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표본

by 청유


분명히 자다가 중간에 깨서 눈을 떴던 기억은 있다. 시계를 봤지만 다시 눈을 뜨면 두세 시간은 훌쩍 지나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연례행사를 치르듯 아팠다. 하필 주말이었다. 일요일에도 진료를 하는 병원이 있어서 감사했다. 일주일째 차도 없이 앓고 있다. 약기운에 취해, 며칠째 속절없이 잠든다.

몸이 좋지 않거나 마음이 좋지 않을 때면 늘상 메모장에 머무르게 된다. 습관처럼 손이 먼저 움직인다. 약을 챙겨 먹듯 문장을 삼킨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는 않지만, 내가 천천히 사라질 뿐이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확인할 새도 없이 음악의 볼륨을 반쯤 키워둔 채 써 내려간다. 그렇게 잠시 견딜만해진다. 털릴대로 털려서 위로도 아래로도 갈 수 있는 구간에 정착해 있다. 생각 없이 쓰는 글은 생각 보다 볼 게 많다. 그래서 종종 아픈 게 좋기도라고 말한다면 마조히즘이려나.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유하는 공간에 대한 집착스러운 마음은 어디에서 비롯된 건지 얼핏 알겠다. 내 방이라고 할 게 없었고, 유년기 나의 안전지대는 겨우 두 팔로 막을 수 있는 정도의 공간감 정도였던 것 같다. 집이라는 공간에 항상 속해 있기는 하였으니, 단순히 어떠한 물성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두 팔다리 뻗고 편히 지낼만한 장소에 대한 부재라고 할까. 결론을 말하자면 공간은 나에게 있어서 가장 큰 결핍이었다. 올해를 맞이하면서는 결핍을 인정하기로 했으니 게시해 본다. 잔이 넘쳐흘러도 병을 더 기울이게 만드는 게 결핍인지도 모르겠다. 결핍은 동력이 된다. 결핍은 욕심이 된다. 결핍으로 움직인다. 내가 움직이면 결핍도 방향을 배운다. 이렇게 기록이라는 핑계로 누군가에게 읽히고자 하는 욕망도 결핍을 해소하는 방식 중 하나라고 해두는 게 맞겠지.

글이 좋다. 사람은 혼자 적는 일기마저 꾸며내 쓰고는 하지만 글을 쓰면 허구성이 성립되어 오히려 더 솔직해지고는 하니까 글이 좋았다. 글 뒤에 언제라도 숨을 수가 있었다. 나에게도 나만의 몰락이 있었고 때때로 몰락으로 하여금 비롯된 욕망은 필연적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방향으로 이어지고는 했다. 이따금 자기 연민의 내음이 스멀스멀 올라오기도 했다. 자기 연민은 지속적으로 경계하게 되는 것이다. 조금의 틈이라도 허용하는 순간 속절없이 바닥에 내려앉게 될 걸 잘 안다.

지금 말하는 인정의 의미는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에서 “근데”는 통하지 않는다. 넌 왜 그렇게 돈, 돈 거려.라는 물음에 아니, 그런데로 시작하는 대답이 아니다. 없이 살아서 그래. 너 보는 눈 있네. 이런 너스레까지 떨어주는 게 지금의 내가 정의한 결핍을 인정하는 방식이다. 언젠가 여기서 더 발전할 수도 혹은 아예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게 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는 지금의 방식을 채택했다.

오랜만에 얘기를 하려고 하니까 자꾸만 빙빙 둘러서 이야기를 하게 된다. 하고 싶은 말도 한가득 쌓인 탓에,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만.

결핍을 인정하기로 시작한 게 올해 1월이니 벌써 함께 지낸 지도 10개월 차다. 결핍을 인정하면 나의 비어있음을 직면하는 일이라서, 많이 허전할 줄 알았다. 오히려 나의 문제가 좋아졌다. 나의 바깥으로 내보일 수 있다는 건 그것이 더는 내가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하니까. 그것은 나인 동시에 분리해 놓을 수도 있는 존재가 된다. 언젠가는 닳도록 만져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때가 올 지도 모른다는 희망도 든다. 나를 자꾸 꺼내어 놓는다. 공허함은 어느새 납작해진다. 지저분하고 거뭇거뭇한 흔적들이 날아가면 나는 어떠한 이야기도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울림이 느껴지는 충만한 여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올해도 어김없이 아프고, 잠들다 깨는 사이 두세 시간이 지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공허함이 납작해질 때까지, 나는 결핍과 함께 있었다. 그렇게 남은 결핍이 나를 채웠다. 그렇게 사랑하고, 사랑은 끝내 아무 말로도 다 닳지 않았다. 감정의 잔류물이 세포 사이에 스며, 나를 천천히 염색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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