는 카이피오의 친손녀인데 카이피오는 제1부에서 언급한 아라우시우 전투에서 로마군을 패전으로 이끈 장본인이다. 하지만 당시 카이피오는 소위 ‘톨로사의 황금’이라고 하는 갈리아인들이 보관하고 있던 상당한 양의 황금 궤짝을 발견하여 횡령한 것으로 지목받고 있었는데, 아무튼 그로 인해 어마어마한 자산가의 대열에 합류한 인물이다. 세르빌리아는 어릴 적부터 매사를 매의 눈으로 바라보는 영리하다 못해 영악한 인물이었고, 그녀의 어머니는 드루수스(로마시민권의 확대를 주장하던 호민관으로 암살당한 인물)의 누이였으며, 세르빌리아의 첫 번째 남편은 명망가였던 브루투스였다. 그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 브루투스가 후에 카이사르를 저격하는 인물이 된다. 세르빌리아의 어머니가 불륜으로 낳은 자식이자 그녀의 이부동생이 카토인데, 카토는 카이사르의 정적이 된다.

브루투스 사후,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은 실라누스로서 이름난 자산가 집안이다. 실라누스는 집정관까지 지낸 인물이지만 병약한 관계로 세르빌리아가 카이사르의 아이까지 출산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일찍 병사하게 되자 브루투스는 톨로사의 황금으로 인한 카이피오 집안의 부(富)와 브루투스 가문의 자산 그리고 의붓아버지 실라누스의 유산까지 모두 상속을 받게 되어 일약 로마 최고의 자산가 중 하나가 된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에 반해 청혼을 하게 되고 두 집안은 약혼까지 하지만 카이사르는 후에 일방적으로 파혼을 선언하고 율리아를 폼페이우스에게 시집보낸다. 카이사르와 세르빌리아는 미래의 사돈관계라는 불편함에서 벗어나 둘만의 관계가 지속되는 상황이 전개가 된다.      

    

2. 키케로 vs 클로디우스

보나 데아 사건으로 유명한 클로디우스는 자신의 재판 당시 독설을 내뿜은 키케로에 대하여 반감을 갖게 된다. 평민으로 전락한 클로디우스는 호민관으로 당선이 되자 키케로를 반역죄로 기소하고자 한다. 그 사유는 키케로가 집정관 시절 카틸리나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카틸리나와 공모한 자들을 즉결 처분하여 사형에 처한 사건이 있었는데, 로마인을 공정한 재판 절차 없이 자신의 권한을 남용하였다는 명분이었다. 즉 로마인의 생명을 함부로 대한 것은 반역에 해당한다는 것으로서, 심약한 키케로는 클로디우스로 인한 강박관념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자진해서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제4부 카이사르의 여자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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