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죽음을 국가가 지원합니다.
https://youtu.be/SJ5 nqliXWWM? si=HoydzG5 M1 rSuIgUz
만약 어떤 사회가
“75세가 되면,
원하신다면 죽음을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이 사회를
인간적인 사회라고 느끼시겠습니까?
오늘 함께 이야기 나눌 영화는
일본 영화 〈플랜 75〉입니다.
이 영화는 노인의 죽음을 다루고 있지만,
사실은 죽음보다
우리가 노인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묻는 작품입니다.
이 영화가 특히 무서운 이유는
잔혹한 장면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대신 제도는 친절하고,
상담사는 상냥하며,
죽음은 매우 합리적인 선택처럼 제시됩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먼 미래의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우리가 이미 발을 들여놓고 있는
현실에 대한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오늘 이 시간을 통해
노인의 문제를 이야기하지만,
결국에는
우리 모두의 미래에 대해
함께 질문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왜 노인의 죽음을 ‘합리적 선택’이라 부르게 되었을까요?
조용한 화면으로 영화는 시작됩니다.
누군가는 도시락을 먹고, 누군가는 일터에서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평온한 일상 속에서
“75세 이상, 희망자에 한해 안락사를 지원합니다.”
라는 문장이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옵니다.
영화 〈플랜 75〉는
처음부터 관객을 향해 소리를 지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더 큰 두려움을 안겨줍니다.
이 영화가 충격적인 이유는
노인의 죽음이 잔인하게 묘사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죽음이 너무도 합리적이고, 친절하며, 체계적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이런 제도가 정말 가능할까요?”
그러나 우리는 질문을 바꾸어 보아야 합니다.
“이미 우리는 노인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말입니다.
노인 빈곤율 OECD 1위,
노인 자살률 OECD 1위,
고독사와 무연고 사망,
요양시설에서의 방치와 학대,
그리고 ‘연금 도둑’이라는 혐오 표현까지.
이 모든 현실 위에
〈플랜 75〉는 단 하나의 질문을 조심스럽게 얹습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느끼게 만든 사회라면,
그 선택은 과연 개인의 자유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영화 속 노인들은 ‘죽고 싶어서’ 이 제도에 신청하지 않습니다.
이 점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들은 “살기 싫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반복해서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민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이제는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사회에 기여하지 못하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이는 우울증의 언어라기보다는
사회가 오래도록 주입해 온 시선이
개인의 내면에 깊이 자리 잡은 결과입니다.
심리학적으로 보았을 때
이 상태는 ‘자기 비난형 절망’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사회로부터 오랜 시간 배제될 경우
결국 사회가 부여한 평가를
자기 자신의 목소리로 반복하게 됩니다.
“나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존재다.”
인문학은 이러한 상태를
‘존엄의 붕괴’라고 부릅니다.
철학자 칸트는 말했습니다.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라고.
그러나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사람을 비용의 관점에서 계산하기 시작했습니다.
“노인 의료비가 너무 많이 든다.”
“생산 가능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
“부양 부담이 너무 크다.”
이러한 언어가 반복되는 순간,
노인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관리 대상’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플랜 75〉 속 공무원들은 악인이 아닙니다.
상담사는 친절하고, 제도는 매우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더욱 끔찍합니다.
이 문제는 개인의 악의가 아니라
시스템 전체의 윤리적 붕괴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의 진짜 공포는 ‘동의서’에 있습니다.
노인들은 스스로 그 서류에 서명합니다.
그리고 사회는 이렇게 말합니다.
“본인이 선택한 것 아닙니까?”
그러나 철학적으로 다시 묻고 싶습니다.
선택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다른 선택지가 존재할 때에만
선택은 자유가 될 수 있습니다.
존엄한 노동도,
안정된 주거도,
의미 있는 인간관계도 제공되지 않은 채
오직 “조용히 사라지는 길”만이 제시된다면,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유도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이미 ‘플랜 75’와 닮은 사회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정년은 끝났고,
일자리는 줄어들었으며,
연금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몸은 아픈데 병원의 문턱은 점점 높아집니다.
그때 사회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도 오래 사시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젊은 사람들도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말은 위로가 아니라
조용한 퇴장 안내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요?
해결책은 분명 존재합니다.
다만 ‘제도 하나’로 해결될 문제는 아닙니다.
첫 번째는
노인을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관계의 주체’로 다시 세우는 일입니다.
노인은 보호만 받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경험을 지닌 사람이며
고유한 삶의 서사를 가진 인간입니다.
지역 기반의 일자리,
세대 통합 프로젝트,
노인 멘토링과 같은 구조를 통해
아주 작은 역할이라도
‘나는 여전히 필요한 존재다’라는 감각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노후를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리지 않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준비하지 못한 당신의 책임”이라는 말은
가장 잔인한 말 중 하나입니다.
불안정 노동, 돌봄 노동, 여성의 경력 단절과 같은 구조 속에서
노후는 개인의 능력 문제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결국 ‘조용한 안락사’라는 선택지에
기대게 됩니다.
세 번째는
죽음을 관리하는 복지가 아니라
삶을 지지하는 복지로의 방향 전환입니다.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죽음을 선택하게 되는 사회라면,
우리가 관리해야 할 것은 죽음이 아니라
그 고통 자체입니다.
주거,
의료,
외로움.
이 세 가지 문제만 해결되어도
〈플랜 75〉는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노인 문제는 노인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곧 우리의 미래 문제입니다.
지금의 20대와 30대가
이미 이 사회에서 소진되고 있다면,
그 끝에는
〈플랜 75〉와 같은 선택지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노인을 위한 영화이기 이전에
젊은 세대를 향한 경고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이 영화를 이렇게 읽고 싶습니다.
〈플랜 75〉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죽을 권리”를 논하기 전에
“살 권리”가 충분히 보장되었는지를
먼저 묻자고 말입니다.
존엄이란
끝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끝까지 버텨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회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영상을 보고 계신 여러분께
한 가지를 여쭙고 싶습니다.
혹시 부모님의 얼굴이 떠오르셨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아직
사람을 비용으로 바라보지 않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릅니다.
사회가 아무리 차갑게 밀어낸다 하더라도
우리는 서로를
끝까지 사람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플랜 75〉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일 것입니다.